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156)

* * *

[해리, 어디 있어요?]

나는 야바위판에 몰린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해리를 불렀다. 저택을 나설 때 해리를 안에 두고 왔지만, 내가 부르면 해리는 언제 어디서든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기사님이랑 데이트한다고 신나서 나가더니, 갑자기 나는 왜 찾아?]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돌아온 대답은 상당히 퉁명스러웠다.

[두고 와서 삐쳤어요? 어쩔 수 없잖아요. 복잡한 축제에 개를 데리고 나올 수는 없으니까.]

[내가 겨우 너랑 축제 구경 못 했다고 삐칠 것 같아? 나처럼 대단한 악마한테 그런 축제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에이. 그러지 말고 마음 풀어요.]

[나 안 삐쳤다고.]

말을 그렇게 하지만 누가 들어도 삐친 목소리였다.

[악마면서 거짓말 진짜 못해……]

[아닌데? 나 거짓말 완전 잘하는데!]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나는 해리가 들으면 펄쩍 뛸 소리를 겨우 속으로 삼키며 그에게 말했다.

[나 지금 해리가 좀 필요한데. 와 줄 수 있어요?]

[내가 왜? 그 기사님이랑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리던과 엘이 무언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아요. 잠깐이면 되니까 여기 와 봐요.]

도박의 도 자도 모르는 내 힘으로는 전문 야바위꾼을 혼쭐낼 수가 없었다. 해리의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청개구리 성향이 있는 해리는 내 부탁을 듣고 한 번에 알겠다고 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개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해리는 개 맞잖아요. 내 애완견. 아니에요?]

[아, 니, 라, 고!]

해리의 외침이 머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어찌나 큰 소리인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진짜 못 말려.”

나는 먹먹한 귀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뭘 못 말려?”

그때, 얄미운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오랜만에 보는 인간형 해리였다. 이 모습을 들키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리던과 엘이 이쪽으로 오기 전에 상황을 정리하고 해리를 돌려보내야 했다.

“왜 이 모습이에요?”

“내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 주려고 그런다. 이래도 내가 개로 보여?”

해리가 이를 바드득 갈며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다가오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나를 보며 해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누가 자기 개를 보면서 그런 표정을 짓겠어?”

‘세상에.’

저 잘난 얼굴로 웃으니까 파괴력이 더 컸다. 갑자기 등장한 미남 덕분에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얼굴을 이렇게 쓰면 어떡해요?”

“이렇게라니?”

“방금 사람 홀리는 데 썼잖아요!”

“흐음…….”

내 타박에 해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님, 나한테 홀렸어?”

“정확하게 말하면 해리가 아니라, 해리 얼굴에 홀린 거예요.”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가 다른데?”

“아주 큰 차이가 있죠. 해리의 껍데기는 마음에 들지만, 알맹이는 별로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니까.”

“뭐? 내 알맹이가 어때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당신 알맹이가 어떤지.”

내 말에 해리가 망설임 없이 제 가슴에 손을 얹더니,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누가 보면 깊은 고찰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라, 이 악마야.’

“‘아무리 생각해도’라는 말을 쓰려면, 적어도 1분은 넘게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해할 수가 없네. 인간의 조건은 왜 이렇게 까다로워?”

“그쪽이 지나치게 관대한 거라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몸이 바짝 붙어 오자 해리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거 보이죠?”

나는 분주하게 손을 놀리고 있는 야바위꾼을 가리켰다. 해리의 시선이 내 손끝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보여. 저 야바위꾼은 왜?”

“저 의기양양한 모습이 좀 거슬리지 않아요?”

“……그거 알아? 너 방금 되게 악마처럼 말했어.”

“누구 옆에 있었더니 악마 성향이 옮았나 보죠.”

“훌륭한 변화네.”

“그래서 깽판을 좀 치려고 하거든요.”

“깽…….”

나의 과격한 단어 선택에 해리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렇게 놀랄 시간 없어요. 저 사람들이 돌아오기 전에 해결해야 한단 말이에요.”

나는 초조한 심정으로 리던과 엘을 힐끗거렸다. 어느새 대화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는지 아까보다 분위기가 많이 풀려 있었다.

“어떻게 깽판을 칠 생각인데?”

“야바위에서 깽판이라면 하나뿐이죠. 속임수를 간파해서 돈을 따는 거.”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그 방법은 시간이 좀 많이 걸리지 않아? 좀 더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이 있지.”

해리가 씩 웃더니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하고 가벼운 스냅이 끝나자마자 평화롭던 야바위판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으아악!”

갑작스러운 화재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과정이 어찌 됐든, 판이 깨진 건 확실했다.

“어때? 내 말대로 간단하고 확실하지?”

해리가 뿌듯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나 잘했지? 그렇지?’라는 말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것만 같았다. 야바위판에 불을 내 버린 건 아주 황당한 해결책이었지만, 칭찬을 바라며 천진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게 다 얼굴 때문이야.’

화가 잔뜩 나서 달려왔다가도, 해리의 웃는 얼굴을 보면 천년의 분노마저 사그라들 것 같았다.

‘본인도 이 얼굴의 힘을 잘 아는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만 생기면 이렇게 얼굴을 들이대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해리의 등을 토닥였다.

“아이고, 참 잘했어요. 훌륭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힘이 쭉 빠진 칭찬에도 해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나 잘했으니까 상 줄 거지?”

“상이요?”

“응. 기르는 개가 예쁜 짓을 하면 상을 주는 거잖아.”

“아까는 개 아니라면서요.”

“응. 그랬는데, 지금은 주인님 개 할래.”

“왜 자기가 유리할 때만 개가 되는 건데요?”

“그런 편리주의가 우리 일족의 장점이라서?”

“그런 건 장점이 아니거든요, 해리.”

해리가 내 말을 못 들은 척 넘겨 버리며 야바위판에 불을 피울 때처럼 씩 웃었다. 어째 이번에도 불길했다.

“자, 이쪽으로.”

해리가 미심쩍게 자신을 쳐다보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도대체 그쪽이 어딘데?’

그렇게 물을 새도 없이 내 몸이 해리에게 끌려갔다.

* * *

떠들썩한 광장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자 축제의 소란이 조금 멀어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흥겹게 이어지는 음악이 적당히 어우러져 기분 좋은 소음을 만들어 냈다. 역시 축제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춥다는 게 문제지만.’

엠마가 신경 써서 옷을 입혀 주었지만 채 가시지 않은 겨울바람은 여전히 싸늘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릴 정도였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을 웅크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해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째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

“넌 참 약한 것 같아. 이 정도 추위에 덜덜 떨고.”

“내가 약한 게 아니라, 해리가 지나치게 강한 거라고요.”

“아무리 둘러봐도 너처럼 덜덜 떠는 사람은 없는데?”

해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말처럼 에렐 주민들은 나보다 가벼운 옷차림으로도 태연한 얼굴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역시 네가 약한 게 맞았어.”

해리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도 내심 동의했다.

‘뭐, 이브리아가 그렇게 튼튼한 편은 아니지.’

툭하면 쓰러지는 연약한 몸은 아니었지만, 평생 단련이라는 걸 모르고 산 귀족 아가씨답게 체력은 평균 이하였다. 덜덜 떠는 나를 한참이나 관찰하던 해리가 제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이건 또 예상 못 한 매너인데.’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내가 꼭 나쁜 짓을 한 것처럼.”

“악마의 호의는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내 호의는 괜찮아.”

“왜요?”

“난 네 악마니까.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충성은 무슨.’

악마에게 그런 개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좋은 말로 사람을 꼬드기는 게 악마답다면 악마답네.’

나는 픽 웃어 버리고는 해리의 외투를 꼭 끌어안았다. 해리의 사탕발림은 별로 도움이 안 되지만, 해리의 외투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로이츠가의 부스러기랑은 뭐 했어?”

그렇게 묻는 해리의 목소리에 은근한 적대감이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한 인간은 좋다며 호감을 보이더니.’

악마의 변덕은 정말로 그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뭘 했겠어요? 그냥 어색하게 걸어 다니면서 축제 구경했지.”

“그게 전부야?”

해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살폈다. 마치 취조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혹시 저 지금 추궁당하는 분위기인 거예요?”

“응. 그런 분위기야.”

“갑자기 왜 그런 분위기가 됐는데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불만스럽게 해리에게 물었더니 그가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며 웃었다.

“악마가 독점욕이 강한 건 알아?”

그런 걸 내가 알 리가 있나? 하지만 악마와 독점욕이라니, 한 쌍처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는 했다.

“난 네 거잖아. 반대로 말하면 너도 내 거라는 소리고.”

“뭐죠, 그 논리적 비약은?”

“내 말이 틀렸어?”

“당연히 틀렸죠. 해리는 내 거지만, 나는 해리 것이 아니니까요.”

“어째서 난 네 건데, 넌 내 것이 아냐?”

“주인이 개를 가지는 법은 있어도, 개가 주인을 가지는 법은 없거든요.”

“그거 상당히 불공평한 법이네.”

“삶은 원래 불공평한…… 악!”

누군가가 내 옷깃을 잡아당겨 반사적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선량한 인상의 노파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이거 가져가.”

노파가 좌판에 널려 있던 반지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붉은색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죄송하지만 안 살래요.”

“사라는 게 아니야. 그냥 가져가라는 거지.”

“그냥 주신다고요? 왜요?”

“이건 아가씨 거니까.”

“뭔가 착각하신 것 같아요. 그건 제 반지가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자세히 봐, 아가씨. 아가씨 반지가 맞아.”

노파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시 한번 반지를 내밀었다. 그 박력에 밀려 나는 얼떨떨하게 반지를 받아 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반지였다. 붉은 보석 안에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기이한 문양이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어?’

그 문양을 보는 순간 기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 반지…….’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출장 가서 샀던 그 반지 아냐?’

그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비행기가 추락했고, 나는 죽어서 이곳에…….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어졌다.

‘그럼 이게 왜 여기 있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노파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노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녀가 펼쳐 두었던 좌판만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리, 이거 준 할머니 어디 갔어요?”

“할머니? 저쪽 골목으로 가던데.”

나는 재빨리 해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지만, 그곳에서도 노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골목을 바라보며 나는 반지를 꽉 쥐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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