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녹였더니 온몸이 풀어져 졸음이 밀려왔다. 방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눈꺼풀이 무겁더니, 따뜻한 차까지 한 잔 마신 뒤에는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졸음에 저항하지 않고 침실로 향했다.
잠시 낮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는데, 나보다 먼저 해리가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의 모습으로 침대를 차지하는 해리는 이제 익숙했다. 문제는 오늘 그가 개가 아닌 인간형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뭐 해요?”
“보면 몰라? 침대에 누워 있지.”
“그걸 몰라서 묻겠어요? 왜 침대에 누워 있냐는 거죠. 나 졸려요. 잘 거니까 빨리 나와요.”
나는 성가신 모기를 쫓아낼 때처럼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내 손짓에 어째서인지 해리의 눈이 반짝거렸다.
“싫어. 안 비켜 줄 거야.”
“뭐라고요? 나 졸려서 장난할 기분 아니에요. 빨리 비켜요.”
“나도 늘 피 보고 싶어서 장난할 기분이 아니었어. 그런데 넌 그거 다 무시했지? 너도 한번 겪어 봐야 해. 기본적인 욕구를 참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럼 전쟁하자는 내 기분을 이해하겠지. 먹는 걸로 어떻게든 참아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야.”
해리가 나를 보며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대단한 건수를 잡았다는 양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그 꼴을 보며 내 눈이 가늘어졌다.
‘으음. 나름 머리를 굴리긴 했는데.’
잠을 꼭 침대에서만 자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소파에 몸을 구겨 넣었다. 1인용 소파라 누워 자는 건 무리였지만, 기대어 자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폭신하게 몸을 감싸는 게 아주 편안했다. 물론 침대의 편안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잠들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심지어 지금은 어디에든 머리만 대면 세상모르고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졸린 상태였다.
“어어…… 이게 아닌데……. 계약자? 나 이제 정말 한계라니까! 정말인데!”
“시끄러워요. 나 그만 잘게요.”
“이러다 나 다른 사고 치면 어쩌려고? 응? 이제 정말 한계인데…… 저기, 계약자?”
몰려오는 수마에 더 이상 대꾸할 힘도 없었다. 나는 해리의 황망한 목소리를 배경 삼아 천천히 꿈속에 빠져들었다.
처음은 이브리아가 되기 전의 내 모습이었다. 배경도 완전히 다른 현대의 도시. 하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빌딩으로 가득했던 현대의 도시가 조금씩 일그러진다. 높은 건물은 간곳없이 나지막한 집들이 늘어선 가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속에 덩그러니 떨어진 나는, 왜인지 모르게 커다란 바위에 짓눌린 채였다.
‘아, 갑갑해. 하필 이런 꿈이야? 소파에 대충 몸을 구겨 자서 그런가?’
이래서야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는 개운한 잠을 위해 끙끙대며 꿈속의 바위를 밀어냈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바위가 어찌나 무거운지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무게에 짓눌리다 보니 숨까지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분명 꿈속에서의 일일 뿐인데. 무게감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정말로 호흡이 힘들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악몽이 이렇게 생생해?’
나는 짜증과 함께 눈을 떴다. 분명 날이 밝을 때 눈을 붙였는데, 어느새 주변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악몽에 시달린 탓에 깊이 자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엔 침대에서 제대로 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도 역시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꿈인가? 아닌데. 나 분명히 눈떴는데?’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로 눈을 몇 번 껌뻑이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선명한 풍경이 펼쳐졌다. 코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있었다.
“악!”
비명을 지르고 제대로 살펴보니 해리의 얼굴이었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놀라서 바닥까지 툭 떨어졌던 가슴이 진정됐다.
“해리. 뭐 하는 거예요?”
해리가 내 다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 잠들기 전부터 전쟁 한번 일으키자며 칭얼거리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숙면을 방해하는 걸 택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보채 봐야 소용없어요. 난 전쟁 안 일으킬 거라니까요!”
당장에 반박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단호한 선언에도 해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낯선 무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쩐지 눈에 생기가 없었다.
“해리?”
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의아해져서 해리를 불렀더니, 그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어찌나 강하게 붙잡았는지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였다.
‘칭얼거리는 거 무시하고 잠들어서 삐친 건가?’
귀찮았지만 삐친 어르신을 달래는 것도 내 일이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내가 알아서 소환해 버린 녀석이니 내가 챙겨야지 어쩌겠어?’
“알았어요. 이야기 들어 줄 테니까, 우선 이거부터 놓고……”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해리가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를 덥석 깨물었다. 어디 그뿐인가? 혀를 내밀어 살을 핥아 내리기까지 했다.
‘내 목덜미가 사탕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물고 빨고 난리야?’
평소의 해리를 생각하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보세요, 어르신? 해리 할아버지? 야, 해리!”
확인차 몇 번이나 해리를 불러 봤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말이 통하는 상태는 아니고. 나도 힘을 쓰는 수밖에 없겠네.’
“난 분명히 너 불렀어요. 그런데 해리가 대답 안 한 거예요.”
그러니까 원망은 사양한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힘을 모은 뒤 온 힘을 다해 해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확한 타격감. 크리티컬 히트였다.
“윽!”
낮은 신음 소리와 함께 해리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비틀거리는 해리의 눈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 나 왜 아파? 뒤통수가 막 얼얼한데.”
해리가 제대로 얻어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네가 때렸어?”
“네. 내가 때렸어요.”
“뭐? 가만히 있는 악마를 왜 때려!”
“가만히 있긴 무슨. 기억 안 나요? 내 목덜미 막 물었잖아요.”
“내가? 네 목덜미를? 설마.”
해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거 일 쳐 놓고 모른 척하는 거 아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해리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여태까지 지켜본 결과 해리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아도 별문제가 없으니 거짓말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정말 기억이 안 난다는 건데.’
“이거 봐요.”
나는 긴 설명 대신 해리에게 물린 목덜미를 보여주었다. 주변이 어두웠지만, 악마의 눈이라면 어둠 속에서도 충분히 내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잇자국이 왜 거기 있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갑자기 왜 사람 목덜미를 물어요?”
“그거야…….”
죄인이라도 된 듯 내 눈치를 살피며 우물거리던 해리가 곧 어깨를 폈다. 제가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이제 한계라고, 무슨 사고를 쳐도 난 모른다고!”
“그 사고에 날 잘근잘근 씹어 먹는 것도 있는 줄 몰랐죠. 진작 말했으면 진지하게 고민해 줬을 거 아니에요?”
“난 말하려고 했거든! 근데 네가 듣지도 않고 잠들었잖아.”
“그래서, 지금 자기가 잘했다 이거예요?”
“그건!”
“그건?”
“당연히 아니지만…….”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던 해리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자제심이 없고 그런 악마가 아니거든! 근데 이렇게까지 피를 안 본 건 처음이라서 그래.”
“그렇다는 말은, 피를 안 보면 해리가 실수로 날 잡아먹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욕구불만인 식인 악마한테 먹혀서 끝나는 인생이라니. 거창한 죽음을 바란 적은 없지만, 이렇게 허무한 마지막은 사양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뭔가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해리. 당신은 정말 성가신 성냥이에요.”
“하지만 최고의 드라이어지.”
“그래요. 하지만 손이 많이 간다고요. 유지비도 많이 들고!”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저택 내의 서고에서 악마에 대한 책까지 찾아 읽었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악마를 소환했다며 소개되는 사례들이 나와 너무 달라서 참고할 부분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악마를 소환한 사람들은 전부 강한 힘을 얻어 복수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려고 했다. 덕분에 애써 고민하지 않아도 악마들의 기본적인 욕구와 그들의 목표 사이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졌다.
‘어째서 다들 이렇게 거창한 이유로 악마를 부르는 건데?’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책을 덮었다. 제목이 <아주 소박한 악마 소환>이어서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꽝이었다.
[거창한 이유로 악마를 부르는 게 평범한 거야. 벽난로에 불이나 붙여 달라고 악마를 부르는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해리, 당신을 위해 열심히 방법을 찾고 있는 내게 할 말이 겨우 그것뿐이에요?]
[흥. 날 위해서는 무슨. 잡아먹히기 싫어서 그런 거면서. 나한테 잡아먹히는 게 그렇게 싫냐?]
‘아니, 그럼 먹히는 걸 좋아할 사람도 있나?’
황당한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당연히 싫죠. 먹히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딨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목덜미 물렸을 때도 얼마나 아팠는데.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어요?]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에 해리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그가 대단히 한심한 사람을 본다는 양 혀를 끌끌 찼다.
[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잡아먹힌다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
먹는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가 그런 거 아닌가? 거기에 무슨 다른 뜻이 있다고?
[그럼 뭔데요? 다른 식으로 먹는 것도 있나? 아. 인육이 아니라 피를 빨아 먹는 거예요? 해리가 원하는 건 피니까?]
갑자기 찾아온 깨달음에 흐렸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빵이랑 고기 먹는다기에 당연히 인육 쪽이라고 생각했죠. 지금이라도 내 피 줄까요? 피 조금이면 그 정도는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눈을 껌뻑이며 물으니 해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부스러기네.]
할 말이 많지만 애써 참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이렇게 설익은 부스러기를 두고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그 설익은 목덜미를 물고 빤 게 누구시더라? 간도 안 된 내 목덜미가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먹어요? 깨워서 잘 익은 케이크나 달라고 할 것이지!]
[그건 이성이 없어서 그런 거거든! 일종의 금단 현상 때문이거든!]
해리가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타이밍 좋게 들려온 기사들의 우렁찬 함성에 묻혀 버렸다.
‘서리 기사단인가? 라이오넬도 있으려나?’
라이오넬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꽤 재미있었다.
‘온갖 몸 개그를 하며 구박당하는 게 썩 볼만하지.’
슬쩍 창밖을 내다보니 한 무리의 기사들이 줄을 맞춰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리 기사단이 아닌 왕립 기사단이었다. 제복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왕도에서 온 기사들은 오전에 가볍게 훈련을 하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서리 기사단과 함께 검은 숲으로 토벌을 떠났다. 밖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훈련 소리나 멋진 기사님들을 찬양하는 시녀들의 수다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제 집처럼 저택을 누비는 기사들 덕분에 나의 활동 반경은 더 좁아졌다. 저택을 달리며 훈련하는 사람들 중에 리던이나 엘은 없었지만, 지난 온천에서의 경험에 비춰 봤을 때 생각지도 못한 순간 그들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접점을 줄이는 게 상책이지. 마주쳐서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싫으니까.’
그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방에 틀어박혀 느긋하게 시간 때우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스스로 원해서 틀어박히는 것과 어쩔 수 없이 틀어박히는 건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답답한 마음에 엠마에게 언제 토벌이 끝나는지 물었더니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거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3주는 더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오래 걸려?
-예. 아무래도…… 와이번이 약해질 시간을 노려서 토벌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와이번이 약해질 시간?
-와이번은 햇빛에 약하거든요. 해가 가장 강한 정오 무렵에는 움직임이 둔해져서 다른 시간대보다 제압하기가 쉽지요. 부상자를 줄이려면 그때를 노려 토벌하는 수밖에 없어요.
방법이 없다면 무식하게 들이닥치겠지만, 와이번이 약해지는 시간대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덕분에 토벌 진행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와이번이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라도 흘려야 하나?’
그런 소문이 퍼지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와이번 고기며 알을 구해 가려는 사람들이 넘쳐 날 것이다. 어디 고기랑 알뿐인가?
‘뼈도 고아 마시고, 목덜미에 빨대를 꽂아 피까지 빨아 먹겠지.’
그러면 금세 와이번 씨가 마를 것이다. 나중에는 토벌은커녕 멸종 위기라면서 보호 동물로 지정할지도 모른다.
‘아, 그런데 여기도 보호 동물 같은 게 있나?’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머릿속을 스치고 간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해리.]
[왜?]
[해리의 욕구는 피를 보면 채워진다고 했죠?]
[단순히 피를 봐서 풀리는 게 아냐. 네 피를 보여 줘도 소용없다고. 싸워서, 죽이고, 피를 보는 게 즐겁단 말이야. 그 과정이 중요한 거라고.]
[그럼 꼭 인간의 피를 봐야 하는 건 아니겠네요? 싸워서, 죽이고, 피를 볼 수만 있다면 그게 어떤 피든 상관없을 거 아니에요?]
[죽이는 게 즐거운 상대라면, 뭐, 그래. 인간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런 상대가 흔하지 않다고. 벌레를 죽이는 것도 살육이고 피를 보는 거지만, 전혀 재미가 없단 말이야.]
해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인간보다 훨씬 강해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제압할 수 있는 상대. 그럼에도 힘에 부쳐서 약해지는 시간을 노려야만 하는 상대.
나는 씩 웃으며 해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해리, 우리 시원하게 전쟁 한판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