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156)

* * *

루크의 말처럼 며칠 지나지 않아 정보 길드 사람이 은밀히 나를 찾아왔다.

“어인마니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아가씨.”

주방 하녀로 위장한 길드원이 내게 조심스럽게 서신을 건넸다.

‘이 저택의 보안, 정말 괜찮은 거야?’

서신을 전하기 위해 잠입한 건지, 정보 수집을 위해 이곳에 취직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보안의 허술함을 말해주긴 마찬가지였다.

‘하긴. 라이오넬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이 저택의 보안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납득하는 나를 향해 길드원이 말을 덧붙였다.

“치르신 값이 아깝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래?”

나는 무려 백지 수표를 냈다. 그 값이 아깝지 않으려면, 드워프 마을의 정확한 주소 정도는 적혀 있어야 했다.

나는 봉투에 든 서신을 확인했다. 단 한 장의 짧은 내용이었다.

돈은 아깝지 않았다.

* * *

드워프들이 촌락을 이뤄 살고 있다고 알려진 곳은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이 워낙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터라, 정보가 아닌 전설에 가까웠다. 그나마 가장 최근의 행적이 확인된 드워프 마을은 대륙 서북쪽 안개산이었다. 에렐이 대륙의 동북쪽 끄트머리에 있으니 횡으로는 제일 먼 곳에 위치한 동네라고 할 수 있었다.

소파에 앉아 주소를 곱씹는 내 뒤로 해리가 다가왔다.

“안개산이라. 재미있는 곳이지.”

그가 뒤에서 허리를 숙여 종이에 적힌 주소를 확인하며 말했다. 어째 안개산을 잘 아는 눈치였다.

“안개산에 가 본 적 있어요?”

내 예상대로 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머저리 놈한테 불려 나왔을 때 갔었어. 거기 있는 바위에 유피테르라는 성검이 꽂혀 있댔거든. 그걸 뽑으러 갔었지.”

“제레인트의 시조가 성검의 주인이라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요?”

“응. 거기 검이 있긴 했는데, 머저리 놈이 못 뽑았어. 그게 성검은 성검인가 봐. 머저리 놈한테 순순히 뽑히지 않은 걸 보면.”

해리가 제레인트의 시조를 마음껏 매도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아직까지도 안 뽑혔을걸. 내가 있던 시절에는 거기가 관광지로 유명했어. 다들 등산하러 갔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 한번 뽑아 보는 거지.”

“해리도 시도해 봤어요?”

“미쳤어? 성검이라잖아. 난 악마인데, 그걸 만졌다가 무슨 화를 당하려고?”

“흐음. 성검이랑 싸우면 해리가 져요?”

내 질문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던 해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하찮은 성검 정도는 내 불꽃으로 녹여 버릴 수 있어.”

“그래요? 그 머저리란 분이 성검은 못 뽑았는데, 해리는 불러냈잖아요. 그래서 성검이 좀 더 센 건가 했죠.”

“계약자, 어떻게 그런 고철덩어리와 날 비교할 수가 있어?”

해리가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렇게 잘생겼고, 키도 크고, 개로도 변할 수 있고, 냄새도 잘 맡고, 또……”

이대로 뒀다가는 자신이 성검보다 훌륭한 이유 100가지를 전부 말할 기세였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자연스럽고 재빠른 화제 전환이었다.

“그런데 안개산은 어떤 곳이에요? 드워프 마을이 거기 있다니까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거길 직접 가려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딱히 믿고 보낼 만한 사람도 없고.”

에렐에서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제5기사단 기사들뿐이었다. 인간을 배척한다는 드워프를 설득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길 만한 위인은 없었다.

“안개산은 꽤 높아. 거길 오를 수 있겠어?”

해리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햇빛 한 번 받지 않은 하얀 피부에 가는 팔과 다리. 내 체력은 산은커녕 작은 언덕도 제대로 오르지 못할 정도였다.

“직접 산을 오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직접 산을 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마을을 찾으려고?”

“우리한텐 아주 훌륭한 이동 수단이 있잖아요.”

나는 벽난로 위에 장식품처럼 놓인 와이번 대장의 영롱한 비늘을 가리켰다.

“정상까지는 와이번을 타고 가면 되죠. 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드워프 마을을 수색하면 한결 수월하지 않을까요?”

* * *

‘남작에게 말하면 기사를 데려가거나 용병을 고용하라고 하겠지. 혼자서는 힘들다고.’

하지만 내게는 해리가 있었다. 오히려 기사나 용병들이 짐짝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내 계획을 남작에게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대신 엠마를 내 편으로 만들었다. 엠마는 나의 시중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녀만 잘해 준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저택을 비울 수 있었다.

‘그것도 길어 봐야 일주일 정도겠지만.’

와이번을 타고 다녀올 거라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조심하셔야 해요, 아가씨.”

엠마는 홀로 가겠다는 나를 막지 않았다. 내게 비범한 힘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구빈원에서 불꽃을 보여 주길 잘했어.’

그 힘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오늘처럼 엠마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 가방에 필요하실 것 같은 건 다 넣었어요.”

엠마는 커다란 가방을 건네며 안에 든 물품의 목록을 읊었다.

“혹시 몰라서 갈아입으실 옷을 넣었어요. 여분 신발이랑 육포도 있고요. 또…….”

어떻게 그게 전부 여기 들어가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엄청 무거운 거 아니야?’

하지만 받아 든 가방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어라?’

“경량 마법이 걸린 가방이에요. 기사님들이 임무를 나가실 때 쓰는 거죠.”

귀족 영애로 지내는 동안 이런 가방을 쓸 일이 없어서, 이렇게 편리한 물건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신기하게 가방을 바라보고 있으니 해리가 나를 재촉했다.

“빨리 가자. 이러다 동트겠어.”

“알겠어요.”

반사적으로 대답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리가 개의 모습을 한 채로 인간의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뭐 하는 거예요!]

놀라서 해리를 타박했지만 그는 태평했다.

“뭐 어때? 어차피 얘는 다 알잖아.”

‘하긴.’

엠마에게는 구빈원을 도우러 간 날 이미 해리가 말하는 동물이라는 걸 들켰다. 그날 본 걸 잊으라고 신신당부한 것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그 이후 해리에 대해 말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모습일 때는 웬만하면 사람 말 하지 말아요. 습관이 잘못 들어서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나는 해리에게 엄격하게 조언한 뒤, 동의를 구하기 위해 엠마를 바라보았다.

“그렇지, 엠마?”

하지만 엠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얼굴로 멍하니 해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불길했다.

“엠마?”

내가 조심스럽게 엠마를 부르자,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엠마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개, 개, 개, 개가 말을 해요!”

엠마가 손을 덜덜 떨며 해리를 가리켰다. 해리가 말하는 개라는 걸 처음 안 사람의 반응이었다.

‘설마…….’

나는 낭패감에 젖어 엠마에게 물었다.

“그날 다 들은 거 아니었어?”

“그날이요? 뭘요?”

엠마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해리를 번갈아 보았다.

“내 방 응접실에 불 훔치러 왔던 날 말이야. 그때 해리가 말하는 거 들은 거 아니었어?”

“저, 그때 도둑질하려고 했다는 게 들켜서, 그게 너무 놀라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세상에. 그럼 내가 그날 했던 고생은 뭐란 말인가?

“내가 그날 보고 들은 걸 전부 잊으라고 했을 때 알겠다고 했잖아. 이걸 다 들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그땐 뭐가 뭔진 모르지만 잊으라고 하시니까 그냥 그러겠다고 한 거였어요. 못 들었다거나 싫다고 하면 제 손가락을 자르실까 봐…….”

쭈뼛거리며 이야기하던 엠마가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해요, 아가씨.”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주 허탈해졌다. 하지만 지난 일에 대한 허탈함보다는 당장 이 위기를 벗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해리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야?’

말하는 동물을 데리고 다니다니. 누가 봐도 마녀 아닌가?

“저, 아가씨.”

그때, 엠마가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는 나를 불렀다.

“혹시 저분은 요정님이신가요?”

“……응? 요정?”

“네! 아가씨를 도와주시는 요정님이요! 어렸을 때 동화에서 많이 봤어요.”

“요정이라…….”

해리가 악마라는 걸 알게 되는 것보다는 요정님이라고 오해하는 게 훨씬 나았다.

“어, 음, 그럴지도?”

내가 대충 얼버무리자 엠마가 그럴 줄 알았다며 활짝 웃었다.

“역시 그렇죠? 아가씨께서 갑자기 데려오셨을 때부터 평범한 개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름다운 하얀 털, 용맹한 눈빛! 요정님이 틀림없어요!”

불량하게 늘어져 있던 해리가 엠마의 찬양에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렇게 자세를 고치는 것만으로도 엠마가 말하는 용맹한 개처럼 보였다.

“저희 아가씨를 꼭 지켜 주세요, 용맹한 요정님.”

“걱정 말라고, 인간. 나는 용맹하니까 주인을 다치게 두지 않아.”

“전 요정님만 믿어요!”

두 사람은, 아니, 한 마리의 개와 한 명의 사람이 서로를 향한 덕담을 주고받으며 눈을 빛냈다.

‘죽이 척척 맞네.’

좋은 일이겠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한 마리의 개와 한 명의 인간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며 가방을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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