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변화 (1)
나는 기절한 라이오넬과 와이번의 꼬리 공격에 부상 당한 기사들을 와이번의 등에 태우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와이번을 타고 온 기사들은 저택에 도착하고서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일부러 와이번을 타고 저택으로 돌아온 건, 내가 와이번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와이번들을 죽이기 위해 에렐에 온 토벌단도 돌아가겠지.’
지리적인 특성상 에렐은 왕도와의 교류가 극히 적은 도시였다. 토벌단이 돌아가면, 내가 왕도에 돌아가지 않는 이상 귀찮은 캐서린네 물고기들과 엮일 일도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와이번이라는 거, 이동 수단으로 상당히 유용한데?’
사람을 죽이는 마수라기에 이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못 했다. 그런데 커다란 등에 한번 타 보니 꽤 안정적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빠른 속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시대의 이동 수단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형편없었다. 기본적으로는 말과 마차였고, 이제 막 깔리기 시작한 철도가 있지만 속도가 아주 느린 데다 정차역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세계라면 와이번은 비행기쯤 되겠어.’
비행기. 자연스럽게 흐른 생각 속에서 애써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시작된 진동,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기체와 사람들의 비명, 반복적으로 울리던 경고음까지.
비행기 사고였다. 내가 가진 지난 삶의 마지막 기억.
이브리아가 되기 전 나는 무역 회사에서 일했다. 스페인어를 전공했다는 이유로 남미 시장을 담당했고, 현지 출장을 이유로 장거리 비행이 잦았다. 일상적으로 탑승했던 그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이 길에서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다던데. 내가 그 재수 없는 확률에 걸릴 게 뭐람.’
그런 희박한 확률의 주인공이 될 거라면 복권 당첨 쪽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운은 나쁜 쪽으로 작용해 비극적인 사고로 나를 이끌었다. 생각해 보면 하필 눈을 뜨게 된 게 이브리아의 몸인 것도 내가 운이 나쁘다는 증거였다.
‘추락하기 전에 읽던 책이 <레이디 캐서린>이어서 여기에 떨어진 건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 속에 떨어질 줄 알았다면 동화를 읽을 걸 그랬다.
‘결말이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그런 책들 많잖아.’
그런 책 속에 떨어졌다면 아무리 불운을 몰고 다니는 나라도 평탄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와이번을 쓰다듬으며 불운을 한탄하는 사이 별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레이디 오베론,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캐서린의 물고기 중 가장 피곤한 리던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나눌 만한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아마 와이번 때문에 온 거겠지.’
예상대로 리던은 얌전히 앉아 있는 와이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집채만 한 마수가 동네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얌전한 와이번은 처음 보는군.”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리던이 와이번을 경계하며 내게 물었다.
“서리 기사단의 보고에 따르면 그대가 와이번을 길들였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리던이 가리키는 곳에 막 정신을 차린 라이오넬과 응급 처치를 받고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내게 오기 전 그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확인이 필요한 질문인가요? 이미 보고 계시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고 보란 듯이 와이번을 쓰다듬었다. 리던이 흠칫 놀라며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지만, 그의 경계가 무색하게도 와이번은 얌전했다. 큰 눈을 끔뻑이며 자신을 관찰하는 와이번과 눈이 마주친 리던이 머쓱한 표정으로 검을 내려놓았다.
“와이번은 길들이는 게 불가능한 마수다. 왕립 기사단에서 어렵게 생포한 와이번을 길들이려고 해 봤지만 모두 실패했지. 그런데, 일개 귀족 영애가 그걸 해냈다고? 어떻게?”
진실은 간단했다.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와이번 대장과 만나 거래했지.’
그러나 리던에게 이 진실을 말하려면 내가 어떻게 와이번 대장과 만날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그 설명에서 해리의 존재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바로 해리니까.
하지만 해리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결국 진실에 공백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던 제레인트는 공백이 있는 진실을 믿어 줄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 뻔뻔해지는 것뿐이었다. 태연하고 뻔뻔하게 우기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아마 나처럼 무역업에 종사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무역의 기본은 협상이었다. 그 협상을 수월하게 끌고 가려면? 상대의 필요를 파악하는 분석력과 내 의견을 잘 포장하는 유려한 화술이 필요했다. 나의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연기력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도 중요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입 털기에는 자신 있다 이거지.’
게다가 나는 책으로 이 세계를 모두 경험했다.
‘상대에게 필요한 게 뭔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고.’
이건 내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건 비밀인데요.”
“뭐?”
“비밀이라고요. 이건 제가 가진 재산이니까요.”
“와이번이 그대의 재산이라는 건가?”
리던이 단번에 미간을 찌푸리며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것참 불경한 소리군. 마수는 모두 왕가에서 관리한다.”
“알고 있어요. 와이번은 제 재산이 될 수 없죠. 왕가의 것이니까요.”
리던의 말처럼 와이번을 비롯한 마수는 모두 왕가의 소유였다. 정확히 말하면, 마수를 죽여서 얻는 자원을 왕가가 모두 독점하고 있었다. 강한 무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는 와이번의 뼈와 발톱, 회복약 제조에 필요한 트롤의 피를 특히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를 어기고 몰래 빼돌린 사람에게는 중형이 내려졌다.
“하지만 와이번을 길들이는 능력은 어떤가요?”
“와이번을 길들이는 능력?”
“네. 능력이요. 설마 제 재능마저 왕가의 소유라고 할 셈이신가요, 전하?”
내 말에 리던이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보란 듯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군가는 그림을 잘 그리고, 누군가는 검을 잘 다루죠. 그런 재능은 모두 ‘누군가’의 재산이고요.”
“그 말은……?”
“와이번을 길들이는 능력이 제 재산이라는 뜻이죠. 왕국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무엇보다 값지고 귀한 재산 아니겠어요? 제가 왜 이 귀한 재산을 타인과 나눠야 하죠?”
“누가 그 능력을 나누라고 했지? 나는 이번 와이번 토벌과 관련한 모든 일을 파악할 의무가 있어. 그대가 와이번을 길들였다는 것도 그중 하나고.”
“뭐, 저도 전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전하께서도 제 입장을 좀 이해해 주셔야 해요.”
나는 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방법은 저만의 비법이에요. 하지만 이걸 전하께 말하는 순간 그건 저만의 비법이 아니게 되겠죠. 그럼 제 재산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지고요.”
“설마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이야기인가?”
“농담이시죠? 제가 돈을 받고 이 귀한 재능을 팔겠어요?”
오베론 가문의 재력은 그들이 쌓아 온 명예와 역사만큼이나 유명했다. 약삭빠른 왕비가 그 재력을 얻고자 이브리아와 카시안의 약혼까지 성사했을 정도 아닌가? 리던뿐만 아니라 왕국 사람 모두가 오베론의 부를 잘 알고 있었다.
“전 그냥 제 비법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전하.”
제법 정중하게 전한 결론에 리던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은 와이번을 쳐다볼 때처럼 경계심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일을 꾸미다뇨?”
“이브리아 오베론이 작당하는 일이야 뻔하지 않겠어?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일이겠지.”
리던이 비웃음을 흘리며 내게 검을 겨누었다. 예리한 검날이 위협적으로 반짝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서리 기사단원들이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나를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아야 하는지, 상대가 왕자이니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제압할까?]
망설이는 기사들을 대신해 해리가 꼬리를 흔들며 물었다. 리던을 노려보는 그의 입에서 위협적으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슨 술수를 써서 와이번을 길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안전에 위협이 가는 행동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리던은 해리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검을 더 단단하게 틀어쥐었다.
“말해.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이야아아아!”
리던의 서늘한 목소리가 어설프고 괴상한 기합 소리에 묻혔다. 저 멀리서 검을 쥔 채 달려오고 있는 라이오넬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리던은 느리게,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게 분명한 라이오넬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뭐지, 저 어설픈 기사 놈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뻔히 보였다.
어느새 리던 앞까지 다다른 라이오넬은 쓸데없이 커다란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리던이 가볍게 몸을 틀어 간단하게 공격을 피하자, 달려오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라이오넬만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라이오넬!”
그 꼴을 지켜보던 서리 기사단 동료들이 경악에 차서 라이오넬을 불렀다. 당연하게도, 바닥을 구른 그가 걱정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와, 와, 와, 왕자님께 검을 휘두르다니! 이 미친놈이!”
왕족을 공격하는 건 반역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검을 휘두른 사람이 오베론 가의 서리 기사단원이라면,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오베론 가의 반역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오베론 가문을 반역자로 몰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리 기사단과 왕립 기사단도 모두 검을 뽑아 들고 우왕좌왕했다. 주변의 경악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닥을 구른 라이오넬이 먼지투성이가 된 몰골로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는 나쁜 분이 아니십니다!”
라이오넬이 울먹이는 얼굴로 검을 들어 리던을 경계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검을 든 팔과 내 앞을 지키고 선 두 다리도 떨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라이오넬은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내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상당히 볼품없는 꼴이었지만, 덜덜 떨리는 그 등짝이 어째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새벽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산책을 나가시거나,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손가락을 다 잘라 버리겠다고 하시거나, 뭐 그런 수상쩍고 악독한 행동을 하시긴 해도! 사실은 정말 좋은 분이시라고요!”
라이오넬의 외침이 공허하게 하늘을 울렸다. 내 이야기지만, 내가 들어도 수상하고 악독했다. 해리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저 자식 일부러 저러는 거 아냐?]
하지만 다부지게 다문 입술이며 비장한 표정은 누가 봐도 악의가 없었다. 날 곤란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라면 회유해서 입막음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정말 날 옹호하려고 저런다는 게 더 무섭다.’
순수한 의도로 저러는 사람은 통제할 방법도 없었다. 골치가 아파 머리를 짚는 내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들이 쏟아졌다.
‘도대체 어떤 것부터 수습을 해야 되는 거지?’
당장 수습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를 손가락이나 수집하는 수상하고 음침한 사람으로 만든 라이오넬의 발언? 아니면 라이오넬이 왕자에게 검을 휘둘러 오베론이 반역죄를 뒤집어쓰게 생긴 거? 그것도 아니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에 해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계약자, 우선 저 원흉을 치워 버리자. 또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오랜만에 듣는 기특한 소리였다. 나는 적극적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어떻게 치울까요?]
[간단하지.]
해리가 짧게 대답하고 와이번에게 눈짓하자, 와이번이 거칠게 날갯짓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이번은 유연한 꼬리로 라이오넬의 몸을 감아 그대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으어어어어!”
처량한 라이오넬의 비명은 와이번이 높이 날아오를수록 줄어들어, 그들의 모습이 하늘 위의 점처럼 작아졌을 때야 완전히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치워 버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도대체 와이번에게 뭐라고 한 거예요?]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 너도 봤잖아. 난 그냥 눈짓만 했다고. 아마 와이번도 저놈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무사히 돌아오겠죠?]
[뭐, 검은 숲을 두어 바퀴 돌고 나면 돌아오지 않을까?]
해리가 시큰둥한 얼굴로 길게 하품했다. 하지만 나는 해리처럼 태평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더 나빠졌잖아요.]
그나마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던 서리 기사단의 눈빛마저 적대적으로 변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동료가 와이번에게 납치당한 셈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누굴 탓하겠어?’
전부 해리를 믿은 내 잘못이었다.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격이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와이번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는 리던을 불렀다.
“전하,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보는 눈 없는 곳에서, 조용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리던의 벽안이 나를 향했다. 카시안과 비슷했지만 조금 더 날카로운 느낌의 눈이었다.
“저 기사는 무사히 돌아오나?”
“아마도요. 멀미가 심해서 구토 정도는 하겠지만.”
그 넓은 숲을 몇 바퀴 돌고 나면 오늘 먹은 걸 모두 게워 내야 할 것이다.
“전하께 검을 들이댄 벌은 그걸로 대신해 주시죠. 어차피 전하께서도 오베론과 척을 지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그 제안, 받아들이지.”
리던이 소란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를 겨누던 검을 거둬 제 허리춤에 다시 찼다.
“따라와. 나도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던 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