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156)

* * *

기사단을 환영하는 연회가 크게 열렸지만, 나는 그들과 껄끄러운 만남을 피하고자 그런 종류의 연회에 모두 불참했다.

‘완벽해.’

이렇게만 하면 기사단이 왕도로 돌아갈 때까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군, 이브리아 오베론.”

어느새 내 눈앞에 캐서린의 물고기 두 마리가 서 있었다. 검은 머리의 리던 제레인트와 하늘색 머리의 엘 로이츠. 막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지 두 사람의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 물고기들 상대하는 건 귀찮은데. 그냥 계획대로 방에 틀어박혀 있을걸.’

저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좋은 온천이 있다는 엠마의 말에 흔들린 게 문제였다. 소금을 함유한 온천이라 피로회복은 물론 피부에도 좋다고 했다. 피곤한 일을 피해 보겠다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오히려 피곤해져서 몸이 무겁던 차였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노곤하게 늘어지는 상상을 하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렐은 지독한 추위만큼이나 좋은 온천으로 유명하지요. 명성을 듣고 먼 곳에서 일부러 에렐을 찾는 분들도 많으신걸요.

그렇게 유명하다니 왕도에서 온 이 물고기들도 온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사단 모두 와이번 토벌로 정신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온천에 들를 정도의 여유가 있었을 줄이야.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여기 계실 줄은 몰랐는데. 토벌로 바쁘신 거 아니었나요?”

“아직은 본격적인 토벌을 시작하기 전이라서.”

리던이 짧게 대답하며 내 모습을 훑었다. 대놓고 관찰당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괜히 지적해서 시비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뭐래도 좋으니까 할 말만 하고 빨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생기는 스킬이었다.

이브리아의 몸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역 회사에서 일하던 회사원이었다. 상사의 쓸데없는 잔소리를 대충 흘려버리는 데는 도가 텄으니,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할 자신이 있었다.

“꽤 좋아 보이는군. 한바탕 왕도를 뒤집어 놓은 사람답지 않게 말이야.”

“네. 뭐, 그렇죠.”

“이런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금세 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아, 예. 그렇진 않겠죠.”

“아니면, 이곳에서 또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음. 네, 그건 아니고요.”

상대방이 이렇게 밍밍한 반응이면 전혀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을 거다.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당연히 패는 재미도 없겠지.’

성의 없는 내 반응에 리던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나 시비를 걸려는 사람에게는 반응을 않는 게 상책이었다.

“할 말 다 하셨으면 가 봐도 될까요? 온천욕을 하려고 온 거라서.”

“온천욕이라니, 정말 팔자 좋군.”

‘이건 강적이다.’

그렇게 성의 없이 반응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시비를 걸어오다니. 어쩔 수 없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게 통하지 않으면 상대를 해 주는 수밖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제 팔자가 좋아 보이는 게 그렇게 불만이세요?”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려고 했던 인간이 팔자 좋게 늘어져 있으면 당연히 아니꼽겠지?”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이 나락에 떨어졌나요? 그건 아닐 텐데.”

오히려 룰루랄라 신나게 인생을 즐기고 있을 거다. 예전에는 공작의 딸이자 왕세자의 약혼녀인 이브리아의 눈치를 보느라 캐서린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쨌든 사교계의 실세는 이브리아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브리아는 왕세자에게 파혼당했고, 왕도에서 먼 북쪽으로 쫓겨나기까지 했으니, 이제 사교계는 캐서린의 독무대였다.

“결과가 중요한가? 당신이 그런 마음을 먹고, 실제로 시행할 계획까지 세웠던 인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거 아닌가?”

“그래서 앞으로는 조용히 살겠다고 했잖아요. 그 의미로 제가 이 에렐에 있는 거고요.”

“조용히 살아? 이브리아 오베론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다른 속셈이 있겠지.”

“왕자님, 혹시 악인의 교화를 믿지 않는 쪽이세요? 한 번 나쁜 놈은 영원히 나쁜 놈이다, 뭐 이런 사상을 가지고 계신가? 왕국 사람을 모두 포용해야 할 왕자님께서 너무 극단적이시네요.”

이렇게 옹졸해서야 어찌 대업을 도모하겠니, 왕자야? 그런 내 말뜻을 알아챘는지 리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용하게 몸을 낮추고 있지만, 어쨌든 그도 왕위를 노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왕세자에게 위협적인 형제이니 왕이 되지 못하면 언젠가는 죽게 될 운명. 제대로 약한 곳을 파고들자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너무 아픈 쪽을 건드렸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 이쪽은 해결이었다.

그러면 남은 물고기는 하나.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엘을 바라보았다. 너도 나랑 한판 하고 싶니? 그런 의미로 엘을 바라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역시 레이디와는 날을 세우지 않겠다는 거군.’

그렇다면 굳이 나도 나설 이유가 없었다. 나는 두 사람의 뒤쪽을 가리키며 평온하게 말했다.

“인사는 충분히 나눈 것 같네요. 이만 비켜 주시겠어요? 두 분께서 온천으로 가는 길을 딱 막고 계셔서.”

드디어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글 시간이었다.

* * *

‘이거지, 이거야.’

나는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편안하게 늘어졌다. 공기는 차갑고, 물은 따뜻하고.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해리,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요?]

해리는 멀리 떨어진 바위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만 있을 때면 늘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입도 꾹 다물린 채였다.

[여기가 편해.]

[너무 멀리 있잖아요. 대화하기 불편한데.]

[어차피 목소리는 다 들리는데 뭐가 불편해?]

[얼굴이 안 보이잖아요. 표정 안 보이는 상대랑 대화하는 건 불편하다고요.]

어찌나 먼 곳에 앉았는지 해리의 얼굴이 손톱만큼 작게 보일 정도였다. 텔레파시 같은 소리로 대화하기는 하지만, 역시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쪽이 좋았다.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지 말이 없던 해리가 곧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건 여전했다. 해리의 얼굴이 손톱만큼 작게 보이다가, 이제는 사과 크기로 보이는 정도의 차이일까? 아무튼 여전히 멀었다.

“아직도 표정이 안 보이는데.”

내 말에 해리가 머뭇거리더니 조금 더 가까운 곳으로 다가왔다. 이제 흐릿하게 얼굴 표정이 확인될 정도였다.

“아니, 더 가까이 오라니까요! 혹시 이거 내가 모르는 놀이 같은 거예요? 난 해리를 부르고, 해리는 쥐똥만큼 조금씩 다가오는 그런 놀이인가?”

“그럴 리가 있냐?”

해리가 한숨을 내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평소보다는 더 거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얼굴이 보였다. 따뜻한 온천의 열기 때문인지 해리의 얼굴이 불긋했다. 눈이 제대로 마주치자마자 해리가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돌렸다.

“야. 너는 부끄러움도 없냐? 그런 모습을, 어? 막 보여주고, 어?”

“해리. 제가 지금 영문을 모르겠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해리를 살폈다.

‘어째 지금 반응이 꼭…….’

“혹시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아, 아니거든!”

“아니긴, 부끄러워하는 거 맞네. 이게 뭐가 부끄러워요? 그냥 몸이라고 몸.”

내가 물 위로 팔을 들어 흔들자 해리가 기겁하며 다시 멀어졌다. 나무 뒤로 몸을 숨긴 그를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왜 해리가 옷을 벗은 것처럼 그래요? 옷을 벗은 건 난데. 그리고 어차피 알몸도 아니잖아요.”

드레스를 벗기는 했지만, 노천 온천이라 속에 받쳐 입는 얇은 옷은 입고 있었다. 비침이 적은 편이라 속살이 보이지도 않았다.

“의외인데요? 이런 거에 부끄러워하다니.”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럼 가까이 와 봐요.”

“…….”

역시나 해리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와, 해리 할아버지, 나이에 비해 순진하시네요.”

“할아버지 아니라고 했지! 이제 그만 나와. 돌아갈 시간이야.”

내가 배를 잡고 웃자 해리가 씩씩거리며 내 뒤로 다가왔다. 가볍게 나를 들어 온천에서 건져 낸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순식간에 온몸의 물기가 말랐다.

“어어?”

영문을 몰라 몸을 살피는 나를 보며 해리가 뿌듯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열기로 몸에 있는 물기를 모두 증발시킨 거라고. 쉬워 보이지만 불을 섬세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상대가 통구이가 되어 버리지.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정도 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랄까.”

평소라면 해리의 잘난 체를 타박했겠지만 이건 정말 놀라웠다.

“와. 드라이어가 따로 없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자 해리가 즉각 반응하며 눈을 반짝였다.

“드라이어? 그건 또 누군데?”

“어, 드라이어가 사람 이름은 아니고…… 물기를 말려 주는 그런 건데…….”

이쪽 세계에는 기계가 없으니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난처함에 말을 대충 얼버무리자 해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을 드라이어라고 부르는 건가? 나 말고 이런 게 가능한 존재가 있을 리 없는데. 만약 있더라도 나만큼 완벽하게 물기를 말리진 못하겠지. 그러니 내가 최고의 드라이어야.”

“아니. 드라이어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부정하자 해리가 발을 구르며 불만을 토로했다.

“뭐야? 설마 네가 아는 드라이어보다 내가 못하다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해리처럼 이렇게 완벽하게 물기를 말려 주는 드라이어는 없는걸요.”

“역시 그렇군. 내가 최고의 드라이어야!”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드라이어는 사람이 아니라고. 머리를 말려 주는 기계라고.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해리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요. 해리가 세계 최고의 드라이어예요.”

“그럼, 그럼. 역시 그렇지.”

이렇게 뿌듯해하는데 아무렴 어떤가? 어차피 얘는 평생 드라이어가 뭔지도 모를 텐데.

‘진짜 드라이어가 뭔지 알면 펄쩍 뛰겠지만.’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저택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왔던 길을 거슬러 온천 입구까지 걸어가자 해리가 서둘러 개로 변신하며 내게 경고했다.

[누가 있어.]

해리의 경고가 끝나자마자 나 역시 사람을 발견했다. 눈에 띄는 하늘색 머리카락. 엘 로이츠였다.

‘얘는 또 왜 여기 있어? 아까 돌아간 거 아냐?’

무슨 속셈인가 싶어 엘을 바라보자, 그가 처음 온천 입구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저택 방향으로 사라졌다.

‘뭐야? 도대체 왜 여기 있었던 건데?’

내가 나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간 걸 보면 다른 용무가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엘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본 건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저 녀석 말이야.]

해리가 팔짱을 낀 채 턱짓으로 사라지는 엘을 가리켰다.

[혹시 로이츠 가문의 부스러기냐?]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 내가 전에 머저리 자식한테 소환됐을 때 그 옆에 붙어 있던 놈이랑 닮았어. 그놈 이름이 젠 로이츠였거든. 그래서 그놈의 후손인가 싶었지.]

[그래요? 이렇게 한눈에 알아볼 만큼 닮았어요?]

[생긴 것도 그렇긴 한데, 그보다도 하는 짓이 꼭…… 그놈도 쟤처럼 말이 없었거든. 처음에는 벙어리인 줄 알았다니까. 3개월 만에 갑자기 말을 거는데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고.]

엘의 설정에도 분명히 말수가 적다는 게 있었다. 덕분에 왕립 기사단 내에서는 ‘엘’이라는 새로운 단위까지 공공연하게 통용되고 있었다. 1엘은 한 시간에 한 번 말하는 것, 2엘은 한 시간에 두 번 말하는 것을 의미했다.

‘3엘이 된 날, 해가 서쪽에서 뜬 게 아니냐고 왕립 기사단원들이 놀라는 에피소드도 있었지.’

그러니까 평소에는 1엘, 2엘 정도로만 말한다는 뜻이었다. 과묵함도 이 정도면 병 아닌가?

‘해리는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

둘의 성향을 반씩 섞으면 딱 보통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는 해리는 평소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역시 피는 못 속여. 머저리 놈 후손은 다 머저리 같더니, 말 없던 놈 후손은 또 말이 없잖아. 말을 포기하는 대신 검술 실력을 얻는 게 저 집안 특징인가?]

엘을 평가하는 해리의 목소리에 묘한 호의가 담겨 있었다. 인간에게 호의적인 그의 태도가 아주 낯설었다. 나한테는 늘 불평불만만 늘어놓을 뿐이면서. 어이가 없어져 해리를 빤히 보니, 그가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쟨 강해. 강한 인간은 재미있지. 난 재미있는 인간이 좋더라.]

[그거, 난 약해서 재미없다는 말이에요?]

[확실히 넌 재미없어. 약해서가 아니라 야망이 없어서. 전쟁 한번 크게 일으켜 주면 누구보다 재미있는 인간이 될 텐데. 어때, 이 기회에 재미있는 인간이 되어 보는 건?]

‘그래. 왜 이 이야기가 안 나오나 했지.’

해리는 모든 대화를 살인이나 전쟁으로 연결하는 대단한 재주가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저택을 향해 걸었다.

[그러지 말고 전쟁 한 번만 일으키자니까?]

고개를 저으며 걷는 내 뒤로 해리가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시원하게 한 방, 얼마나 좋아? 몇만 명 죽이고 나면 나도 한동안은 안 칭얼거리고 지낼 수 있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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