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156)

* * *

해리와 나는 와이번을 타고 서북쪽 안개산까지 한 번에 날아왔다. 마차로 왔다면 꼬박 세 달은 걸렸을 거리였다. 나는 정상에 안착하자마자 가방을 뒤져 와이번에게 육포 조각을 건넸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 줘. 괜찮겠어?”

와이번은 알았다는 듯 눈을 껌뻑이며 기분 좋게 육포를 먹은 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와이번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먼저 주변을 탐색하고 있는 해리에게 다가갔다.

“어느 쪽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드워프들은 재료 수급 때문에 광맥 주변에 모여 사는 경향이 있어. 그 근처부터 찾아보면 좋겠지.”

“그럼 그 광맥은 어디 있는데요?”

“광맥은 불의 기운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걸 찾아보면 될 것 같아.”

천천히 주변을 살피는 해리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붉게 일렁였다. 힘을 써서 불의 기운을 탐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

한참이나 주변을 탐색하던 해리가 방향을 정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나는 그 의견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해리는 방향을 잡은 뒤에도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변을 탐색해 길을 정했다.

나는 엠마가 가방에 넣어 준 쿠키를 먹으며 터덜터덜 그 뒤를 따랐다. 크랜베리가 박힌 치즈 쿠키였다. 내가 말없이 해리의 뒤를 따르며 쿠키 하나를 다 해치웠을 때쯤,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길을 찾으며 해리가 여러 번 멈춰 섰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여기가 기운이 제일 강해. 마을이 있다면 이 근처일 거야.”

“그럼 흩어져서 주변을 뒤져 볼까요?”

“그게 빠르겠지? 혹시 뭐 이상한 거 튀어나오면 나 불러.”

“역시 내 강아지. 든든하네요.”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자, 해리가 입을 비죽이며 몸을 뒤로 뺐다.

“손에 쿠키 부스러기 묻어 있거든!”

“아. 먹을래요?”

혼자서 고생하는 해리를 두고 너무 나 혼자 먹었나 보다. 미안함에 재빨리 가방을 뒤지려는데, 해리가 내 손을 붙잡아 제 얼굴로 가져갔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가 싶어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해리의 혀가 내 손가락을 핥아 내렸다.

“힉?”

혀가 닿는 감촉에 놀라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빨리 손을 빼려고 해 봤지만, 해리의 힘이 더 강했다.

“더럽게 뭐 하는 거예요?”

“먹을 거냐고 묻기에.”

“누가 내 손을 먹으래요?”

“네 손에 부스러기 남아 있었어.”

해리가 그렇게 말하며 다른 손가락을 핥았다.

“더럽다니까요!”

나는 소리치며 해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하지만 해리는 그 공격을 예상했다는 양 가볍게 다리를 뒤로 뺐다. 목표물을 잃은 공격은 애꿎은 몸의 중심만 흔들어 놓았다. 나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해리의 가슴팍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야야…….”

나는 강하게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며 해리를 올려다보았다.

“새 쿠키도 있었단 말이에요. 기다렸으면 꺼내 줬을 텐데 그걸 못 참고 사람 손을 빨아요?”

“난 쿠키보다 부스러기를 더 좋아해서.”

“뭐라고요? 식성도 참 특이하시네.”

아무튼 악마는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쿠키 안 먹을 거면 주변이나 찾아봐요. 해 떨어지기 전에 산을 떠나야 하니까.”

나는 투덜거리며 해리를 밀어내고 주변을 살폈다. 녹음이 드리운 산은 평지보다 훨씬 추워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땅에는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고, 한켠에는 깎아지른 듯 거대한 암석의 벽이 보였다. 나는 홀린 것처럼 암석의 벽 가까이 다가갔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거에선 이런 벽을 두드리면 입구가 나오던데.’

하지만 아무리 벽을 두드려도 입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긴.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서 몸을 돌리는 순간, 알 수 없는 물체가 발을 걸었다.

“악!”

나는 대책 없이 바닥을 굴렀다. 제대로 넘어진 것인지 무릎이 쓰라렸다. 아마 까져서 피가 나고 있을 듯했다.

‘나무뿌리에라도 걸렸나?’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넘어뜨린 원흉을 쳐다보았더니, 낡고 꼬질꼬질한 검 한 자루가 바닥에 꽂혀 있었다.

“위험하게 누가 여기다 검을 버리고 간 거야?”

나는 산에 쓰레기를 투척하고 가 버린 이름 모를 누군가를 비난하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이대로 두면 다른 사람도 나처럼 넘어져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뽑히려나?”

나는 검을 이리저리 살폈다. 상당히 깊게 박혀 있어 아무래도 뽑는 게 쉽지는 않을 듯했다.

‘해 보고 안 되면 해리한테 도와 달라고 하자.’

검 손잡이에는 낡은 붕대가 감겨 있었다. 흙과 검댕이 잔뜩 묻은 붕대가 그렇지 않아도 꼬질꼬질한 검을 더 초라하게 보이도록 했다.

‘으. 찝찝해서 잡기 싫게 생겼어.’

나는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잡이를 감쌌다. 그렇게 작업을 해 두니 훨씬 거부감이 덜했다. 나는 손수건으로 감싼 손잡이를 꽉 쥐고 검을 잡아당겼다.

‘바닥에 깊이 박혀 있으니까 꽤 큰 힘이 필요하겠지?’

나는 전력을 쏟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검을 잡아당기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어어?”

검이 생각보다 너무 쉽게 뽑혔다. 쑥 뽑힌 검을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검인 줄 알았는데 단검이었잖아!’

길이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나는 해리를 걷어찼을 때처럼 이번에도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검과 함께 뒤로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아아아!”

하필이면 구르는 곳이 내리막이라 쉽게 멈추지도 못했다. 신나게 구르던 나는 거대한 나무에 요란하게 부딪히고 나서야 데굴데굴 구르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머리 위로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이고, 아파라.”

나무에 부딪힌 등을 물론이고, 바닥에 쓸린 팔과 다리까지 쓰라렸다. 나는 내 몸을 덮어 버린 나뭇잎을 신경질적으로 걷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비명을 지르며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아파!’

구르면서 부딪힌 곳들이 움직일 생각 하지 말고 쉬라며 비명을 질러 댔다.

‘괜히 쓰레기 치우겠다고 나섰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이래서 사람은 착하게 살면 손해였다.

“다시는 무단 투기한 쓰레기에 손 안 댈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혼자서는 움직이기 힘드니 해리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해……]

하지만 해리를 부르기도 전에, 귓가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어?”

나는 놀라서 굳어 버렸다. 일반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해리와 주고받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해리가 아니었다.

해리도 아니면서 이런 일이 가능할 존재라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귀, 귀신인가?’

나는 귀신이 싫었다. 무서운 놀이 기구를 타는 것도, 징그러운 벌레를 때려잡는 것도 괜찮았지만, 귀신만은 피하고 싶었다.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귀신이 또다시 말을 걸었다. 상당히 차분하고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래 봤자 귀신일 뿐이었다.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이 공간에 귀신이 붙었을 만한 수상쩍은 물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방금 내가 뽑아 온 단검!’

“으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귀신이 붙은 검을 던져 버렸다.

[윽. 그렇게 갑자기 던지시면 아무리 저라도 어지럽습니다.]

“잘못했어요! 제가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드릴 테니까, 조용히 사라져 주시면 안 될까요?”

[조용히 사라져 달라고요? 그건 곤란합니다! 저를 부디 주인님의 검으로 삼아 주십시오.]

“저는 귀신 붙은 검에는 별로 관심 없거든요…….”

[귀신이라니요. 저는 귀신이 아닙니다.]

“검에 붙어서 말도 하는 게 귀신이 아니면 뭔데요?”

[저는 이 검, 그 자체입니다. 이름은 유피테르. 오랫동안 저를 뽑아 줄 주인님을 기다려 왔습니다.]

“……유피테르? 당신 이름이 유피테르예요?”

어딘가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예. 혹시 제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나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다행히 금방 기억 속에서 해리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 머저리 놈한테 불려 나왔을 때 갔었어. 거기 있는 바위에 유피테르라는 성검이 꽂혀 있댔거든. 그걸 뽑으러 갔었지.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바닥을 기어 조심스럽게 내가 던져 버린 성검 앞에 다가갔다.

“저, 혹시, 그쪽이 성검이세요?”

[예. 성검. 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더군요.]

“어, 그 성검은 절대 안 뽑힌다고 하던데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시도했는데도 절대 안 뽑혔다고…….”

[맞습니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는 저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 그냥 뽑았는데요. 그냥 잡아당기니까 쑥.”

달리 걸리는 느낌도 없었다. 너무나 쉽게, 단번에.

내가 그렇게 허무하게 뽑아 버린 게 성검이라니?

[그건 주인님께서 자격을 갖추셨기 때문이지요.]

“네? 제가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네.’

나는 검을 전혀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런 어중이떠중이에게 뽑히는 성검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성검을 뽑게 해 주는 기준이 도대체 뭐예요? 아무래도 성검님이 실수를 하신 것 같아요.”

[저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주인님.]

성검, 유피테르가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저를 거둬 주시겠습니까?]

“음. 거두는 거 자체는 어렵지 않은데요…….”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유피테르를 다시 집어 들었다. 검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그냥 짐이 하나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런데 내가 정말 성검이라는 대단한 녀석을 가져도 되는 건가?’

그렇게 고민하는 내게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야! 누가 유피테르를 뽑았어!”

누군가가 씩씩거리며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대한 흙먼지를 몰고 달려온 사람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 길게 길러 땋아 내린 수염까지.

“드워프?”

내가 그렇게 찾고 싶어 했던 드워프였다. 하지만 상황은 내가 그리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드워프는 시뻘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인간의 아이, 네가 유피테르를 뽑았나?”

드워프가 이를 바드득 갈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망치가 들려 있었다. 위협적인 상황에 침이 꿀떡 넘어갔다. 하지만 나는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 척 가슴을 폈다.

“네. 제가 뽑았어요.”

“그럼 네 손에 들린 그 녀석이……?”

“유피테르예요.”

드워프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떨어져 있던 그가 육중한 걸음으로 조금씩 내게 가까워졌다.

[해리! 어디에요? 해리!]

나는 서둘러 해리를 불렀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초조하게 해리를 부르는 사이 드워프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드워프를 코앞에서 보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너…….”

드워프가 음산하게 나를 부르며 거대한 망치를 바닥에 던졌다. 망치가 떨어진 곳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푹 꺼졌다.

‘저 무거운 망치를 깃털처럼 가볍게 들고 있었다니.’

저 드워프의 진짜 무기는 망치가 아니라 제 주먹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주먹으로 날 흠씬 두들겨 패겠다는 건가?’

겨우 너 같은 약골이 성검을 뽑다니! 너를 죽이고 성검은 내가 갖겠다! 드워프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슬 퍼렇게 나를 노려보는 그의 주먹이 웬만한 아이의 머리통만 했다.

‘저 주먹에 맞으면 최소한 사망이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힘껏 해리를 불렀다.

“해리!”

내 외침이 산을 울림과 동시에 드워프가 커다란 손을 뻗어 나를……

“어?”

드워프가 나를 얼싸안았다. 몇 번이나 눈을 굴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나를 안고 드워프가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드디어 유피테르를 뽑은 사람이 나타났어! 드디어!”

요란스러운 드워프에게 안겨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해리가 나타났다.

“그만하지 그래? 부스러기가 더 부스러기가 되게 생겼네.”

“해리!”

낯선 상황 속에서 확실한 아군을 만나자 반가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부르면 곧장 온다더니, 몇 번이나 불러도 오지 않다가 이제야 늑장을 부리며 나타났다.

“부르면 바로 나타난다면서요!”

분노에 차서 소리를 빽 지르자 나를 안고 있던 드워프가 놀라서 나를 놓아주었다.

“아이고, 생각보다 화가 많은 아이군.”

귀가 먹먹해졌는지, 드워프가 제 귀를 매만지며 해리에게 물었다.

“네가 말한 동행이 이 녀석인 게지?”

드워프의 질문에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나는 해리에게 상황을 물었다.

“위쪽에서 드워프 마을을 발견했어. 마주치자마자 다짜고짜 날 공격하기에 싸우다가…….”

해리가 말끝을 흐리며 드워프를 보았다. 그러자 드워프가 자연스럽게 해리의 말을 이었다.

“싸우는 도중에 갑자기 유피테르의 검집에서 반응이 오더군. 그건 검이 뽑혔을 때만 깨어나거든. 그래서 성검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걸 알고 당장 달려왔지!”

드워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많은 드워프들이 현장에 들이닥쳤다. 그들의 빛나는 눈이 모두 나를 향하고 있었다.

‘완전 부담스러워.’

그때, 해리가 질색하는 내 앞을 가로막았다. 시야가 해리의 넓은 등으로 가득 찼다.

[혹시 저 악마와 계약을 하셨습니까? 어째서 성검의 주인께서 악마와……!]

[야, 성검. 서열 정리는 똑바로 해야지. 내가 앞이고, 네가 뒤야. 악마의 주인이 성검을 뽑은 거지, 성검의 주인이 악마와 계약한 게 아니거든!]

해리가 차갑게 쏘아붙이고 드워프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우르르 몰려들어서 뭘 할 셈이야? 성검을 뺏기라도 하려고?”

나는 긴장해서 드워프들을 보았다. 그들이 그럴 셈이라면, 그냥 성검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한텐 별로 필요도 없는데.’

하지만 드워프들은 성검을 원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가? 성검은 오로지 성검의 주인만 쓸 수 있네. 우리에게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고.”

“그럼 왜 이렇게 우르르 몰려온 건데?”

“그건……”

잠시 숨을 고른 드워프들이 동시에 외쳤다.

“제발 우리가 그 검을 고칠 수 있게 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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