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쩌다 보니 함께 나오긴 했는데 상당히 어색했다. 정말로 많이.
나는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한 거리를 걸으며 연신 엘의 눈치를 살폈다. 나와 함께 나온 게 마음에 안 드는지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 불편하면 그냥 돌아가셔도 돼요.”
그럼 나 혼자 맘 편히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너도 나랑 다니기 싫잖아. 그러니까 알겠다고 하고 가 버려!’
하지만 엘은 간절한 나의 소망을 외면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불편하지 않은 거군요.”
‘누가 봐도 불편한 얼굴인데요…….’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는 축제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에 길게 늘어선 노점만 보아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광장 중앙에서는 음악가들이 바이올린으로 춤곡을 연주했다. 그 주변으로 모인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짝을 이뤄 춤을 췄다.
그 안에는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오늘 축제의 주인공인 왕립 기사단원들이었다. 저택에서 스쳐 지나갈 때는 언제나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술을 몇 잔 걸쳤는지 벌건 얼굴을 하고선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날에는 도박도 빠질 수 없었다. 소리 높여 호객하는 야바위꾼 주위로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자, 오세요, 이리 와! 정답을 맞히면 10배! 누구든 도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게 외친 10배라는 숫자에 혹한 사람들이 야바위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야바위가 괜히 야바위겠나? 사람들은 줄줄이 패배해 울상을 지으며 돌아섰다.
“저쪽에 흥미가 있나?”
혀를 끌끌 차며 야바위 현장을 지켜보고 있으니,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서자 익숙한 얼굴이 나와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던이었다.
“이브리아 오베론과 엘 로이츠라. 굉장히 신기한 조합이군. 아주 어색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도 그다지 이 거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데요.”
“그대에게 축제가 열린다는 걸 알려 준 것도 나였던 것 같은데.”
“그걸 알려 주셨다고 해서 전, 아니, 그쪽이 이 거리에 어울리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리던을 전하라고 부르려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대충 호칭을 얼버무렸다. 리던은 그런 내게 새로운 호칭을 제안했다.
“이름을 부르는 게 낫겠어.”
“……제가, 그쪽 이름을요?”
“이 사람 많은 거리에서 정체를 들키고 싶진 않거든.”
“이름을 불러도 정체를 들키는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럴 때 쓰는 가명 정도는 있지.”
‘그랬던가?’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리던에게 가명이 있다는 내용은 읽은 적이 없었다.
‘대충 넘긴 부분에 나온 내용인가?’
그랬을 수도 있었다. 나도 <레이디 캐서린>의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읽은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가명을 알려 주세요.”
“이던.”
‘뭐지, 이 성의 없고 대충대충인 가명은?’
효용성이 있긴 한지 무척이나 의문스러운 가명이었다.
“이던?”
믿을 수 없어 리던을 바라보자, 그가 다시 한번 더 확실하게 제 가명을 발음했다.
“그래, 맞아. 이던.”
“……가명이라기엔 너무 비슷한 거 아닌가요?”
“한 끗이라도 다르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생각보다 ‘이던’이 허술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면이지.”
리던이 그렇게 대답하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음을 흘렸다. 축제 분위기에 휩쓸린 건지, 그는 평소보다 웃음이 잦았다.
그때 엘이 나섰다.
“ㄹ……”
“그만.”
하지만 리던은 엘이 제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이던이라고 했잖아, 지금은.”
“속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역시 바른 생활 사나이.”
리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게 내게 할 말은 아니지.”
엘과 리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둘 사이에 낀 나는 죽을 맛이었다. 그냥 축제나 신나게 즐기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물고기들 사이에 끼게 된 것일까?
‘갑자기 집에 가고 싶다.’
홀로 신세 한탄을 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리던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쪽에 관심이 있지 않았던가?”
저쪽이라면 야바위꾼이 있는 곳이었다.
“네. 저런 건 처음 봐서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도전해 보지 그래?”
도박은 이 시대의 거의 유일한 유흥거리였다. 귀족들은 무도회에서 인맥을 만들고, 거기서 가까워진 이들과 클럽 하우스를 찾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도박에 매진했다.
술과 돈이 오가는 클럽 하우스는 퇴폐적인 귀족 문화의 상징이었다. 때로는 불륜과 밀회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수많은 스캔들을 낳기도 하며, 클럽 하우스는 귀족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에 비하면 평민들의 야바위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야바위는 어차피 다 속임수다. 애초에 고객이 야바위꾼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야바위꾼과 돈을 잃고 터덜터덜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야바위꾼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남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건 내 악역 본능이 발동해서인가?’
뭐, 이유는 상관없었다.
“재미있어 보이네요.”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야바위판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 * *
“뭐 하는 겁니까?”
엘이 이브리아의 뒤를 따르려는 리던의 팔을 붙잡았다. 왕자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상당히 거칠었다. 걸음을 제지당한 리던이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래서 눈썰미 좋은 녀석이 귀찮다니까. 너한테 붙으려고 온 거 아니니까, 이거 그만 놓지?”
하지만 엘은 리던의 팔을 놓는 대신 그의 멱살을 붙잡았다.
“왕족을 사칭하는 건 큰 죄입니다.”
엘이 리던의, 아니, 리던인 척하고 있는 루크의 멱살을 잡아끌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상당히 음산한 경고였지만, 이에 굴할 루크가 아니었다.
“들키지만 않으면 상관없잖아.”
“이미 저한테 들켰잖습니까.”
“그럼 네가 입을 다물면 되겠네.”
“제가 불법을 그냥 넘어갈 것 같습니까?”
“이봐, 엘.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
루크가 질색하며 제 멱살을 붙잡은 엘의 손을 떼어 냈다.
“게다가 저 여자한테 찰싹 붙어서는 처음 데이트하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굳어 있던데. 도대체 뭐야?”
루크가 구겨진 옷을 털어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건 리던이 아닌 루크 본인의 습관이었다.
“……왕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정곡을 찔린 엘이 괜히 말을 돌렸다. 물론 루크도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수면제 탄 술을 먹여 재웠지. 내가 걔한테 이상한 짓을 하겠어? 괜히 말 돌리지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저 여자를 대하는 네 태도, 도대체 뭐냐고?”
명(明)에서 일하는 엘과 암(暗)에서 일하는 루크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선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부딪칠 일도 많았다. 엘은 루크가 저지르는 불법을 용납할 수 없었고, 루크는 엘의 고지식함이 피곤했다.
하지만 이브리아 오베론을 정의하는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이 일치했다. 캐서린을 지키자고 생각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어이없는 꼴은 뭐야?’
오랜만에 현장에 나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루크의 질책 어린 시선에 엘이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든, 그걸 당신이 평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와, 이거 완전히 맛이 갔네.”
루크가 어이없다는 듯 엘을 훑어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네가 맛이 가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 날 방해하지나 마.”
루크가 흉흉한 기세로 몸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이브리아를 뒤쫓을 것 같았던 그의 걸음이 어느새 뚝 멈춰 있었다.
“루크?”
의아해진 엘이 루크를 불렀다. 그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루크도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엘을 불렀다.
“엘,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루크가 이브리아가 향했던 야바위판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야바위판에 불길이 치솟아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엘은 본능적으로 이브리아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그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엘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