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156)

* * *

내가 먼저 축제 이야기를 꺼내자, 엠마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색했다.

“축제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세상에 축제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걸.”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왕도에서 오셨으니까요. 그쪽 축제는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을 게 아닙니까? 그에 비하면 에렐에서 열리는 축제는 소박하지요.”

“원래 축제는 다 재미있는 거야. 게다가 지금은 뭐라도 즐기지 않으면 속이 터져 죽을 것 같거든.”

나는 오전에 보았던 서리 기사단의 훈련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라이오넬은 최악이었다. 여기까진 예상 범위였다. 하지만 그나마 기사 티가 난다고 생각했던 다른 이들의 사정도 라이오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 조연도 못 되는 엑스트라 캐릭터들의 능력치는 딱 그 정도겠지. 내 마법 실력이 쩜오에 불과한 것처럼.’

도무지 발전할 줄 모르는 기사들의 훈련을 흐린 눈으로 보고 있자면, 나의 꿈과 미래도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내 주변엔 그런 인간들뿐인 거야……?’

뒤로 엎어져도 능력자가 나타나서 구해 주는 캐서린과 인프라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억울하네.’

주연만 잘 먹고 잘 사는 더러운 세상 같으니.

“오늘은 이 더러운 세상 따위 다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겠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엠마를 바라보았다.

“엠마는 에렐 토박이랬지?”

“예. 이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럼 축제를 즐기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겠네. 나의 훌륭한 동행이 되겠어.”

“예?”

내 말에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와 같이 나가시려고요?”

“그러려고 했는데. 혹시 다른 사람과 축제에 가기로 약속했어?”

“그럴 리가요. 업무 시간인걸요.”

“그럼 문제없잖아. 엠마가 안내해 주면 되겠다.”

“어…… 하지만…….”

엠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자님과 함께 가지 않으시나요?”

“……왕자님? 리던? 내가 걔랑 왜 같이 축제 구경을 해?”

“아가씨!”

거침없이 나온 이름에 엠마가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겨우 이름 부른 걸 가지고.”

“그래도요.”

“엠마도 뒤에서 동료들과 내 욕도 하고 그럴 거 아냐?”

“안 그래요!”

엠마가 펄쩍 뛰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상당히 억울한 얼굴이었지만, 원래 동료들끼리는 상사 욕을 하며 유대감을 다지는 법 아닌가?

“에이, 괜찮아. 나 그런 걸로 화내는 사람 아냐. 내 앞에서만 안 하면 돼.”

“저는 절대 안 해요! 아가씨 앞에서는 물론이고, 뒤에서도 절대로요!”

엠마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는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고마워?”

“뒤에서 욕하는 애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가씨께서 나눠 준 불로 추위를 견뎌냈으면서…… 정말 배은망덕한 아이들이에요.”

“워낙 내 소문이 안 좋게 나서 그러는 거니까…….”

“아가씬 너무 무르세요!”

“……내가?”

세상에. 이브리아 오베론에게 무르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쁜 소문만 믿고 주인을 욕하는 녀석들은 단단히 혼쭐을 내줘야 한다고요. 아가씨께서는 너무 무르셔서 모두 내버려 두시지만, 원래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사람 좋아 보이던 엠마가 잔뜩 흥분해서 코웃음을 쳤다. 나는 얼떨떨해져 엠마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입을 떡 벌린 채 자신을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제야 엠마가 헛기침을 하며 차분한 태도로 돌아왔다.

“아무튼 제가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응. 충분히 알겠어.”

‘날 조금만 더 많이 좋아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은 이 기분.’

이브리아의 몸으로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는 건 처음이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다들 나를 노려보고, 손가락질 하고, 폭언하고, 뭐 그랬는걸.’

어색해하는 나를 보며 엠마가 비장한 얼굴로 내 두 손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아니라 왕자님과 축제 구경을 하셔야 해요!”

‘아니, 결론이 왜 그렇게 돼……?’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엠마가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역시 아가씨와 함께 축제 구경을 하고 싶지만, 오늘은 뒤에서 숙덕거리는 나쁜 녀석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줘야 한다고요.”

“코를 납작하게?”

“네! 아가씨께서 그 녀석들이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는 귀하신 분이라는 걸 깨닫게 해야죠.”

이제 슬슬 엠마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대단한 왕자님과 어울려 다니는 걸로 내 위치를 보여주라는 거야?”

“물론 아가씨는 혼자 계셔도 빛이 나지만,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하는 멍청이들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음. 나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누구한테 선택받았다는 이유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거잖아.”

다른 사람의 후광을 이용해 나를 높이는 방식. 그런 방식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아가씨, 이렇게 생각하세요. 왕자님은, 그냥 액세서리 같은 거예요.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거요.”

“엠마, 왕자를 액세서리로 매도해도 괜찮은 거야?”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면서요? 겨우 액세서리라고 한 건데요 뭐.”

“배우는 속도가 참 빠르구나, 엠마.”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엠마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액세서리가 어떻게 아가씨를 선택하겠어요? 아가씨께서 자신을 빛내 줄 액세서리를 선택하신 거죠. 남자란 원래 그런 액세서리랍니다.”

“그건 누구의 지론이야?”

“마담 루이제요.”

“그분은 또 누구신데?”

“작가분이세요. 엄청난 관능 소설을 쓰셨죠. 한번 읽어 보실래요?”

“엠마, 인생의 지론을 관능 소설에서 배우는 거야?”

“그게 생각보다 꽤 유용해요. 여러모로 도움이 되죠.”

“……어떤 부분의 도움인지는 별로 알고 싶지가 않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지론은 상당히 마음에 들지만, 난 정말 왕자님과 축제 구경을 할 생각이 없어.”

가만히 마주 보고만 있어도 귀찮은 놈과 일부러 놀러 나가다니.

‘내가 그런 고문을 왜 자처하겠어?’

“하지만 모처럼의 축제인데…….”

엠마가 불만스럽게 반박하는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손님?”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오셨는데?”

“왕립 기사단의 로이츠 경이십니다.”

“로이츠 경?”

‘엘이 도대체 왜?’

따로 약속을 한 일도 없고, 약속 없이 급하게 만날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 엠마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세상에, 아가씨! 왕자님이 아니라 기사님이셨어요? 기사님도 아주 훌륭하죠.”

“뭐가?”

“데이트 상대요!”

“으응?”

엠마의 오해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닌……”

나는 서둘러 항변을 시작했으나, 들뜬 엠마는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응접실로 모시고 차를 대접하렴. 아가씨께서는 치장을 마친 후에 나가실 거야.”

“예.”

엠마의 지시에 하녀가 고개를 깊게 숙인 뒤 밖으로 나섰다.

“엠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치장은 필요 없어.”

“걱정 마세요. 제가 아가씨를 축제를 즐기기 좋은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엠마, 내 이야기 하나도 안 듣고 있지?”

“자, 이쪽으로 오세요!”

“하나도 안 듣고 있구나.”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엠마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어차피 축제 구경을 하러 나갈 생각이었으니까, 누구랑 가든 치장 정도는 하면 좋지.’

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게 미안했지만, 약속 없이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엠마의 분주한 손길이 순식간에 나를 꾸며 놓았다. 이브리아의 얼굴은 날카로운 인상이 강했는데, 지금 거울 속의 내 모습은 표독스러운 느낌이 반 정도는 줄어 있었다. 화장으로 인상을 손본 것 같았다.

‘여전히 화난 고양이 같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사나움을 줄인 게 놀라웠다.

“엠마, 화장 정말 잘하는구나.”

“이게 제 일인걸요.”

엠마가 뿌듯함을 감추지 않고 선선히 웃었다.

“옷은 어떤 색이 좋을까요?”

“너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어두운 계열로 하세요. 푸른색, 보라색, 청록색이 있어요.”

“보라색이 좋겠어.”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나는 그렇게 결정한 옷까지 차려입은 후에야 엠마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럼 데이트 잘 다녀오세요, 아가씨.”

“데이트 아니라니까.”

나는 끝까지 엠마의 오해를 풀지 못한 상태로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엘은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가, 누가 봐도 완벽하게 치장한 내 모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꾸미느라 날 기다리게 한 거였냐-는 눈빛이지, 저거.’

나는 민망해져 괜히 과장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로이츠 경. 많이 기다리셨죠? 하녀들이 뭘 오해하는 바람에. 아무리 말려도 듣질 않더라고요.”

“많이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행히 오랜 기다림에도 기분이 많이 상한 건 아닌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으니 한참이나 내 모습을 살피던 엘이 물었다.

“나가시려던 걸 제가 방해했습니까?”

“아. 경과 이야기가 끝나면 축제 구경을 하러 나갈 거예요. 방해하신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다 문득 엘과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환청을 들은 건 아니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매만졌다. 엘이 이렇게 말을 잘할 리 없으니,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게 분명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엘이 자연스럽게 내 말을 받아쳤다. 나는 귀를 만지던 자세 그대로 입을 떡 벌렸다.

“……이제 말 되게 잘하시네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내 눈빛에 엘의 얼굴이 조금 상기했다. 어쩐지 그가 쑥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하셔서요. 제 목소리.”

“그랬죠. 그랬는데…….”

‘그걸 잊어버린 게 아니었어? 비꼬는 걸로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엘과 캐서린의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말 때문에 이미 목소리 콤플렉스가 사라진 거면, 그 에피소드는 큰 의미가 없는 거잖아.’

엘은 캐서린의 물고기 중에서도 비중이 적은 편이라, 그녀와의 에피소드가 몇 개 없었다. 엘의 목소리 에피소드는 그 몇 안 되는 에피소드 중 가장 임팩트 있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내가 그걸 날려 버린 것이다.

‘미안해서 어쩌지?’

속으로 경악하고 있는 나를 앞에 두고 엘은 태연하게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오전에 기사단 훈련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내일이면 왕도로 돌아가는 터라, 그 전에 전해 드리고 싶어서 급히 약속도 없이 찾아오는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아요. 그게 실례 축에 들기나 하던가요?”

내가 그의 소중한 에피소드를 날려 버린 거에 비하면, 약속 없이 찾아온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전해 주고 싶다는 건 어떤 거죠?”

“책입니다.”

엘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책을 내 쪽으로 밀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었다.

“지금 읽어 봐도 될까요?”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들자마자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갑 도감?”

제목을 소리 내어 읽자 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말에 입히는 여러 가지 갑옷을 정리한 책입니다. 등자나 안장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고요.”

“제목을 보니 그런 내용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이걸 왜 내게……?”

“와이번에도 이런 갑옷과 안장, 등자를 올리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책을 살피던 시선을 들어 엘을 바라보았다.

“와이번에게 갑옷을요?”

“예. 말을 탈 때도 안장과 등자가 없으면 제대로 중심을 못 잡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보다 더 크고 움직임이 큰 와이번의 맨등에 타는 건, 더 어려운 일이겠죠. 그래서 와이번의 등에도 안장을 얹으면 어떨까 생각한 겁니다.”

“와이번의 등에 안장이 올라갈까요?”

“단독으로 올리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갑옷을 입히고, 그 위에 일체형으로 안장을 올려야겠죠.”

“갑옷이 와이번의 움직임을 제한하지는 않을까요?”

“그러지 않도록 제작해야겠죠. 게다가 전투를 위해서라도 와이번들에게 화살을 막을 용도의 갑옷이 필요할 겁니다.”

나는 엘의 설명을 들으며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페이지마다 다양한 마갑 그림과 함께 상세한 설명이 달려 있었다. 마갑을 입은 말들은 확실히 안정감 있어 보였다.

“좋은 생각 같아요. 그런데 제작이 쉽지는 않겠는데요.”

문제는 마갑이 생각보다 정교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었다.

‘만드는 게 보통 일은 아니겠지.’

하물며 와이번은 말보다 몇 배는 더 컸다. 평범한 대장장이는 감히 제작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이걸 제작하겠다고 나설 대장장이가 있을까요?”

“수소문을 해 봐야겠지만…….”

확신에 차서 말하던 엘이 처음으로 말을 흐렸다. 그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놈들은 드워프밖에 없겠는데.]

그때, 내 옆에서 같이 책을 살펴보고 있던 해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드워프요?]

[응. 걔들은 손재주가 좋으니까. 재료만 구해 주면 뚝딱 만들어 낼걸.]

[정말요?]

생각보다 문제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물론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드워프를 찾기가 쉽지 않을 거야. 드워프는 깊은 산속에 마을을 이루고 폐쇄적으로 지내거든.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음. 방법이 없을까요?]

[어디에 모여 사는지 찾기만 하면 협박이든 설득이든 해 볼 수는 있겠지.]

그렇다면 드워프 마을을 수소문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로이츠 경, 혹시 드워프에 대해 아시나요?”

“드워프라는 종족이 있다는 건 압니다. 손재주가 무척이나 좋은 종족이라고. 하지만 여태까지 인간들과 교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괜히 어려운 고민만 드린 것 같습니다.”

“행복한 고민이죠. 적어도 기사들을 와이번 등 위에 앉힐 방법은 알게 됐으니까요.”

아무런 대책이 없을 때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그럼 이 책을 좀 빌려도 될까요? 혹시 모르니 대장장이들에게 이야기를 해 보려고요.”

“물론입니다.”

“고마워요. 나중에 마갑, 아니, 용갑이 완성되면 보답은 하죠.”

“보답은 괜찮습니다. 이미 받았습니다.”

“네? 제가 경에게 뭘 줬던가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엘에게 뭘 줬다면, 내가 잊어버렸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엘은 옅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그래요.”

나도 그를 마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 벌써 이야기가 끝나셨나요?”

뒤늦게 내 몫의 차를 가져온 엠마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곧장 본론부터 풀었더니 차를 준비하기도 전에 대화가 끝나 버린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두 분은 축제 구경을 하러 나가시는 건가요?”

“두 분?”

엠마의 말에 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게 아까 말씀드렸던 그 오해예요. 제 하녀가 저희 둘이 함께 축제 구경을 나갈 거라고 착각했어요.”

“데이트를 하러 오신 게 아닌가요?”

일부러 풀어서 한 말을 엠마가 직설적인 말로 고쳐서 물었다. 데이트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엘의 귀가 새빨개졌다.

‘그래. 얼마나 열 받겠어? 이브리아 오베론이랑 데이트하러 간다는 오해를 받았는데.’

바른 기사 엘 로이츠라면 그런 오해를 받는 것만으로도 불쾌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약속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엘이 질책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눈길을 슬쩍 피하며 엠마를 바라보았다.

“네. 엠마랑 같이 나가려고요.”

하지만 엠마는 나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 이 좋은 날 저와 둘이 축제 구경이라뇨!”

엠마가 간절한 눈으로 엘을 쳐다보았다. 데이트 신청을 하세요! 어서! 그렇게 말하는 듯한 엠마의 간절한 눈빛에 엘의 입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에요, 로이츠 경. 그냥 돌아가셔도……”

“같이 축제 구경을 하시겠습니까?”

“예?”

“선약이 없으시다면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상상 이상의 기사도에 감탄했다.

‘엠마의 간절함을 무시하지 못하고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하다니. 역시 레이디를 신처럼 모시는 엘 로이츠.’

여기서 엘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면 그의 꼴이 상당히 우스워진다.

‘여러모로 미안한 일도 많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해요. 기꺼이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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