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와 해리는 드워프 마을로 안내되었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높이가 낮았다.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 사는 마을이라 그런 것 같았다. 덕분에 키가 큰 해리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불편하게 다닐 거면 그냥 개로 변하는 게 낫지 않아요?”
“개로 변하면 쓸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생긴단 말이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본체로 있는 게 좋겠어.”
“뭐, 특별히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나는 우리 앞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드워프들은 모두 친절한 얼굴로 우리를 대접했다. 맛있는 음식에, 달콤한 술에, 경쾌한 음악까지. 잔치를 마련한 드워프 마을의 수장은 자신을 누안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이곳에 마을을 만들어 오랫동안 성검을 지켜 왔네. 그 성검을 만든 사람도 우리의 선조일세.”
그가 말하는 사연은 이랬다.
“그 성검, 유피테르는 우리 일족 최고의 걸작이야. 그래서 자격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도록 검에 자아를 부여하고 안개산 끝자락에 꽂아 두었지. 성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찾아왔지만 모두 실패했어.”
누안은 먼 옛날을 떠올리는 듯 아득한 눈으로 성검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고, 눈이 내렸네. 성검은 고스란히 세월을 맞아 가며 점점 삭아 갔지. 우리 일족은, 우리의 걸작이 그렇게 망가져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어.”
누안이 그때의 심정을 되새기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검을 수리를 하려고 했네. 그러자면 검을 뽑아야만 했지. 그런데 우습게도, 유피테르는 검을 만든 우리 일족조차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어. 그래서 계속 기다린 거야. 누군가 검을 뽑아 줄 때까지.”
사연을 풀어놓은 누안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성검의 주인이시여. 부디 그 검을 우리 손에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일족이 처음 만들었던 걸작, 그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 드릴 테니.”
나는 고개를 숙여 성검을 바라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검. 수리가 필요한 건 확실했다. 드워프들이 이렇게 간절히 애원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수리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가 간절하다니 그 점을 내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도 있을 터.
“좋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답변에 누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이라면……?”
“제겐 유능한 대장장이가 필요해요. 이곳에 있는 유능한 대장장이 중 한 명을 제가 고용하고 싶어요. 유피테르의 수리는 그분께 맡길 거고요.”
내 말에 드워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안이 수군거리는 드워프들을 힐끗거리며 내게 물었다.
“고용한 대장장이는 인간의 마을로 데려가실 겁니까?”
“그래야겠죠.”
드워프들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성검을 만져 볼 수 있는 기회야.”
“하지만 인간의 마을로 가야 하잖아!”
“인간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성검은 인간을 선택했는걸.”
수많은 목소리가 뒤섞였다. 그 혼란을 수습한 건 그들의 수장 누안이었다.
“조용!”
그의 일갈에 떠들썩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가 제대로 마을을 장악한 훌륭한 리더라는 증거였다.
“라파쉬를 고용하시죠.”
“아버지!”
누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만 가득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목소리와 함께 주홍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자 드워프가 앞으로 나섰다. 아마 그녀가 라파쉬인 것 같았다.
“저는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 성검을 만질 수 있는 영광도 필요 없어요.”
“하지만 네가 우리 일족 중 가장 뛰어나다. 성검은, 우리 일족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져야 해.”
“하지만……”
“라파쉬, 수장의 명이다.”
누안의 말에 라파쉬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울상이 된 얼굴로 만찬장을 뛰쳐나갔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데려가고 싶진 않아요.”
무슨 일이든 자신이 즐겁게 해야 효율이 나오는 법이었다. 이렇게 억지로 데려가면 사사건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 마을 밖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 두려워하고 있을 뿐입니다. 적응력이 좋은 녀석이니, 금방 익숙해질 겁니다.”
누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엇보다 이 마을에서 라파쉬보다 뛰어난 대장장이는 없습니다. 데려가신다면, 그 아이가 무엇이든 만들어 낼 겁니다.”
“그럼 이런 것도 가능할까요?”
나는 가방에서 마갑 도감을 꺼내 누안에게 건넸다. 책을 받아 든 그는 조금 의아한 표정이었다.
“마갑이라면 아주 간단하지요. 이것 때문에 대장장이가 필요하신 거라면, 인간 대장장이를 찾으셔도 됐을 텐데요.”
“그렇죠. 하지만 저는 이런 형태의 갑옷을 와이번에게 입히고 싶어요. 그 위에 안장과 등자도 달고 싶고요.”
내 설명에 누안의 눈이 커졌다.
“와이번의 등에 사람을 태우실 겁니까?”
“네.”
“하지만 와이번은 사나워서 사람을 태울 수 없을 텐데요.”
“이미 와이번을 타고 여기까지 왔는걸요.”
“예?”
그렇지 않아도 커졌던 누안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역시 성검의 주인이십니다. 여러모로 범상치 않으시군요.”
그렇게 말하는 누안의 시선이 해리를 향해 있었다. 해리는 내가 얻은 범상치 않은 존재들 중에서도 능력이 으뜸이었다.
“라파쉬에게 그 아이가 만들게 될 것을 알려 주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라파쉬는 분명 성검의 주인을 따라가고 싶어 할 겁니다.”
누안이 호언장담했다.
* * *
누안과 긴 대화를 마치고 나온 라파쉬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은 상당히 다부졌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저는 라파쉬입니다. 보통은 리쉬라고 부르지요.”
“리쉬.”
확인차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라파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이브리아 오베론이에요. 이브리아라고 불러도 좋아요.”
“성이 있는 걸 보니 귀족이군요. 이브리아 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인간의 계급을 드워프에게 강요할 순 없죠. 그냥 이브리아로도 괜찮아요.”
“그럼 사양 않고, 이브리아.”
라파쉬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아버지께서 내가 하게 될 일을 말씀해 주셨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흥분돼요. 이 세상의 어떤 대장장이도 와이번을 위한 갑옷을 만든 적은 없거든요.”
라파쉬가 상기한 얼굴로 말을 쏟아냈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에렐에 가고 싶지만, 성검은 이곳에서만 고칠 수 있어요. 처음 성검이 만들어진 장소, 거기가 아니면 기운을 담을 수 없죠. 성검을 제게 주고 가시면, 그걸 수리해서 에렐로 갈게요.”
“얼마나 걸릴까요?”
“성검을 고치는 건 보름이면 충분해요. 하지만 에렐로 이동하는 시간이 상당하겠죠.”
“그건 걱정 없어요. 우리 쪽으로 전서구를 보내면 와이번을 보내 줄게요. 그걸 타고 와요, 리쉬.”
“와이번을요?”
라파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상기했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멋지네요. 제 인생 최고의 모험이 될 것 같아요.”
* * *
드워프 마을을 빠져나오자 어느새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른 새벽 에렐을 나섰으니, 이곳에서 상당한 시간을 소비한 셈이었다. 그래도 수확이 상당했다.
“이렇게 하루 만에 해결할 줄은 몰랐어요.”
적어도 두세 번은 이곳에 와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처음 찾은 날 곧바로 드워프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다 성검까지 얻었고.’
검을 다루지 못하는 입장이라 크게 감흥은 없지만, 어쨌든 성검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내가 성검을 뽑다니. 그 머저리분도 못 뽑은 거라면서요? 그분은 한 나라를 세우신 분인데, 어쩌다 성검이 나 같은 사람 손에 뽑힌 걸까요?”
나란히 걸어 와이번에게 돌아가는 와중에도 해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 혼자 계속 떠드는 꼴이 되자 괜히 민망해졌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불공평해.”
해리의 입에서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답이 튀어나왔다.
“뭐가 불공평한데요?”
“네 이름 말이야!”
“내 이름이 왜요?”
“나한테는 네 이름 부르라고 안 했잖아!”
해리의 외침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이름이야 그냥 부르면 되잖아요.”
“뭐?”
“왜요? 내 이름 뭔지 몰라요?”
“……알아.”
“말해 봐요.”
“……이브리아 오베론.”
쉽게 흘러나온 대답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거봐요. 쉽죠?”
해리는 어쩐지 멍한 얼굴이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멍청하게 선 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든 멋대로 하면서 이름 부르는 건 왜 그렇게 안 했나 몰라.”
나는 굳어 있는 해리를 지나쳐 와이번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 정신을 차린 해리가 그 뒤를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이브리아.”
“네. 해리.”
겨우 이름 한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해리가 헤벌쭉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