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156)

4장. 성검의 주인

어떻게 저택에 돌아왔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노파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계속 멍하니 서 있었고, 이상함을 감지한 해리가 나를 저택으로 데려왔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홀로 돌아온 나를 보며 엠마는 많이 놀란 눈치였지만, 자세한 사정을 묻지는 않았다. 놀란 얼굴로 돌아온 엘도 무사히 돌아온 걸 확인했으니 되었다며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가 서둘러 자리를 피해 줄 만큼 내 얼굴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반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을 잊으려고 나간 축제에서 더 큰 걱정거리를 얻었다.

‘도대체 이게 왜 여기 있냔 말이야.’

이 반지는 페루의 작은 시장에서 샀다. 내 마지막 출장지였다.

-태양신의 심장으로 만든 고대의 반지입니다.

반지를 팔던 맹인 소녀가 그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코웃음을 쳤었다. 신의 심장으로 만든 고대의 유물이라니, 물건값을 비싸게 받기 위한 거짓말일 게 뻔하지 않나. 정말 이 반지가 그 정도의 유물이었다면, 시장 길바닥이 아니라 박물관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정말 신비한 힘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면 이 반지가 여기까지 날 따라올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냥 비슷하게 생긴 반지일지도 모르지.’

사실 이쪽의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직감은 계속 두 반지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에 반지를 껴 보았다. 맞춘 것처럼 사이즈가 딱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딱 맞는 게 신기해서 샀지.’

먼 나라의 시장에서 내 손에 꼭 맞는 반지를 만난 게 꼭 운명처럼 느껴졌었다.

[그 반지, 기분 나빠.]

해리가 반지를 낀 내 손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해리는 악마니까, 이 반지에서 어떤 기운이라도 느끼는 걸까?

[혹시 여기에서 어떤 힘 같은 게 느껴지지 않아요?]

[무슨 그런 사이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럼 왜 이 반지가 기분 나쁜데요?]

[나도 이유는 모르겠어. 별다른 힘이 느껴지진 않는데,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네.]

해리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닥에 늘어졌다.

‘진짜 비슷하게 생긴 반지일 뿐인가?’

손을 들어 반지를 바라보는 내 곁에 엠마가 슬쩍 다가왔다.

“아가씨, 왕립 기사단이 떠난다고 합니다.”

“아. 오늘 떠난다고 했지.”

“배웅하러 가지 않으시나요?”

“배웅? 뭐 그렇게까지.”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왕립 기사단이 떠나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버선발로 뛰어나가 인사를 할 것까진 없었다.

‘손님 배웅은 남작이 알아서 잘 하겠지.’

에렐 저택의 공식적인 주인은 인세티아 남작이니, 내가 나가지 않아도 딱히 무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엠마는 나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오늘 기사님이 떠나시면, 한동안 못 보실 거예요.”

“기사님? 로이츠 경 말이야?”

엘을 한동안 못 보는 게 도대체 무슨 문제라고? 한동안 그를 보지 못한다면 내 입장에선 감사한 일이었다. 아예 평생 보지 못하면 더 좋고.

“하지만 어제 함께 축제도 다녀오셨고…….”

“그건 엠마가 반쯤은 강요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난 엠마랑 나갈 생각이었다고.”

“그럼, 정말 기사님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신 거예요?”

“어제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

내 말에 엠마는 잔뜩 실망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게 그렇게 실망스러워?”

“당연하죠. 기사님과의 로맨스는 모든 레이디들의 꿈인걸요. 게다가 로이츠 경이라면, 최고의 상대잖아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렇겠지만…….”

엘은 그다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난 원래 강인한 기사보다 똑똑한 책사 캐릭터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도, 캐서린의 물고기 중 천재 학자 메이슨을 가장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이브리아와 메이슨은 유독 접점이 없네.’

살인 미수 사건 이후 캐서린의 여러 물고기들을 만났지만, 내가 에렐에 온 이후 메이슨과는 부딪힐 일이 전혀 없었다.

‘역시 내가 제일 좋아한 캐릭터답게 날 귀찮게 하지 않는구나.’

보는 눈이 있었어, 과거의 나. 나는 뿌듯하게 웃으며 엠마가 가져온 차를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기분 좋게 향긋한 차를 마시려는 순간, 해리가 요란하게 짖기 시작했다.

“왕! 왕!”

해리는 사납게 이빨을 보이며 엠마를 위협하고 있었다. 놀란 엠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해리의 폭주가 시작된 걸까?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해리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해리는 쉽게 진정할 줄을 몰랐다.

[왜 그래요, 해리?]

[이거 네 하녀가 아니야.]

[네?]

[이 녀석, 네 하녀랑 냄새가 다르다고.]

해리가 으르렁거리며 엠마를 경계했다. 나는 주저앉은 엠마를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엠마였다.

[착각한 거 아니에요? 그냥 엠마 같은데. 평소랑 다른 향수를 썼을지도 모르잖아요.]

[그 냄새가 아니라, 피 냄새가 달라. 그건 인간이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해리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나는 해리를 따라 코를 킁킁거렸다. 하지만 평범한 내 후각은 해리가 말하는 피 냄새의 차이를 잡아내지 못했다.

‘도플갱어 같은 건 아닐 테고.’

닮았다고 하기엔 너무 똑같이 생겼다. 쌍둥이 자매라면 이해는 된다. 하지만 엠마는 구빈원 출신의 외동이었다.

‘그럼 누군가 엠마의 모습으로 위장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겠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녀석이 한 명 있었다. 정보 길드의 수장 루크.

이렇게 완벽한 위장술에, 그 사람 자체라고 생각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사람은 소설 속에서 그 녀석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아가는 사정이 훤히 보였다. 리던이 루크에게 도와 달라고 편지를 보냈을 거고, 그걸 받은 루크는 재미있는 일이 생겼구나 싶어서 직접 왔을 것이다.

‘나한테 바로 정체를 들킬 거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만.’

아마 진짜 엠마는 약을 먹고 잠들어 있을 거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이 정보 길드의 철칙이었으니, 엠마는 그가 위장을 그만두고 제자리로 돌아가면 안전하게 돌아올 것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루크를 몰아붙여 쫓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아쉬운 구석이 있었다.

‘이브리아를 싫어하는 이 녀석이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나긋나긋하게 굽실거리는 걸 지켜보는 건 꽤 재미있잖아.’

게다가 루크는 성격도 상당한 다혈질이었다. 제가 싫어하는 이브리아의 시중을 들면서 속으로는 분명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쫓아내기 전에 조금만 놀려 볼까? 그렇지 않아도 심심했는데.’

사실 이 세계는 심각할 정도로 놀 거리가 없었다. 휴대폰에, 인터넷에, 집 밖으로 나가면 각종 놀거리가 쏟아지는 현대에서 살던 사람이 놀이라고는 체스나 카드뿐인 세계에 떨어졌으니 매일이 따분한 건 당연하지 않겠나.

심지어 그나마 있는 체스나 카드놀이도 같이 할 상대가 없었다. 이곳 에렐에 나와 마주 앉아 놀이를 할 수 있는 귀족은 인세티아 남작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영지 관리에 바쁜 그는 내 놀이 상대를 해 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모두를 물리고 해리와 나란히 앉아 체스나 카드놀이를 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상대를 한 뒤로, 나는 이것이 내게 절대 재미있는 놀이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는 맹하기만 했던 해리는 체스와 카드놀이에서 믿을 수 없는 실력을 선보여 압도적으로 나를 이겨 버렸다. 이기는 일에는 광적으로 집착하는 이 악마는 어쩌다 한 번 져 주는 법도 없었다. 나는 결국 판을 엎어 버리고 다시는 그와 체스나 카드놀이를 하지 않았다.

에렐에 온 뒤로 쭉 이런 상태다 보니 나는 정말이지 무료했다.

‘기대했던 축제도 반지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얼마 전까지는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걸로 만족한다고 했으면서, 이제는 재미를 찾고 있다니.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존재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그런 게 인간이잖아.’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다들 그렇게 산다. 나는 나의 간사함을 근사하게 합리화하며 엠마 행세를 하고 있는 루크를 바라보았다. 속은 정보 길드의 수장이지만, 지금은 자진해서 내 시녀가 되어 버린 이 녀석.

음. 아무리 생각해도 놀려 먹기 딱 좋군.

[해리,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진정해요.]

[네가 뭘 어떻게 처리하는데?]

[지켜보면 알아요.]

나는 해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해리는 못 미더운 눈을 하면서도 엠마를 향해 위협적으로 짖는 것을 멈추었다.

“괜찮아 엠마. 해리도 진정한 것 같네.”

“네, 아가씨.”

루크가 여전히 해리를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씨익 웃으며 의자에 앉아 루크를 향해 발을 쭉 뻗었다. 제 앞에 내민 발을 보며 루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지만, 나는 아주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주물러 줘.”

“……네?”

“발 주물러 달라고. 오래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부은 것 같아. 늘 해 줬던 거잖아.”

“발을…… 늘…….”

[엠마는 그런 거 안 해 줬잖아?]

해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녀석은 엠마가 아니었다. 내가 뻔뻔하게 ‘늘 해 줬던 거잖아?’라고 말한다면,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뜻이었다.

어떠냐, 루크? 곤란하지? 곤란해 죽겠지?

내 예상대로 루크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노련한 시녀인 엠마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당황해서 엠마가 아니라 자기 본래 얼굴이 나와 버렸군.’

나는 버퍼링에 걸린 듯 굳어 버린 루크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정보 길드의 수장으로 만인의 약점을 틀어잡고 뒷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는 그가 누군가의 발을 만져 본 적이나 있을까?

‘어떻게 할 거냐, 캐서린의 물고기?’

나는 정말 악당이 된 기분으로 낄낄거렸다.

‘그냥 포기할 거야? 그럴 거야?’

“엠마, 어서.”

발을 까딱이며 루크를 재촉하자 그의 표정이 더욱 곤란하게 변했다. 이 세계에서 발을 만지는 건 상대에 대한 엄청난 충성의 의미였다. 발을 주물러 주기 위해서는 상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깊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엄청난 복종의 표현이지.’

나는 루크가 여기에서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콧대 높은 루크가 이런 일을 감수하려고 할 리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 녀석을 놀리면서 쫓아내는 것도 성공하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얻게 된다.

그런데 루크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루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제 앞에 내민 내 발을 붙잡았다.

“어?”

그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이제는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다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으음, 이걸 해 주려고?”

“하라고 명령하셨잖습니까. 늘 제가 하던 일이잖아요?”

루크가 그렇게 말하며 내 신발을 벗겨냈다. 발을 감싸고 있던 신발이 벗겨지자 어딘가 휑한 느낌에 발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실크로 된 스타킹을 신고 있기는 했지만, 신발까지 신고 있을 때의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지? 하겠다고 할 줄 몰랐는데.’

내가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사이 루크의 손이 내 발을 꾹 눌렀다. 엄지손가락으로 발의 오목한 면을 누르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악!”

동시에 눈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얼마나 아픈지 순간 눈물이 쏙 나올 뻔했다.

‘어쩐지. 그냥 하겠다고 하는 게 이상했어!’

내가 알아차린 걸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내가 루크를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나는 분노에 차서 루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씩씩대며 그를 쳐다보는 순간, 화를 내려던 입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프세요?”

루크가 엄청나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발을 주물러 달라고 말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진짜 당황한 건가? 아니면 연기?’

속내를 몰라 멍하니 앉아 있으니 루크가 횡설수설하며 다시 내 발을 눌렀다.

“죄송합니다. 너무 힘이 들어갔나 봐요.”

엄청나게 아팠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닿았는지도 모를 만큼 가벼운 손길이었다. 유리로 된 공예품을 다루는 것 같은 조심스러운 손길에 발이 간질거렸다.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나 간지럼 태우려고?”

진지하게 물었더니 루크의 얼굴이 더욱 곤란해졌다.

“이건 또 너무 약한가……?”

루크가 제 손과 내 발을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조금 더 강한 힘으로 발을 눌렀다. 두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덕분인지 딱 좋은 강도였다.

“이 정도면 괜찮으시겠어요?”

“응. 세기는 딱 좋은데…….”

‘너 정말 계속하려고?’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지만, 내 발에 잔뜩 집중하고 있는 루크는 나의 눈빛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쯤 되면 궁금한데.’

도대체 뭘 알아내려고 내 발까지 주물러 주는 걸까?

루크는 이브리아를 싫어한다. 그러니 그가 얻어 내려는 정보는 당연히 이브리아를 곤란하게 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미 네 정체를 알아챘다고, 엠마는 내 발을 주물러 준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당장 꺼지라고 소리쳐 쫓아내야 하는데.

‘……얘 왜 이렇게 안마를 잘해?’

불편한 신발 때문에 비명을 질러 댔던 발이 편안하게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이 세계의 신발은 아주 불편했다. 바닥이 딱딱하고 발을 감싸고 있는 가죽도 뻣뻣해서 걸을 때마다 발이 아팠다. 오랜 시간 걷고 있으면 차라리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정도였다.

사실 <레이디 캐서린>의 세계는 완벽한 중세가 아니었다. 적당히 중세의 이미지만 따온 가상의 세계라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는 산업 혁명기의 빅토리아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었고, 마법이나 이종족의 존재는 당연히 판타지적인 세계관이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세계다 보니 많은 부분에서 적당한 타협이 있었다. 대륙 전역에서 읽을 수 있는 신문이라든가, 마정석을 이용해 연결되는 전화나 우편이라든가, 생각보다 간소한 의상이라든가. 실제 중세라면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부분들이 이 세계에는 있었다.

‘그렇게 적당히 타협할 거라면 신발도 편하게 만들어 줬으면 얼마나 좋아?’

운동화가 존재하는 파격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플랫 슈즈 정도만 있었어도 걷는 게 괴롭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을 거다.

하지만 이 세계의 귀족들은 모두 예쁜 구두를 신었다. 높고 가는 굽에 발만 겨우 감싸고 있는, 그저 예쁘기만 한 구두였다. 애초에 편의성을 생각한 신발이 아니었다. 외적인 아름다움에 집중하다 보니 이걸 신은 사람의 발 사정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이걸 신은 사람의 발을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귀족들은 많이 걷지 않았다. 노동을 하지 않고 손짓으로만 사람을 부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신발은 신분을 과시하는 용도였다. 실용적이지 않은 신발을 신었다는 건 그 사람이 힘들여 노동할 필요가 없는 고위층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누가 더 쓸모없는 신발을 신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분의 고귀함이 가려지는 우스운 상황이 발생했다.

이브리아 오베론은 그런 세계에서 신분의 최상위 계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내가 신은 신발에 실용성이 티끌만큼도 없다는 뜻이었다. 내 신발은 길을 걷는 용도로는 0점, 아니, 마이너스 100점이었다.

그렇다고 평민들의 신발이 편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평민들의 신발을 구해 신었을 거라고.’

귀족들은 사람을 불러 발 치수를 재고 수제화를 만들지만, 평민들은 이미 만들어진 신발에 대충 발을 구겨 넣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 신발에는 좌우 구분도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신발을 신는 게 익숙해진 이곳 사람들은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전혀 이해 못 했다. 엠마에게 신발이 불편하다고 투덜거렸더니, 아주 의아한 얼굴로 ‘원래 신발은 불편한 게 아닌가요?’ 하고 대답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에 신음하던 발이 날아갈 것처럼 시원해졌다. 나는 감격에 찬 눈으로 루크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이 사람이 진짜 엠마였다면, 에렐 저택의 시녀가 아니라 나의 개인 마사지사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속에 들어 있는 건 엠마가 아닌 루크였다.

‘정보 길드의 수장을 개인 마사지사로 고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

안타까움에 루크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니 그가 엠마처럼 생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요즘 에렐 생활이 무료하진 않으신가요?”

“에렐 생활이?”

“예. 아가씨께선 화려한 왕도에서 오셨으니까요. 사교 활동도 활발하게 하셨고…… 그에 비해 에렐은 많이 조용하지요.”

“어쩔 수 없지. 에렐은 시골이니까.”

티타임, 연회, 무도회, 살롱 등등. 이브리아는 끊임없이 사교 활동을 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길 즐겼다. 하지만 귀족 문화의 변방인 에렐에는 가벼운 티타임도 흔치 않았다.

‘진짜 이브리아라면 이 생활이 무료했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시골에서 지루하게 보내는 거나, 재미없는 사교 활동에 참석하는 것 모두 따분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젠 좀 조용히 살고 싶어져서. 시끄러운 왕도보단 조용한 에렐이 더 좋아.”

그림 하나를 걸어 놓고 소품의 상징이나 작가의 의도를 토론하고, 불편한 구두를 신은 채 춤을 추는 게 재미있을 리가 없지 않나? 그런 자리에 나가느니 조용한 에렐의 저택에서 낮잠이나 자는 게 더 나았다.

게다가 귀족 문화에는 지켜야 할 법칙이 많았다. 예법서에 명시된 규칙뿐만 아니라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예의도 많아서,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으면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브리아의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으면 나도 개망신을 당했겠지.’

습관이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인지, 속에 든 것이 귀족 문화를 전혀 모르는 나인데도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덕분에 연회나 무도회에서 크게 망신을 당하지 않고 유연하게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사실은 뭐, 이브리아 정도 되는 고위 귀족이 실수를 한다고 그걸 지적할 사람도 없을 테지만.’

예법을 모르니 천박하다는 지적도 어중간한 귀족들한테나 통하는 거다. 왕국이 시작되던 시절부터 귀족이었던 명문가 오베론의 아가씨를 누가 우습게 볼 수 있을까? 뒤에서야 수군대겠지만 앞에서는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 줄 것이다.

“그러신가요.”

엠마의 얼굴을 한 루크가 성의 없이 대답하며 웃었다. 내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진짜 이브리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일 반응이었기 때문에 딱히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도 에렐에 잘 적응하고 계신 것 같아요. 특히 와이번을 길들이신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와이번으로 흘렀다. 나는 그제야 루크가 이런 고생을 감수하고 있는 이유를 알아챘다.

‘내가 어떻게 와이번을 길들였는지 알아내고 싶은 거구나.’

내가 엠마와 가깝게 지낸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그녀로 변장한 게 틀림없었다.

‘어디 한번 놀려 볼까?’

나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뭐,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정말요?”

내 낚시에 낚인 루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다들 와이번을 길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하시던걸요.”

“그건 다 헛소리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지. 내가 어떻게 와이번을 길들였는지 궁금하니?”

“제가 어떻게 아가씨께 그런 걸 묻겠어요?”

루크가 고개를 조아리며 은근슬쩍 내 발에서 손을 뗐다.

‘이것 봐라. 은근슬쩍 그만두기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넌 내 하녀잖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날 돌봐 주는 사람이니, 내 지식을 나누는 것도 좋겠지.”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어서 빨리 방법을 말하라고 외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감사할 것까지야.”

나는 활짝 웃으며 루크를 향해 다시 발을 내밀었다.

“우선 발을 좀 더 주물러 줄래? 너무 시원해서 이대로 끝내기가 좀 아쉽네.”

“……예, 아가씨.”

엠마라고 생각하고 보면 평소와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속에 든 게 루크라고 생각하고 보면 이를 바드득 가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러게 누가 내 하녀로 변장하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흘리며 발을 까딱였다. 루크의 손이 다시 내 발을 능숙하게 매만졌다. 역시 시원함이 최고였다.

‘음. 그래도 놀리는 건 이 정도로만 할까? 상대가 루크라 후환이 두려우니까.’

놀리는 것도 적당한 치고 빠지기가 중요한 법이었다. 나는 폭발 직전일 게 분명한 루크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건 간단해. 그 녀석들은 소리에 민감해서, 노래를 불러주면 금방 길들일 수 있지.”

“노래를요?”

루크가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처음 듣는 소리일 것이다.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니까. 나는 진지하게 정보를 머릿속으로 새기고 있는 루크를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응. 그런데 아무 노래나 불러선 소용이 없어. 꼭 이 노래를 불러야 반응이 있어.”

“그게 어떤 노래인가요?”

“제목은 <바보>야.”

“예……?”

그런 노래가 있었던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다른 노래도 가능해. 제목은 <멍청이>지.”

루크의 얼굴이 조금 더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아, 이 노래도 되겠다. <이 말을 믿니, 루크 이 바보야>. 비슷한 노래로는 <아직도 모르겠니, 네가 속았다는 걸>이라는 노래도 있지.”

긴가민가하던 루크의 표정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그가 내 발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엠마와 완전히 똑같았던 변장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엠마였지만, 키는 원래의 루크로 돌아와 있었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다른 건 이해가 되는데, 이 키는 어떻게 조절하는 거지?’

소설에서도 이 방법에 대해서는 묘사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작가도 방법을 생각하기 귀찮으니 대충 얼버무린 거겠지.’

루크가 찡그린 얼굴로 내 발을 만졌던 제 손을 쳐다보았다. 더러운 이브리아 오베론을 만진 손! 당장 씻고 싶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네가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건 처음인데.”

원작에서 루크는 몇 번이나 변장을 한 채 이브리아의 주변에서 정보를 얻었다. 문제의 캐서린 살해 미수 사건도 루크가 변장을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물론 쩜오의 악역답게 눈치 없는 이브리아는 그 사실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때의 이브리아가 아니라는 말씀.’

“나도 계속 뒤통수 맞기만 하는 건 싫어서. 사람은 발전을 하는 법이잖아?”

내가 씩 웃자 루크의 얼굴이 그대로 구겨졌다. 그는 질색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루크의 방문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해야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우두머리가 알아서 나타나줬잖아!’

정보 길드는 왕국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었지만, 에렐 같은 깡촌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만약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까지 나가야 했다.

‘가깝다고 해 봐야 마차로 꼬박 며칠은 걸릴 테지만.’

북쪽 구석에 처박혀 고립된 에렐의 위치를 생각하면 밖으로 나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 정보 길드 수장의 등장이 반가울 수밖에.’

내가 캐서린의 물고기를 보고 반가워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마침 잘 왔어.”

“……뭐?”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는 듯한 태도에 루크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우선 앉아서 이야기할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잠시 방황하던 루크가 곧 자리에 앉았다. 나도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웬만하면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왔으면 좋겠는데. 계속 그 모습이면 엠마랑 대화하는 기분일 것 같아서.”

어차피 변장은 들통났다. 루크도 더 이상 답답한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별다른 말 없이 가면을 벗었다.

그렇게 드러난 루크의 얼굴은 뒷골목 생활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평범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거리를 지나면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법한 외모였다. 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가 한몫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 앉아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깊고 어두운 샘을 마주한 기분이라고 할까?’

심장 끝이 미지를 발견한 순간처럼 묘한 두려움으로 간질거렸다. 내가 루크를 관찰하는 동안 그도 정신을 차렸다.

“날 어떻게 알아챘지?”

그는 조금 전보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내게 질문했다. 나는 결정적인 힌트를 준 해리를 힐끗거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딘가 구린 냄새가 나서.”

“냄새?”

“몰랐어? 너한테서 되게 구린 냄새 나.”

“그럴 리가.”

루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팔을 들어 체취를 확인했다. 심각한 얼굴로 킁킁대는 그를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소리에 루크가 행동이 멈췄다.

“뭐야. 거짓말이었어?”

“거짓말 아냐. 진짜 구린 냄새가 난다니까!”

‘내가 아니라 해리가 맡은 거지만.’

어쨌든 절대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의 웃음으로 나는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

“……이브리아 오베론이 하는 말을 믿은 내 잘못이지.”

루크가 허탈하게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잠시라도 내 말에 혹한 것이 상당히 분한 눈치였다.

“내 완벽한 변장이 이브리아 오베론에게 들켰을 리가 없어. 너, 역시 그냥 찍은 거지? 어젯밤에도 못 알아봤잖아.”

“어젯밤에도 날 만났어?”

“이것 봐. 감도 못 잡잖아.”

해리와 함께 있었다면, 그때도 해리가 이 구린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럼 해리가 없을 때 만났단 소리인데.’

내게 친절한 조언을 해 준 엘은 당연히 제외.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리던 하나뿐이었다.

‘얘 진짜 간도 크네. 아무리 리던이랑 친해도 그렇지, 어떻게 왕자로 변장할 생각을 하냐?’

왕족을 사칭하면 사안에 따라 사형까지 당할 수 있었다.

“너, 왕족 사칭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 줄은 알아?”

“하. 엘하고 똑같은 말을 하네. 그 녀석이랑 정말 무슨 사이야? 어제 보니까 그 자식은 완전히 맛이 갔던데.”

루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무엇인가 탐색을 하고 있는 눈이었다. 거리낄 것이 없는 나는 당당하게 루크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 헛소리를 할 시간에 의뢰나 받는 게 어때? 그쪽이 서로에게 훨씬 더 생산적일 것 같거든.”

“의뢰?”

“정보 길드에 의뢰할 일이 있어.”

의뢰라는 말에 루크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널 내 고객으로 받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돈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어.”

“흐응, 그러셔?”

루크가 흥미롭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풍문 속 오베론 가문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 어디 한번 가늠해 볼까?”

루크가 손을 들어 손가락 3개를 폈다.

“30만 골드. 그 이하로는 안 받아.”

‘30만 골드면 어느 정도지?’

이 세계의 화폐 단위는 잘 알고 있지만, 30만 골드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기 와서 뭔가를 직접 계산해 본 적이 없는걸.’

평범한 귀족 영애는 자신이 직접 대금을 지불하는 일이 없었다. 물건을 골라 주문서를 달아 주면, 하인들이 값을 치르고 물건을 받아 왔다.

‘평범한 드레스 한 벌이 30실버 정도라고 했던 것 같은데.’

화폐는 코퍼, 실버, 골드의 단위로 커지니까, 30만 골드면 30실버짜리 드레스를…….

‘도대체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거야?’

제대로 계산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으…… 계산기가 필요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30만 골드는 엄청나게 큰 금액이구나.’

루크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오베론 가문이 부유하다지만, 일개 영애인 내가 융통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었다. 루크는 내가 자신이 요구하는 금액을 절대 내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내 의뢰는 안 받겠다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돌려서 하는군.’

하지만 내게는 그가 모르고 있는 무기가 하나 있었다.

“의뢰 내용을 듣지도 않고 가격 책정을 하는 거야?”

“난 사안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가격을 측정하는 편이라. 부유한 사람은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은 적게 내는 게 공평하잖아?”

“그래? 그렇다면 30만 골드는 너무 낮은 거 아냐?”

“뭐?”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겨우 30만 골드를 내래?”

나는 루크가 했던 것처럼 코웃음을 흘리며 그 앞에 봉투를 내밀었다.

리던에게 받았던 백지 수표였다.

“곧 왕도로 돌아갈 거지? 왕립 중앙은행에서 돈으로 교환할 수 있을 거야.”

내용물을 확인한 루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얼마를 적을 줄 알고?”

“얼마를 적든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낼 게 아니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말에 루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좋아. 이 정도의 각오라면 어떤 의뢰인지 들어 보지.”

거기에는 단서가 붙었다.

“단, 그게 지난번처럼 캐서린에게 해를 입히는 의뢰라면 보수가 얼마가 됐든 거절하겠어.”

“걱정 마. 그쪽과는 전혀 연관 없는 일이니까.”

경계하던 루크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대화를 본론으로 이끌었다.

“너, 드워프들이 어디 사는지 아니?”

“……드워프?”

루크의 눈에 남아 있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갑자기 드워프는 왜 찾아?”

루크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궁금하면 30만 골드.”

“뭐?”

“정보는 돈이잖아. 난 부유한 사람한테는 정보를 비싸게 주고 팔아.”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나를 보며 루크가 입을 떡 벌렸다. 그 얼빠진 모습에 나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조금 전에 네가 얼마나 치사했는지 이제 알겠어?”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냐. 그냥 내 기분이 어땠나 한번 체험해 보라는 뜻이었어.”

어차피 에렐의 사정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금방 루크도 알게 될 일이었다. 그런 문제를 숨기겠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간 에렐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루크는 진지했다. 캐서린의 물고기 루크가 아니라, 정보 길드의 수장 루크로 내 앞에 앉은 것이다.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내가 와이번을 길들였다는 부분이었다.

“와이번은 어떻게 길들였어?”

나는 이번에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궁금하면 10억 골드. 이건 농담 아냐.”

“뭐, 확실히 그만큼 가치 있는 정보니까.”

루크도 순순히 물러섰다. 애초에 내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닌 듯했다.

“드워프에 대해서라면 이미 정보가 있어.”

“그들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안단 말이야?”

“대단한 검을 만들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나 대장장이들이 종종 드워프를 찾곤 하지. 그때 조사해 둔 정보가 길드에 남아 있을 거야.”

거기까지 말을 마친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과는 서신으로 보내지. 곧 우리 쪽 메마니가 널 찾아갈 테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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