소설리스트

29화 (30/156)

* * *

나는 에렐로 돌아와 라파쉬의 작업장을 마련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세티아 남작이 대장간을 만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은 거지만.’

나는 남작에게 ‘대장간이 필요해요. 기간은 보름이에요’라고 단 두 마디만 했을 뿐이니까.

그렇게 마련된 대장간은 제법 훌륭했다. 급하게 마련한 작업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저택 안에는 대장간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저택과 가까운 곳의 주택을 사들여 대장간으로 개조했다. 1층은 작업장으로 쓰고 2층은 숙소로 활용할 수 있어 고향 마을을 떠난 라파쉬가 지내기에 적당했다.

“이제 주인만 들어오면 되겠네요.”

“드워프 대장장이를 데려오신다죠.”

남작은 하고 싶은 말이 꽤 많은 눈치였다.

“어떻게 드워프를 고용하신 겁니까? 드워프는 또 언제 만나신 거고요? 몰래 저택을 나가셨던 겁니까? 아가씨께 문제가 생기면 제가 공작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남작이 하고 싶었던 말을 주르륵 쏟아냈다. 나는 앞에서 쏟아진 질문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 말에 반응하기로 결정했다.

“공작님께서 절 신경이나 쓰실까요? 그러셨다면 여기로 절 보내지도 않으셨을걸요.”

오베론 공작은 이브리아에게 언제나 냉정하게 굴었다. 그건 소공작인 아치볼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에게 그다지 정붙이지 않는 타입으로 보였지.’

소설을 읽었을 때도 분명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내 말을 듣자마자 그의 표정이 미묘해진 걸 보면, 남작의 생각은 나와 다른 것 같았다.

“각하께서는 아가씨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아가씨를 에렐로 보내신 것이 오히려 그 증거이지요.”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남작을 쳐다보았다.

‘이브리아를 에렐로 보낸 게 왜 딸을 소중하게 여기는 증거지?’

소설 속 이브리아는 죽기 직전까지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에렐에 유폐했다고 생각했다.

“에렐은 왕국 어떤 곳보다 왕도에서 떨어진 곳입니다. 각하께서는 왕도의 소란에서 아가씨를 보호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나는 남작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남작은 공작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니, 그를 따뜻한 아버지로 포장하고 싶겠지.’

“요즘 기사단은 어때요?”

나는 조금 더 건설적인 쪽으로 대화 주제를 옮겼다. 다행히 남작도 자연스럽게 주제를 따라왔다.

“매일 5시간씩 기초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한 달만 지나도 성과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보통 기사단은 훈련을 기사의 자율에 맡긴다. 제5 서리 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관례를 깨고 기사단의 훈련을 직접 지휘했다.

제5 서리 기사단원들 대부분은 용병 출신이었다. 실전과 임기응변에는 강하지만, 기초가 부족했다. 와이번의 등에 타는 건 임기응변만으로는 할 수 없었다. 든든한 체력과 흔들리지 않는 균형이 있어야 한다. 이건 기초를 쌓으며 능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용갑만 남은 거네요.”

누구도 만들어 본 적 없는 와이번의 갑옷. 제작 기간이 얼마나 필요할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정확한 일정은 라파쉬가 와서야 알 수 있겠지만요.”

“몇 년이 걸려도 저희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전 못 기다려요.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에 완성해야만 해요.”

와이번 토벌을 막으려면 다음 토벌 기간이 다가오기 전에 용기사를 선보여야 했다.

‘리던이 보고를 했겠지만, 눈으로 보지 않으면 쉽게 믿지 못할 거야.’

“다음 겨울이 오기 전이라.”

남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으로 그 미래를 그려 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눈빛이 아득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금세 선명해졌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부터는 아가씨께서도 기초 훈련에 참가하신다고요.”

“네.”

“꽤 힘들 텐데요.”

“하지만 배워 두면 좋을 것 같아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지금 몸도 너무 약골이고, 게다가…….”

말끝을 흐리자 남작의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제가 생각지 못하게 검을 하나 얻게 돼서요.”

* * *

라파쉬는 와이번을 타고 씩씩하게 에렐로 왔다. 막 와이번에서 내린 그녀는 흥분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제가 방금 와이번을 타고 대륙을 횡단했어요, 이브리아.”

“축하드려요. 대단한 모험을 하셨네요.”

“다른 녀석들은 절대 이런 모험을 못 할 거예요. 드워프들은 땅에 붙어사는 게 특기거든요. 땅에서 발이 떨어지면 죽는 줄 알죠.”

라파쉬가 너스레를 떨며 등에 메고 왔던 봇짐을 풀었다. 그 안에 성검 유피테르가 있었다.

“받으세요. 완벽하게 수리한, 진짜 유피테르예요.”

라파쉬가 건넨 성검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초라하고 꼬질꼬질하던 검신이 뽀얀 은백색으로 변해 있었고, 더러운 붕대로 대충 감겨 있던 손잡이에는 녹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 보석은 새로 박은 거예요.”

내 시선이 보석에 닿아 있는 것을 알아챈 라파쉬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브리아의 눈동자 색에 맞췄죠.”

“그걸 유피테르가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전 당연히 좋습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일부를 제 몸에 새길 수 있다면 영광이지요.]

기분 탓인지 유피테르의 목소리도 한층 더 깔끔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검집도 가져왔어요.”

화려한 검에 비해 검집은 투박했다. 그건 내 요청에 따른 결과였다.

“주문한 대로 투박하게 잘 나왔네요.”

“사실 대장장이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에요. 이 아름다운 검을 이런 투박한 검집에 집어넣다니.”

“하지만 내가 유피테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요.”

단순히 아름다운 검이 아니라 유명한 성검이었다. 별다른 능력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유명세가 대단한 검이니 탐을 내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알려지면 이래저래 피곤할걸.’

나는 서둘러 유피테르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화려한 검신이 검집에 가려지자 라파쉬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대장장이로서의 욕심이 그렇다는 거였어요. 당연히 주인의 뜻에 따라야죠. 그래도 가끔 검집에서 빼고 휘둘러 주세요. 제가 열심히 날을 손봤거든요.”

아련한 눈빛으로 유피테르를 바라보던 라파쉬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제 작업장은요?”

“훌륭하게 준비했죠. 안개산에 있는 작업장만큼 훌륭하진 않겠지만…….”

“훌륭한 대장장이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 법이죠. 게다가 저희에겐 이 망치만 있으면 되니까요.”

라파쉬가 거대한 망치를 붕붕 휘두르며 웃었다.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며 웃는 드워프라니.’

라파쉬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작업장은 이쪽이에요.”

나는 라파쉬를 준비한 작업장으로 안내했다. 꼼꼼하게 시설을 둘러본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훌륭한데요. 안개산의 작업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어요.”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줘요.”

“그럼, 미스릴을 구해 주세요. 용갑에 쓸 재료예요.”

라파쉬가 작업대에 커다란 도면을 펼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갑을 기초로 해서 대략적으로 도면을 만들어 봤어요. 작은 조각을 이어 붙이면 되니까 크기는 문제없어요. 문제는 무게죠.”

라파쉬가 도면 한쪽에 복잡하게 쓴 숫자들을 가리켰다.

“이걸 평범한 철로 만들게 되면 엄청나게 무거워져요. 웬만한 집 한 채 무게는 나올걸요. 그걸 입고 와이번이 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무게를 줄여야 해요. 강도는 유지하면서요.”

“그게 가능한 금속은 미스릴뿐이고요?”

라파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릴이라면 여러 판타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명한 금속이었다. 덕분에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미스릴은 가볍고 단단하다. 유리처럼 광택도 낼 수 있어 아름다움도 잡을 수 있었다. 모두가 원하는 꿈의 금속.

‘당연히 가격이 비싸지.’

미스릴을 확보해야 할 줄 알았다면 리던의 백지 수표를 아껴 둘 걸 그랬다.

‘아니야. 그 백지 수표를 썼기 때문에 라파쉬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라파쉬를 고용하지 못했다면 이런 제작 계획조차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돈을 융통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네.’

전생의 특기를 발휘해 볼 시간이었다.

* * *

나는 탁자 위에 유피테르를 올려 두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아름다웠다.

‘팔까?’

저걸 팔면 미스릴 광산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절 팔아넘기실 겁니까, 주인님?]

내 눈에 번뜩이는 욕망을 읽어 낸 유피테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리아, 팔아넘기자. 어차피 성검 따위, 내가 있으면 필요 없잖아.”

옆에서 해리도 나를 부추겼다. 확실히 악마와 성검, 둘 다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해리 쪽이 활용도가 훨씬 높았다.

[주인님, 제게는 많은 재주가 있습니다. 절 팔면 그걸 놓치시는 거지요.]

분위기 속에서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유피테르가 적극적으로 자기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떤 재주가 있는데요?”

[우선 화려한 빛을 뿜을 수 있습니다.]

“……그걸 어디다 쓰는데요?”

[적진에 나타날 때 화려한 후광과 함께 신성한 모습으로 등장할 수 있지요.]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했다가는 당장 적의 표적이 되기 마련이었다.

“다른 능력은 없어요?”

유피테르가 자신 있게 외쳤다.

[정화 기능도 있습니다.]

“정화 기능이요? 독 같은 걸 정화하는 건가요?”

그렇다면 엄청난 능력이었다. 독에 걸려도 무조건 살 수 있을 테니까.

[아닙니다. 몸의 악취를 정화합니다.]

“……그건 또 어디다 쓰는데요?”

[전쟁터에서 오래 지내면 씻기 힘들고, 그러면 몸에서 냄새가 나지요. 전 그 냄새를 꽃향기로 정화할 수 있습니다.]

“능력을 쓰려면 우선 일주일간 목욕을 안 해야겠네요.”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능력도 다 이런 식인가요?”

[아마 비슷할 겁니다. 더 이야기할까요?]

“아뇨. 그만 들어도 될 것 같아요.”

‘정말 의문이다.’

왜 이 검에 성검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까? 왜 선택받은 자만 이 검을 뽑도록 제한을 걸어 둔 걸까?

‘그냥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뽑았어도 됐겠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유피테르를 검집에 넣었다. 성검은 나와 드워프들이 교류하게 된 단초였다. 그들은 성검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함부로 팔아넘겼다가는 긍정적인 관계에 금이 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파는 건 최후의 보루로 생각해야지.’

나는 치마를 걷은 뒤, 한쪽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렸다. 밴드를 이용해 허벅지에 단검을 장착할 생각이었다. 이름뿐인 성검이지만 몸에 지니고 다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별다른 능력은 없어도 날은 확실하니까, 만약의 사태에 호신용으로 쓸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움직이다가 멍하니 선 해리를 발견했다. 그는 의자 위에 올린 내 다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해리.”

“어, 어?”

이름을 부르자마자 해리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에게 명령했다.

“고개 돌려요.”

“응.”

해리가 휙- 하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는 이런 상황에서 알아서 고개 돌리고요.”

“응.”

해리가 뒤늦게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순식간에 개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뭘 저렇게 쑥스러워 한담?’

2천 살이나 먹어서 여자 다리 하나 봤다고 얼굴이 빨개지는 악마라니. 여러모로 색달랐다.

‘악마는 엄청 퇴폐적이고 문란하고, 그런 이미지였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건가? 내가 의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해리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풋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브리아!”

“이렇게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때 다급한 목소리의 라파쉬가 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 라파쉬를 말리는 엠마도 함께였다.

“엠마?”

내 부름에 두 사람이 벌써 방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엠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가씨. 이분이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이닥치셔서…….”

“그건 괜찮아. 어차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허벅지에 단검 차는 것을 마무리하고 치마를 내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안에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완벽해.’

나는 만족스럽게 웃고 다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엠마는 고개를 숙였고, 라파쉬는 재빨리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브리아, 이거 뭐예요?”

라파쉬가 내민 것은 흑철목이었다. 아직 날씨가 추우니 벽난로를 피우라고 목재를 챙겨 준 듯했다.

“흑철목이잖아요.”

“흑철목?”

라파쉬가 생소한 이름을 들었다는 양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문득 흑철목이 에렐 영지의 검은 숲에서만 자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평생 안개산의 드워프 마을에서 살았던 라파쉬에게 흑철목은 상당히 생소한 목재였을 것이다.

“영지 북쪽의 검은 숲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추위를 견뎌 내고 자라서 불에 강해요. 에렐에는 널리고 널린 목재죠.”

“뭐? 널리고 널렸다고요? 이게?”

라파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그 표정은 숫제 경악에 가까웠다. 나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요? 뭔가 이상해요?”

“그게 아니라……”

라파쉬가 머뭇거리며 목재를 바라보았다.

“이건 마정목이잖아요.”

“마정목?”

“그래요. 마력을 품고 있는 나무!”

“나무가 어떻게 마력을 품고 있죠?”

마정석이라면 알고 있다. 카시안 일파가 개발을 추진 중인 곳이 마정석 광산이니까. 마정석은 마력을 품은 돌이었다. 마법사들이 제작한 마도구에 마정석을 장착하면, 마법사 없이도 도구가 작동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현대의 건전지 같은 역할이지.’

문제는 이 마정석이 아주 희귀하다는 데 있었다. 마정석을 채굴할 수 있는 광산은 왕국에 단 하나뿐. 매장량이 적은 데다 채굴도 쉬운 일이 아니라 극히 소량의 마정석만 유통되고 있었다.

마정석의 수명이 영원한 것도 아니었다. 함유한 마력을 모두 소진한 마정석은 산산이 조각나 더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수요에 비해 공급은 늘 부족했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마정석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그래서 카시안 일파가 새로운 마정석 광산을 개발하려고 한 건데…….’

오베론 가문에서 투자금을 끊었으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마정석 가격은 계속 오르겠지.’

그런데 마력이 깃든 나무라니?

흑철목은 해리의 힘 덕분에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지금에서야 유용한 자원이지만, 그전에는 거리를 굴러다니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정말 마력이 깃든 나무라면 그런 취급을 받았을 리가 없었다.

흑철목에 대해서라면 나보다 에렐 토박이인 엠마의 지식이 더 깊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엠마를 바라보니 그녀도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혹 다른 나무와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착각이라고요?”

라파쉬가 미간을 찌푸리며 흑철목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 나무…… 칠흑 같은 외관에, 단단함은 일반적인 목재와 비교할 수 없고, 불마저 견디는 견고함이 있지 않나요?”

라파쉬의 입에서 흑철목의 특징이 줄줄 흘러나왔다. 엠마와 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라파쉬는 우리의 놀란 얼굴을 보고 그게 정답임을 확신한 것 같았다.

“불에 타지 않는 나무잖아요. 이상하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마력이 불에 타는 걸 방해하는 거예요.”

“그거야…….”

당연히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여기는 판타지 세계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싶었지.’

머쓱하게 볼을 긁적이는 나를 보며 라파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나무의 특징이 우리 마을 ‘마정목’의 특징과 정확히 일치해요. 우리 드워프 마을에 단 한 그루밖에 없는 나무인데……. 아무튼 간단한 실험을 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실험이요?”

“나무의 수액을 채취해서 그걸 틀에 넣고 굳히면 돼요. 고체가 되면 푸른색 돌로 변하는데, 우린 그걸 청요석이라고 부르죠.”

“그럼 흑철목의 수액으로 돌을 만들어서 마도구에 장착해 보면 답이 나오겠네요. 흑철목이 정말 리쉬가 말하는 마정목인지.”

실험은 간단하니 금방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흑철목이 정말 마력을 품은 나무라면…….’

엄청나게 큰돈이 된다. 하지만 단순히 돈 문제만 연관된 게 아니었다.

‘희귀한 자원을 독점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권력을 얻게 돼.’

마정석을 대체할 자원의 등장은 세상의 판도를 바꿀 것이다.

만약 실험이 성공한다면, 앞으로의 일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결정은 흑철목이 자라는 검은 숲의 주인이자 이브리아의 아버지, 오베론 공작이 내려야 한다.

‘무엇보다 이런 복잡하고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어……. 난 그냥 하찮은 악역 조연일 뿐이란 말이야…….’

원래 이런 복잡하고 귀찮은 일은 높으신 분들이 하는 것 아닌가?

‘일은 능력 있는 부자 아빠가 다 해 줄 거야!’

나는 하찮은 악역 조연의 편리함을 즐기면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구경이나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공작도 나한테 손 떼라고 하겠지. 이렇게 중요한 일은 자기가 직접 하려고 할 테니까.’

일이 잘 풀리면 공작은 큰돈을 벌 것이다.

‘이미 엄청난 부자인데,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되겠지.’

그럼 그의 딸인 이브리아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질 게 아닌가? 심지어 내가 준 정보로 번 돈이니, 수익의 일부, 미스릴을 구할 정도의 돈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베론 공작은 유능하고 공정한 사람이었다. 왕이 그를 견제하면서도 완전히 내치지 못한 것도 그의 유능함이 왕국에 큰 힘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간의 행보를 고려하면 이브리아에 대한 애정은 별로 없어 보였지만, 그런 사람인만큼 공을 세운 보상은 확실히 해 줄 터였다.

‘너무 공정한 나머지 사고를 치자마자 딸을 에렐로 내쫓았지만!’

어쨌든 이게 바로 일확천금의 기회! 로또 당첨보다 더 확실한 벼락부자 급행 코스!

“실험이 얼마나 걸릴까요?”

“이게 만약 제가 알고 있는 마정목이라면…….”

기억을 더듬던 라파쉬가 손가락을 두 개 폈다.

“이틀이면 수액이 굳을 거예요.”

“간단하네요. 그럼 실험을 해 볼까요?”

“저만 믿으세요.”

라파쉬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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