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156)

* * *

선두에서 일행을 지휘하는 엘을 뒤따르던 기사 하나가 심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엘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기사의 말에 긍정했다. 그 역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와이번들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습니다. 개체 수도 확연히 줄었고요.”

첫날에는 몰려드는 와이번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달려드는 와이번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그나마 달려드는 와이번들도 기사들이 몇 번 검을 휘두르면 맥없이 도망쳤다. 덕분에 기사들은 손쉽게 와이번들의 알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제법 속도가 붙어 예상했던 기간보다 빠른 시일 내에 토벌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긍정적인 상황이었지만 기사들은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생태계의 흐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만약 흐름이 변한다면, 그건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사건들은 식물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게 긍정적인 영향이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반대였다.

생태계가 흔들리면 인간들의 삶도 불안해진다. 이곳 검은 숲의 생태계도 마찬가지였다. 와이번들의 행동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는 건, 무엇인가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단장님!”

다들 긴장한 얼굴로 숲을 걷고 있던 그때. 기사 하나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왔다. 알이 보관된 둥지의 위치를 찾기 위해 보냈던 정찰대였다.

“제, 제가 빈 둥지 근처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그가 어린애 머리통만 한 고깃덩이를 내밀었다. 형체가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와이번의 신체 일부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완전히 도륙당한 와이번의 신체 일부를 앞에 두고 기사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자신들이 힘을 합쳐 겨우 제압할 수 있는 와이번. 그 와이번을 이렇게 산산조각 내 버린 수수께끼의 포식자.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이놈이 혹 인간들을, 에렐 영지를 노리고 내려온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만약 와이번을 이렇게 도륙한 포식자를 상대해야 한다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기사단장 엘 로이츠는 무덤덤한 얼굴로 기사의 손에 들린 고깃덩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불의 흔적이군.’

그렇다면 이성이 없는 동물은 아니었다. 불을 다루는 건 이성이 있는 존재들뿐이니까.

‘인간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이성이 있는 존재다.’

그렇다면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었다. 위협이 될 존재인가, 도움이 될 존재인가? 그것 역시 확신할 수 있을 터.

‘만약 위협이 될 존재라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검을 쥔 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매일 밤, 나는 몰래 저택을 빠져나와 검은 숲으로 향했다. 해리가 그토록 원하던 전쟁을 위해서였다. 물론 그 전쟁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었다. 검은 숲에 살고 있는 마수, 와이번들이 해리의 살해 욕구를 달래 줄 제물이었다.

와이번들은 인간보다 강하다. 싸우는 재미가 있으니 해리의 욕구를 해소하기엔 그만이었다. 개체 수도 아주 많아서 그가 질릴 때까지 싸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와이번들이 줄어들면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토벌대도 빨리 돌아갈 거 아냐?’

해리의 욕구도 해소할 수 있는 데다 귀찮은 캐서린의 물고기들까지 보내 버릴 수 있다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좋은 대책이라니까.’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바위에 걸터앉아 신이 난 해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벼운 손짓에 거대한 와이번들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나가떨어졌다. 제 영역을 침범당한 와이번들이 필사적으로 해리에게 대항했지만,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해리를 막는 건 역부족으로 보였다. 사실상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와이번들이 잠시나마 해리의 발을 묶어 둘 수 있는 것도 그가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한 번에 달려들었지만 해리에게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해리는 힘을 빼고 와이번들을 상대하며 한참을 즐기다가, 흥미가 떨어지면 푸른 불꽃을 불러내 그들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아무튼 성격 참 나빠.’

나는 살육에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해리를 보며 그가 악마라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한없이 잔혹한 악마 테오하리스. 그게 진짜 해리였다.

‘내가 엄청난 걸 불러내기는 했구나.’

해리의 힘 하나만 있어도 웬만한 성 하나는 거뜬하게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그런 녀석에게 벽난로에 불이나 붙여 달라고 한 건가?’

노트북이 먹통이니 고쳐 달라고 빌 게이츠를 고용한 꼴이었다.

‘그리고 빌 게이츠는 노트북을 고쳐 준 뒤에 이렇게 말하겠지.’

내 연봉은 100만 달러니까 그걸 지급해-라고.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해리가 날려 버린 와이번의 날개 한쪽이 눈앞에 떨어졌다. 조각난 채 피가 뚝뚝 흐르는 괴수의 날개가 발아래에서 구르고 있다니 호러 영화가 따로 없었다.

‘이런 거 보는 취미는 없는데.’

마음 같아서는 해리만 검은 숲으로 보내고 싶었지만, 그가 얼마나 날뛸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를 통제할 수 있는 내가 곁에 있어야만 했다.

내가 함께 가야 한다는 제약 때문에 움직이는 시간은 자연스레 깊은 밤으로 한정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밤 와이번들을 쓸어버리고, 해가 뜨기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조용히 방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며칠이나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와이번들의 개체 수는 착실하게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와이번들이 이제는 대략 숫자를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해리.”

나는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조용히 해리를 불렀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는 정확히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제가 가지고 놀던 와이번들을 태워 버렸다. 주변을 정리하고 내게 다가오는 해리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벌써 해 뜰 시간이야?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이상하네.”

“얼마 안 지났긴요. 해리가 죽인 와이번들 수를 생각해 봐요. 그 정도 죽였으면 몇 년은 욕구불만이란 소릴 하지 말아야 한다니까요.”

“에이, 무슨 소리야? 겨우 50마리 정도 죽였을 뿐인데. 이걸론 몇 달도 제대로 못 버텨.”

와이번 50마리를 죽여 놓고 겨우 몇 달이라니.

‘가성비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은 거 아닌가?’

지금이야 와이번을 죽이면 된다지만, 와이번의 씨가 마른 뒤에는 또 다른 제물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한 마리를 1년으로 쳐 주면 안 돼요? 토벌대는 와이번 한 마리만 죽여도 경사 났다고 파티를 연다던데요. 보통은 죽이지 못하고 쫓아내 버리는 게 고작이라고.”

겨우 한 마리 잡는 것도 몇 년에 한 번씩뿐이라고 했다. 이번 토벌을 시작한 후에도 와이번을 잡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토벌대의 이름은 와이번 토벌대가 아니라, 와이번 알 토벌대가 더 적합한 거 아닐까? 개체 수가 늘어나지 못하게 알을 깨고 성체 와이번들이 늙어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니까 말이다.

나보다 그런 현실을 더 잘 알고 있는 해리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토벌대와 비교하는 게 우습다는 반응이었다,

“그 연약한 놈들과 날 비교하지 말아 줄래? 상당히 자존심 상하거든.”

평소라면 잘난 체를 한다며 해리를 타박했겠지만, 바로 앞에서 압도적인 힘을 지켜본 뒤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리를 찬양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냥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이어지는 고요함에 해리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해?”

“뭘요?”

“왜 반박 안 하냐고.”

“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평소랑 다르니까…….”

해리가 우물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해리를 쳐다보니, 그가 기다렸다는 듯 내 옆에 걸터앉았다.

“야, 혹시 나한테 겁먹었냐? 막 내가 무섭고 그래? 이제야 이 몸이 얼마나 대단한 악마인지 알아차린 거야?”

“네. 해리 엄청 강하더라고요. 그런 힘을 가지고 내 옆에서 벽난로 불이나 붙이고 있었으니 많이 심심했겠네요.”

“뭐, 그렇게 심심하기만 했던 건 아니고, 알다시피 네가 참 웃긴 인간이잖냐.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그게 좀 재미있기도 하고.”

나는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해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완전히 심심했다 그런 건 아니고……. 내 힘을 완전히 못 쓰니까 그게 안타까웠다, 뭐 그런 이야기니까…….”

“어르신, 지금 뭐라고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젊은이들의 언어로 다시 말해주실래요?”

“으, 그 어르신 소리 좀 하지 말랬지! 나 앞길 창창한 청년이라니까!”

“아, 방금 그건 알아듣겠네요. 이렇게 명확하게 말하면 얼마나 좋아요?”

“어휴, 정말! 너는 눈치도 없고 센스도 없냐? 척 하면 척,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내가 뭐 하러 수고를 들여가며 상대방 말을 해석해야 하는데요? 하고 싶은 말 있는 사람이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노력해야죠.”

“그…….”

말문이 막혀 버린 건지 해리가 씩씩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됐다, 됐어. 말 안 할래.”

“그래요? 알았어요.”

‘말하기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상대가 말하기 싫다는 걸 굳이 졸라 가며 듣는 취미는 없었다.

‘말하고 싶으면 언젠가 말하겠지 뭐.’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해리가 기가 막힌다는 듯 발을 굴렀다.

“야, 이럴 땐 보통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냐? 적어도 한두 번은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건데?”

“포기가 빠른 게 또 제 장점이라.”

“……일반적으로 그런 건 장점이라고 안 하거든.”

“왜요? 안 될 일은 빨리 포기하는 게 상책이잖아요. 지지부진하게 붙잡고 있어 봐야 시간만 버리죠. 상대방이 싫다는데 내가 말해 달라고 매달려 봐야 무슨 소용이에요? 그냥 포기하고 다른 쪽에 힘쓰는 게 낫지.”

“어휴, 넌 그게 무슨 말……”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으려던 해리가 곧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눈을 좌우로 굴렸다.

“……이 되네? 야. 그거 말이 좀 되는 것 같아.”

해리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순간, 머리 위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숲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바람에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중심을 잡을 수 없어 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지만, 해리가 내 어깨를 붙잡아 단단히 중심을 잡아 주었다.

‘와. 바람이 이렇게 강한데 하나도 안 흔들려.’

내가 그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 해리의 시선은 바람의 시발점인 하늘을 향해 있었다.

“뭐야, 쟤가 왜 여기 있어?”

하늘에서 무엇을 발견한 건지 해리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도대체 뭘 봤기에 저런 반응이지?’

나는 해리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시선 끝에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와이번 한 마리가 걸렸다. 척 봐도 평범한 와이번은 아니었다. 몸집이 해리가 잡아 죽인 와이번들의 두 배는 될 정도로 컸으니까.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저 정도라면 한 무리의 우두머리는 되겠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거대한 와이번이 땅 위에 내려앉았고, 그의 날갯짓으로 만들어졌던 바람도 뚝 그쳤다.

나는 바람으로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하며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크기가 더 어마어마했다. 고개를 들어 머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와이번이 입을 쩍 벌렸다. 공격인가 싶어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나. 와이번. 대장.”

“……어?”

“인사한다. 인간. 악마. 너희에게.”

와이번이 말을 했다.

‘말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너무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이렇게 생긴 동물이 말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아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게 상식일 것이다.

“……왜 와이번이 말을 하지?”

나는 당황해서 와이번을 가리켰다. 어쩌면 무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삿대질에 와이번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말. 배웠다. 인간에게.”

이게 배운다고 할 수 있는 일인가? 와이번에게 말을 가르칠 생각을 한 정신 나간 인간은 또 누구인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해리, 설마 이게 평범한 거예요?”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해리에게 속삭였다. 내가 아직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이 세상의 설정에 따르면 와이번이 말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잖아. 말하는 와이번이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해?”

해리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한심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앞에 말하는 와이번이 있잖은가? 나는 당당하게 우리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와이번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런 와이번이 눈앞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녀석이 특이한 거지. 나보다 오래 산 영물이라고. 그쯤 살았으면 말 정도는 해야지.”

해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여기까진 왜 왔어?”

그는 아주 익숙한 태도로 거대한 와이번에게 말을 걸었다.

“별종답게 무리를 떠나 남쪽에서만 지내더니.”

“죽었다. 동족들. 많이. 모른다. 이유. 갑자기. 어째서? 필요하다. 대화.”

“이유가 필요해? 악마에게 살육은 이유가 없어. 그냥 하는 거지.”

“하지만. 계약자. 인간. 다르다. 필요하다. 이유.”

해리를 바라보며 말하던 와이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와이번의 말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지만 내용을 알아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왜 갑자기 와이번들을 학살하는지 묻고 있는 거다.

‘와이번한테 학살 이유를 추궁당할 줄은 몰랐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와이번을 죽여서 욕구를 채우자는 말은 못 했을 거다. 대단한 동물 애호가는 아니지만, 대화까지 가능할 정도의 지능이 있는 존재를 죽여 버렸다는 건 역시 죄책감이 느껴진다. 나는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였다.

“악마는 살육을 해야 욕구가 해소된다고 해서요. 그런데 사람을 죽이라고 할 수는 없고, 무작정 참으라고 했더니 절 잡아먹으려고 해서……. 방법을 찾다 보니 와이번들이 가까이 있기에…….”

커다란 와이번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는 신세라니. 왜 캐서린을 괴롭히느냐고 내게 땍땍거리던 캐서린의 물고기들에게도 변명은 안 했는데.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그때는 진짜 이브리아가 친 사고고, 이건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수습도 내가 해야 맞는 거다.

‘스스로 한 일까지 나 몰라라 한다면 그건 쓰레기지.’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어쨌든 와이번의 얼굴에 대고 말하는 건 조금 민망했다. 와이번은 어색하게 말을 이어 가는 나를 두고 해리를 바라보았다.

“욕구 해소. 있다. 다른 방법. 악마. 왜. 안 했나. 설명.”

그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발을 굴렀다. 땅이 쿵쿵 울리고, 뜨거운 콧김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상당히 격렬한 반응에도 해리는 굉장히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을 뿐이었다.

“나보다도 오래 산 어르신이 너무하시네. 이런 부스러기를 데리고 그런 걸 하라는 거야? 와이번 일족도 우리 악마들처럼 어린 일족의 보호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해리의 핀잔에 와이번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얼굴이 뚫어져라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한참의 관찰 끝에 와이번이 다시 한번 크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렇다. 인간. 어린아이. 그런 생각. 파렴치했다. 하겠다. 반성.”

위로 솟아 있던 꼬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말하지 않아도 풀이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해리도 그걸 보고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폈다.

“흥. 당연히 그러셔야지.”

“하지만. 곤란하다. 동족. 죽었다. 많이. 멸종. 곤란하다.”

“나도 곤란하다고. 인간은 못 죽이게 하고, 죽여도 좋다고 허락받은 건 와이번뿐이란 말이야.”

“어째서. 와이번?”

와이번이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꼬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고, 얼굴에도 침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와이번의 얼굴에도 표정이 있다니. 정말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말을 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더 심해졌다.

“그게…… 와이번들이 교역로도 막고, 벌목이나 채집도 못 하게 하고, 아무튼 영지 사람들한테도 피해를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토벌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죠. 이렇게 말이 통하는 줄은 몰랐는데…….”

“할 수 있다. 통제. 교역로. 벌목. 채집. 그냥 둔다. 약속한다.”

“어…… 그렇게 말씀하시면…….”

‘엄청나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거든요…….’

내 목소리에 서린 죄책감을 느꼈는지 해리가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이 통하는 건 대장뿐이야. 다른 애들은 지능이 딸려서 소나 돼지랑 비슷하다고. 너 고기 먹을 때 막 죄책감 느껴? 아니잖아. 그거랑 비슷하다니까. 막 죽여도 상관없어.”

“그럼. 잡아라. 소나 돼지. 어째서. 와이번?”

“걔들은 약해서 재미없어.”

“그건. 너의 문제. 왜. 우리가. 이해?”

“누가 이해해 달래? 어차피 이해할 지능도 없잖아.”

“있다. 우리도. 감정. 한다. 생각. 무례하다. 너는. 예의 없는. 말종.”

“어차피 약육강식이라고. 이런 세계에서 예의를 찾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아?”

“말종. 예의 없는. 너는. 머저리. 개차반. 하얀 불가사리. 못생긴 불가사리.”

뭔가 비하하는 말 중에 이상한 단어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말을 배울 때 잘못 배웠나?’

어쩌면 악마들의 언어로는 불가사리가 대단히 심한 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리 역시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양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불가사리? 그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이야?”

“노인네. 부르면서. 반말. 예의 없는. 말종. 역시. 불가사리! 하얀 불가사리. 아주. 하얀 불가사리!”

“하얀 불가사리?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데?”

“불가사리! 하얀 불가사리! 젖은 불가사리! 납작한 불가사리! 맛없는 불가사리!”

‘……불가사리 종류가 다양해졌군.’

씩씩대면서 온갖 불가사리를 나열하는 와이번을 보며 해리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심한 욕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야. 고작 불가사리 따위에 이렇게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니.”

“불가사리. 안 통한다. 말. 어린 인간. 통한다. 너는. 대화?”

와이번이 콧방귀를 끼며 내게로 몸을 숙였다. 커다란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와이번이 안심하라는 듯 입을 쭉 벌려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게 더 무서운데요.’

“일족. 죽었다. 많이. 동정한다. 너는. 있다. 연민.”

와이번의 얼굴이 우울하게 일그러졌다. 커다란 눈에도 곧장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물기가 서렸다.

“어린 인간. 불가사리. 막는다. 와이번. 들어준다. 요구. 요청한다. 연민. 죽었다. 많이. 잃었다. 가족.”

“계약자. 들어주면 안 돼. 내 욕구는 어떻게 해소하라고?”

“어린 와이번. 잃었다. 어미. 울었다. 많이. 혼자다.”

와이번 대장이 본격적으로 내 동정심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해리가 넘어가면 안 된다고 소리를 빽빽 질렀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으.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죽이는 건 역시 힘들다고.’

어쨌든 나도 보통의 도덕성을 가진 인간이었다. 말이 안 통하는 상대였다면 모를까,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며 동정을 호소하는 상대의 말을 묵살하며 살육을 명할 수는 없었다. 와이번이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결론은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그럼 해리의 본능은 어떻게 채워 주느냐가 문제인데. 그것도 지내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와이번이라는 대책이 나타났던 것처럼 말이다.

‘대책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겠어?’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 전에 식인 악마한테 잡아먹히지는 않겠지 뭐.’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와이번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와이번들을 죽이는 건 그만둘게요.”

“계약자!”

해리가 경악에 차서 소리쳤다. 와이번은 축 늘어뜨렸던 꼬리를 좌우로 살랑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어린 인간. 다르다. 맹세한다. 와이번. 보답한다. 일족의 은인. 어린 인간.”

그렇게 말한 와이번이 몸에서 비늘을 하나 떼어 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가 건네는 비늘을 받아 들었다. 몸집이 커서인지 비늘 하나가 내 얼굴만큼 컸다.

“대장의 비늘. 알아본다. 일족들. 충성. 따른다. 어린 인간. 너의 말.”

“이걸 와이번들이 알아보고 제 말을 따른다고요?”

“그렇다.”

“와이번들이 전부 인간의 말을 이해해요?”

“이해한다. 인간의 말. 못 한다. 이야기.”

“알아듣긴 하는데 말은 못 한다는 거죠?”

“맞다. 똑똑한. 어린 인간. 일족의 은인. 푸른 다람쥐.”

“푸른 다람쥐?”

“그래. 어린 인간. 푸른 다람쥐. 반짝이는 다람쥐. 야광 다람쥐.”

와이번이 입을 쭉 벌려 웃으며 연신 다람쥐를 외쳐 댔다. 어감이 미묘했지만, 흐름상 어쨌든 칭찬인 것 같았다.

“……그거 좋은 말인 거죠? 고마워요.”

“당연한 말. 필요 없다. 인사.”

와이번이 꼬리를 흔들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어느새 하늘 끝에서부터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떠날 시간. 가야 한다. 남쪽으로. 멀지만. 알고 있다. 방법. 불가사리가. 불러라. 언제든. 나는. 온다. 기쁘게.”

와이번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먼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분노에 찬 해리의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계약자!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쨌든 많이 죽이긴 했잖아요. 한동안은 참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네 일 아니라 이거지? 나는 최고의 드라이어인데! 어떻게 이런 취급을 할 수 있어! 이 불가사리!”

“해리, 불가사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잖아요.”

“안 좋은 뜻이라는 건 확실하잖아, 이 불가사리!”

해리가 연신 불가사리를 외치며 발을 굴렀다. 와이번들과 싸울 때 해리는 정말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 즐거움을 뺏겼으니, 지금 이 상황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이 성가신 성냥을 또 어떻게 달래지?’

그런 생각을 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느낀 해리가 서둘러 개로 변신했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어디서 들려온 소리지?’

가까운 곳에서 난 소리라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느 쪽인지는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기척을 알아챈 해리가 입을 꾹 다문 채 소리가 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그곳이 소리의 진원지일 것이다.

나는 해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는 짐승이기를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거기에 서 있는 건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성가신 사람.

“아가씨이이이!”

가까운 수풀을 헤치고 나온 기사가 나무뿌리에 걸려 철푸덕 넘어졌다. 그 모습만 봐도 기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왕국에 이런 어설픈 기사는 단 하나뿐일 거야. 아니, 하나뿐이어야만 해.’

이런 사람이 둘이나 있다면 왕국 기사들의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라이오넬 경,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나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라이오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내 손을 잡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가씨야말로 어째서 여기에 계신 겁니까? 지금 숲에 엄청난 마수가 출현해서 왕립 기사단과 서리 기사단 모두 비상 수색 중입니다.”

“엄청난 마수요?”

“예. 성체 와이번을 완전히 조각내어 죽여 버린 괴물이 등장했다고 난리입니다. 아직 확실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서 더 위험하고요.”

‘그 괴물의 정체, 나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천진한 개 노릇을 하고 있는 해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해리가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돌렸다.

“그럼 라이오넬 경도 숲을 수색 중인 거예요? 다른 수색대는요?”

와이번을 도륙할 정도의 강한 마수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꾸린 거라면, 여러 기사가 조를 짜서 움직이고 있을 터였다. 일당백의 기사라면 혼자 움직일 수도 있겠지만, 라이오넬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다른 기사의 모습을 찾기 위해 라이오넬의 뒤쪽을 살폈으나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색대와 함께 움직이다가 아가씨를 발견하고 따라온 겁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을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러는 경도 혼자잖아요.”

“예?”

“날 쫓느라 혼자서 움직이다가 마수를 만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어…… 그러게요? 그랬으면 전 어쩌죠? 엄청 강한 마수라고 했는데.”

라이오넬이 그런 생각은 못 했다며 허옇게 질린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한 것 같았다.

‘이 사람, 정말 어떻게 기사가 된 거야?’

황당해하는 나를 버려두고 라이오넬은 홀로 비장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고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제, 제가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아가씨는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거, 거, 거, 걱정 마십시오!”

“그것 참…… 믿음직스럽네요.”

“물론입니다! 서리 기사단의 라이오넬!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가씨를 지킬……”

라이오넬의 비장한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가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엄청난 수의 와이번들이 날갯짓을 하며 우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우아아아아악! 끅!”

엄청난 풍경에 심약한 기사는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 대다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등신.]

해리가 쓰러진 라이오넬을 향해 혀를 차는 동안, 부지런히 날아온 와이번들이 내 주위에 동그랗게 내려앉았다. 거대한 와이번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위압감이 대단했다. 대장 와이번보다는 작은 크기였지만, 평범한 사람인 나보다는 몇 배나 컸다. 황금빛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와이번들이 일제히 커다란 날개를 접고 고개를 숙였다. 와이번 대장이 주고 간 그의 비늘 때문인 것 같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커다란 눈동자에 양심이 콕콕 찔렸다.

“어…… 미안해요. 동족을 너무 많이 죽여서. 이렇게 말이 통하는 줄도 모르고.”

내 말에 죽은 동족들이 생각났는지 와이번들의 눈이 구슬퍼졌다. 덕분에 내 죄책감은 수직 상승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향해 무리 중 가장 거대한 와이번이 몸을 낮추었다. 그의 머리가 내 눈높이에 맞춰졌다. 와이번은 괜찮다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화해의 몸짓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쓰다듬었다. 느리게 피부를 매만지자 와이번이 낮은 소리로 그르릉거렸다. 이렇게 만져 주는 게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라이오넬!”

“너 거기 있냐?”

그때 수풀을 해치고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아마 라이오넬과 조를 이뤄 숲을 수색하던 기사단 사람들인 것 같았다.

“너 맨날 그렇게 딴 길로 새면…… 헉!”

투덜거리며 라이오넬의 흔적을 뒤쫓던 기사들이 공간을 가득 채운 와이번들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와이번 하나와 싸운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수십 마리의 와이번이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놀랄 법도 했다.

“이게 무슨…….”

놀란 기사들이 검을 고쳐 잡으며 상황을 살폈다.

“라이오넬? 그리고…… 아가씨?”

기절해 있는 라이오넬에 이어 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와이번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놀라서 경악했다.

“당장 그놈들한테서 떨어지십시오! 저희가 어떻게든 시선을 끌 테니 그사이에 도망가세요!”

비장한 얼굴로 외치는 기사의 눈빛이 매서웠다.

‘다행히 라이오넬과 달리 제대로 된 기사네.’

내가 진짜 위험에 처한 아가씨였다면 그들이 퍽 든든했을 것이다.

“제가 신호를 드리겠습니다! 셋을 세면 공격할 테니, 아가씨는 곧장 뛰십시오! 아시겠습니까?”

기사가 뒤에 선 동료들에게 눈짓하자, 그들 역시 비장하게 무기를 고쳐 잡았다.

“하나! 둘! 셋!”

기사가 예고대로 소리치며 내 앞의 와이번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나는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기사들이 와이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와이번은 꼬리만 가볍게 휘둘러 그들의 공격을 제압했다. 그대로 바닥을 나뒹군 기사들이 여전히 와이번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경악했다.

“왜 도망 안 가셨습니까!”

“난 도망가겠다고 한 적 없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와이번의 미간을 쓰다듬었다. 와이번이 기분 좋게 가르릉거리며 내 손에 얼굴을 비비자, 절망에 찼던 기사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금 와이번이…….”

“아가씨에게…….”

“애교를 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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