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56)

2장. 반갑지 않은 손님

사람들이 친절해졌다.

원래 북방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아 친해지기 어렵다고 했는데. 북쪽에서도 가장 끄트머리에 사는 에렐 사람 모두가 눈에 띌 정도로 내게 살갑게 굴고 있었다. 나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는 엠마는 물론이고,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집사며 저택의 하인들까지. 모두 나를 볼 때마다 친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두 해리의 불꽃 덕분이었다. 내가 구빈원에 직접 불을 나눠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작은 얼마 후 금지령을 풀고 마을 전역에 불을 나눠 주었다. 하지만 영지 밖으로는 불을 가져갈 수 없도록 철저하게 감시했다. 감시 범위가 저택에서 영지 전체로 늘어난 것이다. 덕분에 영지 외곽을 지키는 기사단의 일이 배로 늘어났다.

‘왜 그렇게까지 감시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흑철목을 태우는 불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재산이라 에렐 내에서만 사용하려는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영지 내에 불이 퍼진 덕에 나는 의도치 않은 친절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도무지 발전이 없던 집사와의 대화까지 떠올리자 낯간지러움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에렐의 추위를 가엾게 여기신 아가씨의 은덕입니다.

-집사, 난 에렐을 위해서 불을 피운 게 아냐. 그냥 내가 추웠을 뿐이라고.

-예. 이미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전 아가씨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아니. 전혀 모르고 있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잘 압니다. 흑철목을 태우는 불이 어디 보통 불입니까? 제 한 몸 녹이고자 하는 옹졸한 마음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불이지요.

-아냐. 나 옹졸해. 내가 관심 있는 건 내 한 몸뿐이라고. 정말이라니까!

-세상에. 끝까지 이렇게 겸손하시다니. 이런 분이기에 이렇게 대단한 불을 얻을 수 있으셨겠지요. 과연 자애로우십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엄청나게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고, 그 집사.

-아니……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아련한 미소 짓지 마…….

몇 번이나 비슷한 대화가 이어졌지만 이미 굳은 믿음을 가진 집사의 생각을 바꾸는 건 쉽지 않았다.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내가 두 손을 들었고, 그 결과 집사의 입을 통해 내가 갖고 있지도 않은 ‘아가씨의 깊은 에렐 사랑’이 영지 곳곳에 퍼졌다.

‘덕분에 다들 친절해져서 지내기는 처음보다 훨씬 편해졌지.’

이상한 오해를 받고 말았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제 한 몸 건사하기 바쁜 내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사라질 오해였다. 사교계에 퍼진 악명도 해명하기 귀찮아 내버려 둔 내게 이런 오해를 바로잡을 기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집사에게 몇 번이나 아니라고 말한 걸로 내 몫은 다했어.’

나중에 오해가 밝혀져 왜 그때 제대로 말하지 않았냐고 내 목을 흔들면 당당하게 말해 줄 수도 있다. 그러게 내가 그때 아니라고 했잖아-라고.

‘그러니까 지금은 맛있는 거나 먹자.’

사실 북방은 식문화가 그리 발전한 지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실용적이고 간편한 걸 추구했다. 음식의 밸런스니, 식감이니, 색감이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음식이라는 건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게 평범한 북방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처음 에렐에 왔을 때 식탁에 올라온 투박한 요리들을 보며 얼마나 좌절했던지.’

그래도 생긴 거와 달리 맛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맛은 생긴 것보다 더 형편없었다. 배가 고프니 억지로 입에 밀어 넣긴 했지만, 맛이 없으니 죽지 않을 정도로만 조금씩 먹었다.

식사량이 줄어들자 체중도 줄었다. 에렐에 오며 가져온 드레스가 조금 헐렁할 정도였다. 이 사정을 알면서도 주방장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들의 영지에 짐처럼 떠맡겨진 까탈스러운 왕도 아가씨의 사정까지 챙기며 일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씨를 나눠 준 이후 내게 극도로 친절해진 주방장은, 미식이 발전한 왕도에서 온 아가씨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요리에 힘썼다. 그 결과가 눈앞의 식탁이었다.

나는 감격에 차 식탁을 바라보았다. 공간이 모자랄 만큼 가득 찬 요리들로부터 좋은 냄새가 올라왔다. 윤기가 흐르는 칠면조 구이에 갓 구운 빵, 신선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따뜻한 버섯 스프. 왕도에서 먹던 음식 그대로였다.

하지만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벌써 접시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은 게 분명한 해리 때문이었다.

“해리, 내가 스푼을 들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줄 순 없는 거예요?”

“네가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계속 개로 변해 있는 게 얼마나 체력 소모가 심한지 알아? 변신술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힘들단 말이야.”

해리가 칠면조 구이를 뜯어 먹으며 투덜거렸다. 겨우 두어 번 씹었을 뿐인데 어느새 칠면조 뼈만 덩그러니 남았다. 묘기 같은 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해리는 먹는 속도도, 양도 남달랐다.

“자기 먹으라고 하녀들이 준 사료는 먹지도 않으면서.”

“너 같으면 개 사료를 먹고 싶겠냐? 악마의 존엄성을 좀 생각해 줄래?”

“그건 이해하지만, 어쨌든 너무 많이 먹는다고요!”

평범한 성인 남성이 얼마나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리가 남다르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이 먹는 게 평범하다면 이 세상의 식량이란 식량은 벌써 씨가 말라 버렸을 테니까.

그런 대식가가 내 식사를 뺏어 먹는 걸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해리는 배가 고파질 때마다 몰래 주방으로 가 음식을 먹었다. 덕분에 요즘 주방에서는 음식을 먹어 치우는 유령에 대한 괴담이 퍼지고 있다고 했다.

‘아니, 그렇게 먹고 있으면서 내 식사까지 탐내는 이유가 뭐야?’

해리가 내 요리를 뺏어 먹는 바람에 식사 중에는 하녀의 시중도 받을 수 없었다. 개가 사람으로 변해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꼴을 봤다간 다들 기절해 버릴 테니, 식사는 하녀를 모두 내보낸 채 혼자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내가 대식가라는 말도 안 되는 오해까지 샀다. 깨끗하게 비운 접시들을 보며 ‘이거 분명 5인분은 되지 않았어?’ 하고 놀라던 하녀들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거 분명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고.’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어차피 남기잖아. 음식은 버리는 거 아니야.”

“그럼 내가 식사를 마치면 먹어요.”

“혼자 식사하면 쓸쓸할 텐데.”

“날 위하는 척 핑계는. 그냥 해리가 먹고 싶을 뿐이잖아요.”

“쳇, 안 통하는군.”

해리가 투덜거리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내 냅킨을 제 것처럼 가져가 손을 닦은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게 다 욕구불만이어서 그렇다고. 욕구 해소를 못 하니까, 먹는 걸로라도 해결해 보려는 거잖아.”

해리가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진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넌 내가 마음껏 내 욕구를 표출하면 좋겠어?”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은근한 손길에 나는 아주 황당해졌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뭐가 욕구불만이에요? 도대체 무슨 욕구가 쌓이기에?”

기본적으로 해리는 제멋대로였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하고 싶은 행동은 다 해야 직성이 풀렸다. 악마는 전부 다 이런 걸까? 내가 ‘소원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았다.

‘말 안 듣는 개를 보는 것 같달까?’

해리의 영혼수가 개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최후의 순간 그를 통제할 목줄이 내 손에 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몰라서 물어? 난 피가 보고 싶다고! 살인욕은 악마의 기본적인 욕구란 말이야. 인간의 식욕과 비슷해.”

“식욕과 비슷하다고요? 그럼 오랫동안 참으면 죽기도 해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어쨌거나 나 때문에 불려온 녀석인데,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지 못해서 죽어 버린다면 죄책감이 대단할 것이다.

놀란 내 얼굴에 마음이 조금 풀린 건지 해리가 조금 가라앉은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죽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괴로워.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에이, 난 또 뭐라고. 죽는 게 아니라면 됐잖아요.”

“죽지만 않으면 다야? 너도 맛없는 음식 먹을 땐 이게 사는 건가 싶었다며? 나도 그렇다고. 피를 보지 않으면 이렇게 사는 게 사는 건가 싶어진단 말이야.”

“으음.”

그렇게 비교하니 해리의 기분이 한 번에 와닿았다.

‘맛없는 음식으로 연명할 때는, 그래, 사는 게 너무 재미없고 모든 게 다 짜증 났지. 맞아.’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돼요. 그건 범죄라고요.”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다른 방법으로 욕구를 해소하려고 노력 중이잖아. 사람 못 죽이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먹는 것까지 뭐라고 할 셈이야?”

“먹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주방에서도 음식이 없어졌다고 난리고, 나도 혼자서 5인분을 비우는 괴물 같은 대식가가 되어버렸다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쾌락을 채우는 거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해리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참이나 나를 보던 그가 말했다.

“너 같은 부스러기랑은 좀 힘들지.”

“왜 힘들어요? 나도 다 할 수 있어요. 조금 힘들어도 5인분이나 먹는 대식가라는 오해를 받는 것보단 낫겠죠.”

식탁을 치울 때마다 경악에 찬 하녀들의 얼굴을 보는 게 어찌나 민망한지.

“그러니까 말해 봐요. 무슨 방법을 쓰면 해리가 말하는 쾌락이니 욕구니 하는 그걸 채울 수 있는데요?”

다른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할 생각으로 해리를 올려다보자, 어쩐지 그의 얼굴이 상기됐다.

“아, 됐어. 역시 너는 안 되겠어. 그, 그냥 칠면조 구이나 먹을래.”

“왜요? 다른 방법이 뭔데요? 그냥 그걸로 해요.”

해리의 옷을 잡아당기자 그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뿌리쳤다.

“그, 그게 뭔 줄 알고 이래? 됐다니까. 너랑은 못 하겠어. 안 할래.”

“도대체 그게 뭔데 그래요?”

“아직 열여덟도 안 된 부스러기는 몰라도 돼!”

“그쪽은 2천 살 넘은 할아버지라서 참 좋으시겠어요. 이럴 때 나이 핑계 대면서 넘어갈 수도 있고.”

“나 할아버지 아니라니까!”

해리의 외침과 동시에 밖에서 나를 부르는 엠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엠마입니다.”

“엠마?”

식탁을 치우는 건 엠마보다 급이 낮은 아이들의 몫이었다.

‘그러니 식탁을 치우고자 온 건 아닐 테고.’

나는 여전히 발을 구르는 해리를 진정시키며 의아한 마음으로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해리는 엠마의 기척이 느껴질 때 이미 개로 변한 뒤였다.

“들어와. 무슨 일이야?”

깊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선 엠마는 조금 곤란한 얼굴이었다.

“아가씨를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이브리아도 공작의 딸이니 인맥은 넓었다. 추종자라며 따르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렇지만…….’

“나를 찾아서 여기까지 올 손님은 없는데. 따로 기별도 없었고.”

“예.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할 것 같아 비밀리에 오셨다고 합니다.”

“비밀리에? 누가 왔는데?”

“그것이…… 왕세자 전하십니다.”

왕세자라니.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왕세자가 에렐로 떠난 이브리아를 찾아오는 사건이 있었던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볼 필요도 없었다. 원작의 모든 서사는 캐서린을 중심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이브리아는 오로지 그녀를 괴롭히는 장애물로서만 등장했다. 당연하게도, 악역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에렐이라는 시골로 쫓겨난 악역의 이야기는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귀찮은 일만 아니면 좋겠는데.’

그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일부러 파혼까지 선언했다. 그가 원하는 대로 파혼까지 한 마당에 더 원하는 게 뭐가 있어 에렐까지 찾아왔을까?

“어디에 모셨니?”

“우선은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비밀이라고 강조하셔서, 주변의 사람을 물렸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비밀이라는 걸 이렇게 강조하는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어. 그쪽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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