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나와 리던은 어색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브리아와 리던이 마주 앉아 있는 장면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색했다.
“저는 전하와 독대를 하려고 했던 건데요.”
불편한 공기가 흐르는 공간에는 또 다른 손님도 있었다. 방 한구석에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서 있는 엘 로이츠였다. 나의 시선을 받았음에도 엘은 움직임이 없었다. 늘 그랬듯 감정 없는 무미건조한 눈을 내리깔았을 뿐이었다.
‘2 대 1은 너무 치사하지 않나?’
불만을 토로하는 나를 보며 리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는 그대도 동행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리던의 시선이 내 옆에 앉은 개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한 마리의 개, 해리가 천진한 척 혀를 내밀었다.
“지금 개와 로이츠 경을 같은 선상에 두신 건가요?”
“개나 기사나 사람을 지키는 건 마찬가지니까. 그렇지, 엘?”
개와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말에도 엘은 흔들림이 없었다. 본인이 개와 같은 취급을 감내하겠다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해리도 완전히 진짜 개는 아니니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갈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이게 별로 귀족답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길게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또 아니니까요.”
“놀랍군. 이브리아 오베론과 마음이 통할 때가 다 있다니.”
“동의하셨으니 바로 본론을 이야기하죠.”
리던과 마주 앉아 할 이야기는, 역시 하나뿐이었다.
“누구도 흠집 내지 못할 확실한 공로. 전하께서는 그게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내 말에 리던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내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본론입니다. 원한다고 하시면 제가 그 공로, 만들어 드리려고요.”
이번에는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엘의 눈빛까지 달라졌다.
원작에서 캐서린의 물고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왕세자파인 카시안과 메이슨, 1왕자파인 리던과 루크, 중립파인 엘. 이렇게 생각과 목적이 다른 다섯 명의 남자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인물이 바로 여주인공 캐서린이었다.
“그대는 카시안의 사람 아니었나?”
리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의 말처럼, 등장인물을 세 부류로 나눴을 때 이브리아는 단연 왕세자파였다. 그것도 아주 강경한 쪽의.
“꽤 옛날이야기를 하시네요. 이제 왕세자 전하와 파혼까지 했는데.”
“그럼 카시안과 파혼하고 복수심이라도 생긴 건가?”
“재미있네요.”
“무엇이?”
“제가 아직도 그쪽에 미련이 남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요. 복수심이라는 건 상대에게 미련이 남았을 때나 가지는 거잖아요.”
“미련이 남지 않았다는 건가? 그 녀석을 얻으려고 사람까지 죽일 정도로 필사적이었으면서?”
“세상에. 제가 또 이 지겨운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네요. 저는……”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죽이려고 했던 것뿐이다. 이 이야기?”
정확히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할 말을 뺏겨 버린 내가 멍하니 리던을 바라보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 말은 나도 몇 번이나 들었지.”
하지만 웃음은 잠시뿐이었다.
“그대에게 복수심도, 미련도 없다면……”
그는 곧 이브리아를 바라볼 때 늘 그랬듯 냉정한 얼굴로 변해 나를 쳐다보았다.
“어째서 날 돕겠다는 거지?”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전 전하를 도우려는 게 아니에요.”
“내게 공로를 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건 날 돕는 일인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겠네요.”
리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거, 스무 고개 같은 건가?”
“제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에요. 당신들과 영원히 인연을 끊는 거요.”
“애초에 우리에게 끊어야 할 인연이라는 게 있던가?”
“와이번 토벌을 위해서 매년 왕립 기사단이 에렐에 온다죠? 그럼 전 매년 이 불편한 얼굴들을 봐야 하잖아요.”
나는 리던과 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주인공을 위한 서브남들답게 객관적으로는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나는 이 녀석들의 얼굴을 보면 속이 답답해졌다.
이미 이브리아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진 공작은 나를 다시 왕도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건 결국 이브리아가 에렐에서 생을 마감한 것처럼, 나 역시 평생 에렐에서 지내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사실 에렐은 추운 것만 제외하면 썩 괜찮은 동네였다. 보는 눈이 많아 내가 뭘 하든 수군대는 사람들로 넘쳐나던 왕도보다 훨씬 나았다.
하지만 와이번 토벌을 위해 왕립 기사단에 손을 벌리고 있어 왕실과의 교류를 피할 수 없다면, 이곳이 왕도와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평화로운 에렐 생활을 위해 이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와이번 문제가 해결되면 왕실에서 에렐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어지겠죠? 그럼 왕자님과 단장님께서도 앞으로 에렐에 오실 까닭이 없고요. 우리 인연의 아름다운 청산이죠.”
“……겨우 그걸 위해서 내게 공로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겐 중요한 문제라서요.”
나는 턱을 괴고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던이 찡그린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내게 공로를 주는 대신 원하는 건 뭐지?”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실에 와이번 문제가 해결됐다는 보고만 올리면, 제가 바라는 건 얻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믿기 힘들다는 거잖아.”
리던이 답답하다는 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겨우 그걸 위해서 이브리아 오베론이 날 돕는다는 게 말이 돼? 우리가 여태까지 어떤 사이였는데?”
“좀 나쁘긴 했죠.”
“조금만 나빴으면 다행이지.”
“목적을 위해서는 과거의 적이 동지가 되기도 하는 법 아닌가요? 전하께서 이 제안에 관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찾을 수도 있고요.”
“그 다른 사람은 당연히……”
“카시안이죠.”
카시안의 이름에 리던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 웬만하면 전하께 공을 드리고 싶어요. 얼마 전에 왕세자 전하께서 찾아와 짜증 나는 행동을 하신 터라, 별로 그쪽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거든요.”
원작에서 리던은 카시안이 왕위에 오른 뒤 홀연히 왕국을 떠난다. 캐서린이 형제의 화해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근본적으로 어긋난 사이를 봉합하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몇 달 뒤, 먼 대륙에서 리던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계가 발견된다. 시계는 금이 간 채 피가 묻어 있었다. 리던의 죽음을 암시하는 장치였다.
‘아마 카시안 쪽에서 암살자를 보내 죽인 거겠지.’
주요 등장인물 중에 죽음을 맞이하는 건 이브리아와 리던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리던을 바라보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헛웃음을 흘렸다.
“이브리아 오베론이 건네는 독이 든 성배인가…….”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리던이 눈을 내리깔았다. 고민하는 듯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그가 곧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좋아. 그대가 주는 그 성배, 내가 받겠어. 어차피 지금 처지에서 더 나빠질 일도 없으니까. 이 정도 도박은 해 볼 만하지.”
“독은 안 들었어요.”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고.”
어차피 리던의 신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신뢰를 받고 싶지도 않았어.’
나는 날 믿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좋아요. 우리에게는 이런 얄팍한 관계가 딱이니까.”
“그럼 이 얄팍한 관계를 위해 그대가 내게 만들어 줄 공로는 뭐지?”
“그건 내일 이야기하시죠. 긴 이야기를 나누기엔 밤이 너무 깊었잖아요.”
평소라면 잠이 들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리던도 창밖을 내다보더니 내 의견에 동의했다.
“확실히 긴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니군. 내일 그대를 찾아가지.”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신다니 영광이네요.”
“받을 게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게 이치에 맞으니까.”
“그런가요? 그렇다면 전 거만하게 왕자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상대에 따라서는요.”
나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리던의 시선을 대충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충 대화가 마무리되었으니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하.”
리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서자 엘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해리가 경계하며 뒤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느끼지도 못했을 정도로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왜 따라와요?”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엘에게 물었다.
‘아. 대답은 안 하려나?’
질문을 하고서야 엘이 말 없는 캐릭터라는 게 떠올랐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밤이 늦었으니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와.”
선이 고운 외모에서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나와 입이 떡 벌어졌다.
“목소리 되게 좋네요.”
생각해 보니 엘의 목소리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책에서는 읽었지만, 거기선 소리가 안 들리니까.’
지난번 살인 미수 사건에 대해 따지러 왔을 때에도, 그는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기만 하는데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고.’
“이렇게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말을 안 하고 살아요? 나 같으면 하루 종일 떠들고 다니겠다.”
이번에는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엘이 조금 상기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칭찬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다 이건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보니 아마 그런 것 같았다.
‘그냥 입 다물고 가야겠다.’
하지만 그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어? 그래요?”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은 자신의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었다. 로이츠 가문은 기사 가문으로 이름 높았고, 엘 역시 가문의 명성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검을 들었다. 어렸을 적 엘은 그다지 눈에 띄는 아이가 아니었다. 작고 왜소한 데다 여자처럼 곱상하게 생긴 외모까지. 그는 로이츠의 가풍과 완전히 반대되는 아이였다.
‘한마디로 미운 오리 새끼였지.’
형제들은 그를 배척했다. 그럴 때마다 엘은 항의했지만, 오히려 계집애 같은 목소리나 내는 어린애라며 더 심한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로이츠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건 다른 형제들이 아닌 엘이었다. 그때부터 누구도 그를 로이츠 가의 돌연변이라며 놀리지 못했다. 변성기를 거치며 형제들이 계집애 같다고 놀렸던 목소리도 낮아졌지만, 과거의 기억은 진하게 남아 엘은 말수 없는 사람으로 남았다. 이 오랜 콤플렉스를 깨뜨리는 사람이 바로 캐서린이었다.
“캐서린이 로이츠 경의 목소리가 좋다고 말 안 해 줬어요?”
내 질문에 엘의 표정이 드물게 감정을 드러냈다. 의아함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표정. 그 얼굴을 보자마자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직 캐서린하고의 그 에피소드가 나오기 전인가? 그런 건가? 그런가 봐…….’
나는 경악에 차 머리를 부여잡았다.
<레이디 캐서린>의 이야기는 카시안이 왕위에 올라 캐서린에게 청혼을 하고, 두 사람이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끝난다. 외전 형식으로 후일담이 공개되긴 했지만, 큰 줄기는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아직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어. 카시안이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고.’
후반부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원작의 이야기가 한참 진행 중이라는 의미였다.
‘캐서린이 엘의 콤플렉스를 깨 주는 에피소드는 상당히 후반부에 나왔으니까…….’
확실했다. 아직 캐서린과 엘의 중요한 에피소드가 나오기 전의 시점이었다. 이야기에서 멀어져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더니, 아직까지 원작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해리, 혹시 기억을 지우는 마법 같은 건 없을까요?]
[그런 편리한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해리 포터는 할 줄 알던데. 같은 해리면서 왜 못 해요?]
[해리 포터? 그건 또 누구야?]
해리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내가 다른 마법사와 자신의 능력을 비교한다고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이 녀석은 자기 능력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으니까 말이지.’
[할 줄 모르면 됐어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엘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그거 엘한테는 엄청나게 감동적인 에피소드였던 것 같은데.’
남자 주인공은 카시안이었지만, 엘과 캐서린의 그 에피소드를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으로 꼽는 독자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감동의 순간을 내가 빼앗아 버렸다니.
‘윽. 내 양심이……!’
하지만 좌절하던 나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아니, 아니지. 나는 악역이잖아.’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지나가는 악역이 하는 말이랑 여주인공이 하는 말이 어떻게 똑같겠어?’
나는 엘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고 재빨리 내 생각에 수긍했다.
‘그래. 지금도 봐. 표정 아무렇지도 않은 거. 내가 했던 말은 벌써 잊어버린 게 틀림없다고.’
어쩌면 비꼬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을 들었을 때 엘의 표정도 이상했다.
‘그래, 그래. 그 이브리아가 한 말이니까 안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을 확률이 더 높지.’
확신을 가진 나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원작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한 사람에게 중요한 사건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엘과 루크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어두운 과거가 많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둘의 좋은 추억은 별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캐서린한테 제대로 칭찬 들으세요, 로이츠 경.’
나는 속으로 그를 토닥이며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내 방에 도착한 것이다.
“제 방은 여기예요. 기사도를 발휘해 에스코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전하자 엘이 고개를 숙여 답했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칭찬이 아니라 비꼰 거라고 받아들인 거구나.’
이놈의 악역 목소리. 이놈의 악역 얼굴. 뭘 해도 비아냥으로 받아들여지는 놀라운 효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