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카시안은 왕도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 성과도 없이 왕도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서 땅을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
에렐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카시안 제레인트는 이브리아 오베론을 우습게 봤다. 제가 웃으면서 뭔가를 요구하면 손쉽게 들어주던 여자였으니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그럼 제게 입을 맞춰 주세요-라고 말하며 치맛자락을 꽉 쥐는 게 전부였지.’
그간 카시안은 그녀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해 줬다. 약혼한 사이에 그 정도 스킨십은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는 그것 역시 약혼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제 왕위 계승에 힘을 실어 주는 대가로 그 정도의 봉사는 값싼 편이었다.
이렇게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패가 제 손에 굴러떨어진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의 어머니도 동의했다. 그녀는 이브리아가 리던이 아닌 널 좋아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그 애를 끝까지 붙잡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캐서린을 사랑하게 되어 이브리아에게 파혼을 통보했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어차피 이브리아 오베론 아닌가? 자신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아무튼 제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여자. 접근해서 구슬리면 간단하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완전히 달라져서는…….’
카시안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이브리아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정말로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제 것이라고 생각했던 애정이다. 그 애정을 소중하게 여긴 적은 없지만, 손에 쥐고 있던 걸 빼앗겼다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다.
게다가 이브리아의 애정은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그는 세력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던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카시안, 왕국 역사상 왕세자가 왕위에 오른 게 몇 번인지 아니? 두 번. 단 두 번뿐이란다. 많은 왕세자들이 다른 왕자들의 견제를 받아 밀려났지. 물론 나는 널 세 번째 케이스로 만들 거야.’
그의 어머니는 자신감 있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너 역시 명심하렴. 왕세자가 되었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란다. 왕관을 머리에 쓰는 순간까지, 왕위는 네 것이 아니야. 세력을 모으고 그 중심에 서야 한다.’
많은 세력들 중에서도 오베론은 알짜배기였다. 명예, 권력, 힘, 돈. 모든 것을 가진 가문. 이걸 놓칠 수는 없었다.
왕비는 카시안의 파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카시안은 캐서린과의 결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호언장담했다. 파혼을 하더라도 이브리아의 마음을 쥐고 흔들 수 있다고, 그리하여 오베론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한 번 가졌던 애정이야. 그걸 다시 얻는 건, 어렵지 않지.’
* * *
카시안이 돌아가고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향긋한 차, 달콤한 케이크, 따뜻한 벽난로. 눈앞에서 어이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도 깔끔하게 치워 버렸다.
이보다 완벽한 일상이 있을까?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한없이 늘어져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만, 누구 하나 그걸 지적하지 않는다. 아주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단 하나, 손가락으로 열심히 내 머리카락을 괴롭히고 있는 악마 한 마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계약자, 행복해?”
“네.”
“그래? 그렇구나. 계약자는 행복하구나. 나는 이렇게 우울한데. 좋겠다, 계약자는 행복해서…….”
해리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왜 우울한지 물어봐 달라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지만, 그 뜻에 넘어가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피를 보고 싶다느니, 사람을 죽이고 싶다느니 그런 이야기겠지.’
반응해 주기 시작하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차를 음미하자 이번에는 해리가 과장스럽게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약자의 행복을 위해서! 그 재수 없는 금발 자식도 혼내 줬는데! 계약자는 내가 우울해도 관심 하나 안 주고! 아, 서럽다 서러워! 내 인생 왜 이러냐!”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덕분에 그 자식을 제대로 망신 줬으니까요.”
나는 바닥에 엎어져 있던 카시안과 황망하게 그를 부축하던 기사들의 얼빠진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통쾌한 순간이었다. 절로 웃음이 나와 흐뭇한 미소를 짓자, 해리는 내가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양 재빨리 생글거리며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게 상을 주는 게 어때?”
“상이요?”
“그래! 키우는 개가 이렇게 예쁜 짓을 했는데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상도덕이 있다면 그래선 안 되지.”
“상도덕이라니. 그게 악마가 할 말이에요? 아마 악마가 제일 상도덕 없는 존재들일 텐데.”
“세상에 상도덕을 말하는 악마가 하나 정도는 있을걸.”
“그게 바로 해리고요?”
“그렇지.”
제가 유리할 때만 상도덕을 찾는 게 악마답다면 악마다웠다. 뭐, 내가 시키기도 전에 카시안을 바닥에 집어 던져 주기도 했고.
‘상 정도는 줄까?’
“그래. 참 잘했어요, 우리 해리.”
나는 해리를 칭찬하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결 좋은 은발이 사르르 흩어졌다.
‘악마는 머릿결도 좋네. 피부도 엄청 고와 보이는데.’
나는 감탄하며 기계적으로 손을 놀렸다. 영문을 몰라 굳어 있던 해리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금세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해리가 내 손을 밀어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뭐 하는 거야!”
“상 달라면서요? 그래서 칭찬하면서 머리 쓰다듬어 준 거잖아요.”
“그런 건 개한테나 상이지!”
“키우는 개가 예쁜 짓을 했으니 상 달라면서요?”
해리가 새빨간 얼굴로 씩씩대기 시작했다.
“이봐 계약자,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하찮은 취급 받고 그럴 악마가 아니거든!”
“아, 네, 물론 그러시겠죠.”
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잘 알겠으니까 조용히 앉아서 케이크나 먹죠, 해리. 맛이 상당히 좋아요.”
“잘 알긴 뭘 안다는 거냐고?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
해리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접시를 들어 한입에 케이크를 털어 넣은 그가 입가에 크림을 묻힌 채 코웃음을 흘렸다.
“그래. 너한테 뭘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케이크나 더 줘.”
“알겠어요. 시폰 케이크 어때요?”
“……딸기 얹은 걸로.”
해리는 뚱한 얼굴을 하면서도 기호를 확실히 밝힌 뒤 개로 변했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설렁줄을 당겨 엠마를 불렀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방으로 찾아온 엠마는 텅 빈 테이블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다섯 조각이나 있던 케이크가 모두 사라졌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다섯 조각 중 네 개는 해리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엠마는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녀를 비롯한 사용인들의 눈에는 내가 엄청난 대식가일 뿐이었다.
하지만 역시 프로는 프로인지, 엠마는 금세 나의 식성-사실은 해리의 식성이지만-에 적응했다. 그녀가 언제 놀란 얼굴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차분하게 물었다.
“케이크가 더 필요하신가요?”
“응. 시폰 케이크를 가져다줄래? 조각내지 않은 원형으로.”
“예.”
엠마가 빈 접시를 정리하며 빙긋 웃었다.
“주방이 조금 바쁘지만, 아가씨의 케이크라면 모두 기쁜 마음으로 구울 거예요. 차도 더 드릴까요?”
“부탁할게. 그런데 주방이 많이 바빠?”
“곧 많은 손님을 맞이해야 해서 재료 손질이 한창이랍니다. 저희에게는 익숙한 연례행사이니, 아가씨께서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연례행사?”
“예. 검은 숲을 정리하기 위해 왕도에서 기사님들이 오시거든요.”
검은 숲이라면 에렐의 북쪽과 바로 맞닿은 거대한 숲이었다. 내 벽난로에서 타닥거리며 불타고 있는 흑철목이 나는 곳이기도 했다.
“숲을 정리하는데 왕도에서 기사들까지 와야 해?”
“아. 아가씨께서는 에렐 출신이 아니시니 잘 모르시겠네요.”
엠마는 자신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 아가씨께도 그럴 줄 알았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검은 숲에 와이번이 살고 있다는 건 아시죠?”
당연히 모른다. 검은 숲에 와이번이 살고 있다는 건 물론이고, 와이번이 뭔지도 모르는걸. 하지만 엠마가 너무 당연한 상식인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신 해리에게 재빨리 질문을 던졌다.
[해리, 와이번이 뭐예요?]
[와이번? 그게 뭔지 몰라?]
[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요.]
[하긴. 너 왕도에서 왔댔지? 그럼 와이번 보기가 힘들었겠네. 걔들은 깊은 숲속에서 모여 살거든.]
해리가 의외로 착실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내게 오랜만에 제 지식 자랑을 할 수 있어 신이 난 눈치였다.
[일종의 용족 마수인데 성질이 더러워서 길들이기가 힘들어. 육식을 하니까 인간들 입장에선 천적이지. 크고, 힘세고, 하늘까지 날아다니니 이기기 힘들어.]
[해리도 이기기 힘들어요?]
내 질문에 해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 비교할 게 없어서 그런 것 따위에 나를 비교하느냐는 얼굴이었다.
[넌 날 굉장히 우습게 보고 있지만, 나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 악마 테오하리스거든!]
[아. 미안해요. 잠시 잊었어요.]
[아이고, 잠시만 잊은 거면 다행이시죠.]
해리가 입을 비죽이며 소파에 늘어지는 것과 동시에 엠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조금씩 날이 풀릴 때가 되면 와이번들이 낳은 알이 부화하기 시작해요. 갓 부화한 어린 와이번들도 상당히 강한 편인 데다, 성장 속도도 굉장히 빨라서 부화 전에 알을 모두 깨 버려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개체 수가 순식간에 불어나서 감당하기 힘들어져요.”
“……겨우 알을 깨려고 왕도에서 기사들이 온단 말이야?”
“성체 와이번들이 둥지에서 알을 지키고 있어서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저희 에렐의 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라 매년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어요. 와이번들이 북쪽 교역로를 습격하면 왕실에 납품할 물건들도 끊기니, 왕실에서도 저희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고요.”
왕실에서 도움을 준다니.
‘어째 조금 불안한데.’
나는 나의 불안이 기우이기를 바라며 엠마에게 물었다.
“그렇구나. 기사들은 전부 우리 저택에서 지내?”
“예. 하지만 그분들은 별관에서 지내실 테니 아가씨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래도 그분들은 본관에서 머무르시겠네요.”
“그분들?”
“1왕자님과 왕립 기사단장님이요.”
“……1왕자와 왕립 기사단장?”
이브리아를 혐오하는 캐서린의 어장 속 물고기 두 마리였다.
‘왕세자를 쫓아냈더니 이번엔 그 둘이냐?’
멀리서부터 나의 평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왕도에서 출발한 와이번 토벌대가 에렐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일행에 1왕자 리던 제레인트와 왕립 기사단장 엘 로이츠가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만 상대하는 것도 피곤한데 둘씩이나 몰려오다니.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벌써 머리가 아파 왔다.
리던과 이브리아의 사이가 최악이라는 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지만 엘 로이츠와 이브리아의 관계 역시 삐걱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강직한 기사의 전형, 법도와 규칙을 신봉하는 바른 생활 사나이, 귀족 중의 귀족. 모두 엘 로이츠를 수식하는 말이었다. 교과서처럼 반듯한 기사의 눈에 캐서린을 괴롭히기 위해서는 온갖 비겁한 일도 서슴지 않았던 이브리아가 어떻게 보였을까? 심지어 그는 성녀처럼 착하고 바른 캐서린에게 상당한 호감까지 품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거의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못한 인간 말종을 보는 것 같은 태도였던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걸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겉으로 어떠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거다. 엘은 레이디를 수호하는 것이 기사의 의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브리아도 어쨌든 기사가 수호해야 할 레이디였다. 그래서 그는 늘 마음속으로 열심히 이브리아를 경멸했다.
직접적으로 이브리아를 엿 먹였던 다른 물고기들에 비하면 온건한 편이었지만, 어쨌든 사이가 나쁜 건 나쁜 거였다.
‘최대한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말아야지. 어차피 그게 내가 제일 잘하는 거야.’
같은 본관이라고는 하지만, 본관의 규모가 상당하니 행동반경을 최소화하면 그들과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방 안에 처박혀 있으리라 다짐하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