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56)

* * *

응접실에서 만난 왕세자 카시안은 비밀리에 왔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참으로 화려했다. 화사한 금발에 맑은 벽안. 왕자님의 정석 같은 외모였다. 외모만으로도 눈에 띌 법한데 옷마저 하얀색 제복을 입었다. 누가 봐도 높은 사람이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다.

‘이러고 비밀리에 오긴 뭘.’

분명 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정체에 대해 수군거렸을 것이다. 왕국 사람들에게 왕세자의 외모는 유명하니 벌써 그의 에렐행을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먼 길을 오셨네요.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죠?”

“확실히 에렐은 먼 곳이더군요. 왕도에서 이렇게 멀어진 건 처음입니다.”

카시안이 신기하다는 듯 내부를 둘러보았다. 에렐 저택의 응접실은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답게 잘 갖춰져 있었지만, 왕성이나 오베론 성에 비하면 소박한 수준이었다.

“이런 시골에 있다니 꽤 괴롭겠습니다. ‘그’ 이브리아 오베론이.”

원래 이브리아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귀족 문화의 정수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누구라도 지금의 이브리아를 보며 그런 말을 했겠지만, 적어도 카시안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가 양심이라는 게 있는 인간이라면 말이다.

‘이브리아가 에렐에 오게 된 이유는 결국 왕세자잖아?’

이브리아의 악행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가장 개자식이 누구인지를 따지자면 그건 당연히 왕세자였다. 그가 약혼녀에게 충실하기만 했다면 이브리아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계략을 꾸밀 이유도 없었을 것 아닌가?

“생각보다는 괜찮은 곳입니다. 다들 친절하고요.”

“북부 사람들이 친절하다고요? 아, 오베론의 뿌리는 북부이니,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겠군요.”

“그럼 뿌리가 남부이신 전하께선 이 먼 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뻔하지요. 난 그대를 만나러 왔습니다.”

카시안이 웃으며 나를 보았다. 남자 주인공 효과인지, 눈꼬리를 곱게 휘면서 웃는 게 상당히 예뻤다.

‘이브리아가 카시안에게 반한 것도 이 예쁜 미소 때문이었지.’

이브리아는 카시안의 미소에 약했다. 그가 웃으며 구슬릴 때마다 쉽게 그의 말에 넘어갔다.

‘남자에 빠져 이리저리 휘둘리는 악역이라니.’

참으로 전형적인 설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카시안의 미소에 전혀 감흥이 없었다.

‘지금 내가 껍데기는 이브리아지만, 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거든.’

나는 개로 변해 카시안의 옆을 맴돌며 그를 관찰하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역시 얼굴이라면 우리 해리 쪽이 더 잘생겼지.’

내 개가 잘생겼는데, 왜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더욱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카시안에게 물었다.

“절 만나러 오셨다고요? 왜요?”

감흥 없이 되묻는 말에 웃고 있던 카시안의 입매가 미묘하게 굳었다. 하지만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그는 주인공답게 곧 화사한 미소를 회복했다.

“파혼서를 받고 상심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위로라도 해 줄까 싶어서.”

그게 이 사단을 만든 원흉이 할 말인가? 점점 더 어이가 없어졌다.

“딱히 위로는 필요 없어요. 그다지 상심하고 있지 않아서. 파혼이 뭐 별건가요?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죠.”

보수적인 이 세계에서 여성의 파혼은 큰 흠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중간한 집안의 딸일 때 이야기일 뿐이다. 이브리아는 오베론이라는 어마어마한 집안을 등에 업고 있었다. 이 정도 배경을 가진 여성에게 파혼 이력 정도는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애써 괜찮은 척할 필요 없어요, 이브.”

카시안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까닭 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건 참을 수 있었다.

‘갑자기 웬 애칭?’

나는 황당해져 카시안을 보았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이브, 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어요. 그래서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당신과도 약혼했던 거예요.”

“아, 네, 그러셨군요.”

“하지만 캐서린이 나타났고,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어졌죠.”

그 말을 들으며 든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걸 왜 제 앞에서 말씀하시는 건지……? 진정한 사랑을 찾으셨으니 참 잘됐다고 축하라도 드려야 하나요?”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흘리며 물으니 카시안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반색했다.

“그래요, 이브리아. 난 그대가 축하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와 캐서린의 미래를.”

“……네?”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소리람?’

“당신은 기꺼이 날 축복해 줄 거야. 그렇지?”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주인공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건가?’

어이없어 카시안을 쳐다보니 그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인간이 얼마나 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하는 대신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의 아버지가 광산 사업 지원을 철회했어요. 덕분에 내가 아주 곤란해졌거든요. 요즘 내가…… 정말 힘들어요, 이브.”

눈이 절로 가늘어졌다.

‘이제야 알겠네. 이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이러는 이유.’

왕국의 동북쪽에는 개발하지 않은 마정석 광산이 있었다. 막대한 매장량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개발에 필요한 비용과 기술이 만만치 않아 누구도 손대지 못했다. 성공한다면 문제없지만 실패한다면 투자금과 시간만 버리는 꼴이 된다. 누구도 이 위험한 도박에 뛰어들긴 힘들었다.

그런데 왕세자 일파가 이 일대를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마정석 광산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1왕자와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이 사업의 가장 큰 후원자가 오베론 가문이었다.

“당연히 그러셨겠죠. 아버지께서 광산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건 제가 왕실의 일원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잖아요? 이젠 파혼했으니, 헛돈을 쓸 필요가 없죠.”

게다가 피차 기분 좋게 합의한 파혼도 아니었다. 이번 파혼으로 오베론 가문의 자존심이 크게 다쳤으니 사업 지원 철회는 당연했다.

“사업만 성공하면 몇 배의 이익을 챙길 수 있어요. 헛돈을 쓰는 건 아니죠.”

“하지만 성공이 확실하지 않지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아버지와 하시지 그래요? 어차피 결정은 그분께서 하시니까.”

“이미 해 봤어요. 하지만 듣지 않으셨죠. 난 그대가 그분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딸을 아끼시잖아요? 그러니 사교계의 손가락질을 피해 그대를 이곳에 숨겨 두신 거죠.”

‘오베론 공작이 딸을 아낀다고?’

내게 에렐로 가라고 명령하던 공작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다지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끝까지 무겁고 딱딱한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 사실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공작이 정말 딸을 사랑해서 이브리아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치자고.’

왜 내가 다른 여자 어장으로 떠나 버린 물고기를 위해 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건 내 물고기도 아닌데.

“제가 왜 그런 일을 해야 하죠, 전하?”

“왜긴, 당신은 날 아주 좋아하잖아요.”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목을 타고 내려왔다. 예민한 곳을 스치는 손길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카시안이 씩 웃으며 허리를 숙이더니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맑은 벽안에 조금 놀란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날 도와준다면, 이 정도는 해 줄 수도 있어요.”

카시안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왕비는 힘들겠지만, 가까이 두고 당신이 원하는 것 정도는 줄 수 있겠죠.”

서서히 다가오는 카시안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결국 이런 말이지?’

너랑 결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오베론 가문의 힘은 필요하다. 그러니까 네가 원한다면 육체적인 애정은 줄 수 있다. 그래도 넌 승낙할 수밖에 없을걸. 날 좋아하니까.

‘와. 이건 뭐냐 정말?’

이브리아가 캐서린을 질투해 죽이려고 마음먹었을 정도로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거다.

‘완전 쓰레기 같은 생각.’

이딴 게 한 나라의 왕세자라고?

이브리아는 도대체 이놈을 왜 좋아한 걸까?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카시안 제레인트는 왕위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졌다. 상당한 야심가이자 협상가.

‘그런데 이런 비열한 협상까지 잘한다는 건 없었잖아!’

어이가 없어 다가오는 카시안의 얼굴을 밀어내려는데, 나보다 해리가 더 빨랐다.

[이 개자식이! 감히 내 계약자한테 무슨 짓이야?]

“으억!”

카시안이 억눌린 비명과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야, 계약자!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이 개자식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하는데!]

갑작스러운 충격에 상황 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카시안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시나리오는 하나뿐이었다.

[해리가 한 거예요?]

[그래! 내가 했다! 아오, 정말! 너무 열 받아서 나도 모르게 마법이 튀어나와 버렸네!]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나와 바닥을 번갈아 보던 카시안도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날 바닥에 던진 건가? 나를?”

카시안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전 여기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요. 보셨잖아요? 제가 가만히 있는 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맞는 말이었다.

‘일을 친 건 해리지, 내가 아니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저처럼 연약한 여자가 어떻게 전하처럼 건장한 남자를 그렇게 내팽개치겠어요?”

이브리아는 키가 큰 편이지만 체구는 가녀렸다. 누가 봐도 성인 남자를 바닥에 내던질 힘이 없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럼 방금 그건…… 누가 내 머리를 잡아챘는데…….”

카시안이 혼란스럽다는 듯 제 뒤통수를 매만졌다. 분명 머리를 잡혀서 내던져졌는데,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실례했군요.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는 곧 혼란을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나뒹군 꼴이 민망했는지 헛기침도 두어 번 했다.

“그대는 늘 내게 애원했죠. 손을 잡아 달라고, 안아 달라고, 키스해 달라고. 그런 걸 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닙니까? 모두 그대가 간절하게 원하던 것들이잖아요?”

우스운 제안을 하면서도 카시안은 여유로웠다.

‘그동안 카시안을 향했던 이브리아의 애정이 그만큼 대단했던 거겠지.’

이브리아의 일방적이고 간절했던 사랑을 빌미 삼아, 그는 도움을 구걸해야 할 지금 상황에서조차 우위에 선 사람인 양 굴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건 자유지만, 또다시 이렇게 몸을 들이대면 곤란했다.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양 갑질에 취해서 잘난 척하는 것도 거슬리고.’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전하.”

나는 웃으며 카시안을 불렀다.

“제가 그 제안을 기꺼워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대 입장에선 괜찮은 거래 아닌가요? 예전에도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입맞춤을 요구했잖아요.”

‘그랬냐, 이브리아!’

웃고 있던 얼굴에 금이 갔다. 소설에서는 이브리아의 이야기가 많이 풀리지 않았다. 늘 캐서린을 괴롭히는 사건에만 모습을 드러내니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래도 이건 중요한 사건이잖아. 소설에서 보여 줬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그렇게 분노했다가 금세 깨달았다. 지금 내 입장에서야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지만, 작가나 독자에게는 겨우 악역 조연의 구구절절한 사연일 뿐이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주인공의 이야기다. 정해진 분량이 있고, 그 안에 모든 이야기를 완결 짓기 위해서는 중심에서 멀어진 곁가지들을 효과적으로 쳐 내야만 했다. 이브리아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말하자면 그런 곁가지였다.

‘그래. 처음부터 알았어. 곁가지 인생이란 말이지.’

이제야 카시안이 어이없는 제안을 하면서도 당당했던 이유를 제대로 알겠다. 예전에도 비슷한 거래를 한 적이 있으니 이렇게 당당하게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일은 그때 일이고요.’

지금도 그때랑 상황이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자기가 바람나서 파혼까지 한 마당에?

진짜 이브리아가 이 남자에게 얼마나 쩔쩔매며 매달렸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약혼을 한 사이에, 왕세자의 왕위 계승에 큰 힘을 보태고 있으면서도 이브리아는 이 남자의 애정을 얻기 위해 늘 전전긍긍했다.

나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카시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상황 파악하는 눈치도, 사람을 보는 눈도 없다. 자신을 향한 애정을 감사히 여기는 선량함? 그것도 당연히 없었다.

저런 게 미래의 왕이라니.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라니.

‘이 나라의 미래 괜찮은 건가? 이 소설 괜찮은 거 맞아?’

“이브.”

카시안이 왕국 사람들과 소설의 독자들을 향해 마음속 깊이 애도를 표하고 있던 나를 불렀다.

“애초에 우리의 약혼은 거래였잖아요. 난 당신의 남편이 되고, 당신은 내게 힘을 주는 그런 거래. 그때와 비슷해요. 그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달라졌을 뿐이죠.”

“그렇군요.”

“그래요, 그러니까……”

“거절할게요.”

“뭐라고요?”

“거절한다고요, 그 거래.”

“어째서죠?”

“대가가 제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으니까?”

카시안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이 거래를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내 의중을 살피려는 듯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보다, 곧 상황을 알겠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거래하는 기술이 늘었군요. 다른 걸 더 원하나요? 정부라도 되고 싶은 겁니까?”

“아뇨.”

“그렇다면 여전히 내 아내가 되고 싶은 거로군요. 그건 줄 수 없다고 했을 텐데요.”

“잘됐네요. 저도 바라지 않거든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럼 결국 그대가 바라는 건 뭐죠?”

“간단해요. 전하께서 이대로 뒤돌아서서,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 그대로 왕도까지 가시는 거죠. 그리고 저와 영원히 보지 않는 거예요! 와, 어렵지 않죠?”

유치원생을 가르치는 듯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였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까지 쉽고 친절하게 말했는데도 내 말을 못 알아먹으면 얘는 머저리다, 머저리.

“그냥 돌아가라고요?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와. 드디어 제 뜻을 알아차리셨네요.”

‘다행히 머저리는 아니었나 보네.’

나는 반가움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렇다면 어서 제 말대로 해 주시겠어요? 돌아서서, 걷고, 왕도까지.”

하지만 카시안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그는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몇 번이나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뗐다.

“왜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것도 간단해요. 거래는 그런 거잖아요? 제가 원하는 걸 전하께서 가지고 있고, 전하께서 원하는 걸 제가 가지고 있으면, 서로가 기쁜 마음으로 그걸 교환하는 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하께서 제게 주신다는 그게 제 마음에 차지 않네요.”

“하지만…… 그대는 나를 좋아하잖습니까? 늘 그대를 봐 달라고 매달렸고요.”

“네, 옛날의 전 그랬죠. 이젠 아니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렇게 쉽게 변할 수가…….”

카시안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자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뭐?”

“전하께서도 쉽게 변하셨어요. 한순간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잖아요?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예요. 누군가를 한순간에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거요. 사람의 마음은 원래 그렇게 변한답니다. 불변의 것이 아니에요.”

“그런…….”

카시안은 대단히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브리아 오베론이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다.

‘뭐, 내가 이브리아가 되지 않았다면, 그게 진실이기도 했겠지.’

이브리아는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캐릭터이니까.

‘하지만 어째? 나는 그 이브리아가 아닌걸.’

“그래서 거래는 불가능해요. 전하께서는 제가 원하는 걸 주실 수 없거든요. 그건 이미 제가 다 가지고 있어서.”

내가 원하는 건 호의호식이다. 공작가의 딸인 이브리아는 이미 그걸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 이 세계의 누구도 나와 거래를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제가 가진 걸 원하신다면 구걸을 하셔야죠.”

“……구걸?”

“그렇잖아요? 전하께선 제가 가진 걸 원하시는데, 제가 만족할 만한 대가는 줄 수 없죠. 그렇다면 제 인정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들은 그런 걸 구걸이라고 한답니다.”

비웃음을 담아 픽 웃자 카시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고귀하신 왕세자 전하께선 그런 너절한 짓을 하지 않으시겠죠.”

그는 어렸을 때 왕세자가 된 후 주변에서 찬양만 받고 살았다.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레이디 오베론. 왕족을 모욕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습니까?”

“왜요? 절 왕족 모독죄로 고발이라도 하시려고요? 그랬다가는 정말 오베론 가와 등을 돌리는 건데…… 하실 수 있겠어요?”

당연히 못 한다. 카시안 일파는 오베론 공작가의 힘이 꼭 필요한 상황이니 우리 쪽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게다가 증인도 없잖아요? 아무리 왕족이어도 오베론 공작가의 사람을 증거도 없이 고발하실 순 없어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겠답시고 사람을 모두 물린 상황이었다. 문밖에는 카시안을 호위해 온 기사 두 명이 서 있었지만, 어차피 안쪽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아.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구걸이라도 해 보실래요? 혹시 아나요? 제 마음이 바뀌게 될지. 사람의 마음은 원래 그렇게 바뀌는 거잖아요.”

바람이 나서 캐서린으로 갈아탄 카시안의 지난 행적을 묘하게 엮어 내리는 화법이었다. 정말 멍청한 사람이었다면 그것도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시안은 그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다. 숨은 뜻을 알아챈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오늘은 대화하기 좋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네. 멀리 배웅하지는 않겠습니다.”

가볍게 치마를 들어 올리며 인사하자 카시안이 입을 꾹 다물고 뒤돌아섰다. 화가 난 카시안이 거칠게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위엄에 찬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해리.]

나는 카시안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해리를 불렀다. 그러자 해리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소리쳤다.

[역시 저 자식 죽이려는 거지? 그런 거지? 어떻게 죽여 줄까?]

[해리는 어떻게 된 게 자나 깨나 뭘 죽일 생각뿐이에요?]

[난 악마니까, 그런 생각만 하는 게 제대로 된 건데?]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그냥 쟤 죽이자. 말하는 게 너무 짜증 나고 귀찮잖아. 응?]

[쟤가 귀찮기는 한데, 쟬 죽이면 더 귀찮은 일이 생겨요. 그러니까 그냥 발이나 걸어 줘요. 아주 거하게 바닥이나 구르게.]

[겨우 그 정도로 되겠어? 죽여서 피를 보는 게……]

[해리, 역시 내 소원은 해리가 하루 종일 벽을……]

[와악! 걸어! 건다고! 확 넘어뜨려!]

해리가 비명을 지르며 내 말을 막더니, 순식간에 힘을 썼다. 반투명한 빛 덩이가 카시안의 뒤로 다가가 그의 무릎 뒤쪽에 강하게 부딪혔다. 어찌나 강하게 부딪쳤는지 카시안의 무릎이 꺾이는 게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억!”

카시안이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바닥 앞으로 엎어졌다. 요란하게 넘어진 탓에 그를 기다리던 기사들은 물론이고, 내가 나오길 기다리던 엠마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할 말을 잊고 입만 떡 벌렸다.

그건 카시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바닥에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저, 전하…….”

기사 중 한 명이 황망하게 카시안을 부르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면서도 그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새하얀 옷은 잔뜩 구겨져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와 달리 어딘가 행색이 초라해 보였다.

“어머, 전하!”

나는 일부러 과장스럽게 목소리를 높이며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요즘 힘든 일이 많으신가 봐요. 안에서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시더니 여기서도 또…….”

나는 그가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하체가 부실하시니 여러모로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왕도에 돌아가시거든 몸에 좋은 약이라도 지어 드세요. 하체에 좋은 걸로요.”

[……야. 너 말투는 걱정하는 척하면서 묘하게 더 타격을 주고 있잖아. 사내놈들이 하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방금 전까지 카시안을 죽이자며 신나게 떠들던 해리마저 숙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숙연한 눈으로 카시안을, 정확히는 그의 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힘내세요, 전하. 하체가 부실하다고 세상이 끝난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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