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56)

* * *

기사의 이름은 라이오넬 딜프였다. 오베론 가문의 서리 기사단, 그중에서도 북부에 배치된 제5기사단의 막내라고 했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우리를 호위했다. 누가 봐도 열심히 하는 게 티가 날 정도였다. 문제는 정말 열심히‘만’ 한다는 거였다.

[쟤 뭐 하냐?]

내 옆을 따르던 해리가 라이오넬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온몸이 빈틈투성인데? 이래서는 널 지키기는커녕 네가 쟬 지켜 주게 생겼다.]

검술을 모르는 내가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고, 멀쩡하게 허리에 걸려 있던 검을 떨어뜨리고…….

[인간을 종이로 만들어도 저것보단 튼튼하겠어.]

해리의 신랄한 평가와 함께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좁고 어두운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작은 규모의 구빈원이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입니다.”

엠마가 멋쩍게 웃으며 내 손에 든 램프를 바라보았다.

“어른이라면 어떻게든 추위를 견딜 수 있지만, 여긴 아이들뿐이라 걱정이 되어서…….”

엠마가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좁은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게도 벽난로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언니?”

빛과 함께 어둠 속으로 들어선 엠마의 모습에 여자아이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얇은 천 조각을 두르고 있었다.

‘아마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길고 추운 밤을 견디려고 했겠지.’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엠마가 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이곳에 있는 누군가는 얼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애들은 아주 약하니까.

“언니다!”

“누나!”

한 아이의 외침이 다른 아이들에게로 번졌다. 허름한 차림의 아이들이 우르르 엠마 앞으로 몰려들었다. 엠마는 다정하게 아이들을 토닥였다.

“많이 추웠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불 피워 줄게.”

“불 못 피워. 땔감 없어.”

아이의 핀잔에 엠마가 흑철목을 들어 보였다.

“땔감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영지 내에 흑철목이 넘쳐 난다는 건 사실이었는지, 여기까지 오는 길에 주운 것이 벌써 엠마의 품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걸 본 아이들은 코웃음을 쳤다.

“에이, 그거 흑철목이잖아. 불에 안 타는 거.”

“아냐. 이걸 태울 수 있는 불을 가져왔으니까, 나만 믿어.”

엠마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벽난로로 다가갔다. 그녀가 오는 길에 주워 온 흑철목을 벽난로에 채워 넣는 동안 아이들의 관심이 나와 해리, 라이오넬에게 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끈 건 해리였다.

“와, 개다!”

“멍멍이!”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해리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을 껴안고, 쓰다듬고, 뽀뽀하는 아이들을 보며 해리가 소리쳤다.

[아, 뭐야! 이것들 뭐야! 숨 막혀!]

라이오넬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쩔쩔매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뭐예요? 칼인가?”

“마, 마, 만지면 안 돼! 위험해!”

“형은 왜 위험한 걸 가지고 다녀요?”

“나는 기사니까 괜찮아.”

“에이. 거짓말. 기사님들은 이렇게 안 생겼어요!”

“……너희가 보기에도 내가 기사답지 않니?”

하지만 아이들에게 파묻힌 두 사람과 달리 나는 아주 자유로웠다. 내 주변만 동그랗게, 누가 금이라도 그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내 악역 얼굴이 무서워서 가까이 못 오는 거겠지.’

내가 램프를 들고 벽난로를 향해 걷자 앞을 막고 있던 아이들이 상기한 얼굴로 길을 터 주었다.

일이 터진 건 그때였다.

“꺅!”

서둘러 나를 피하던 소녀가 발이 꼬여 앞으로 넘어진 것이다.

그냥 넘어지기만 했다면 작은 사건으로 그쳤겠지만, 넘어지면서 내 손의 램프를 친 게 문제였다. 소녀의 손에 맞은 램프는 공중으로 붕 떠올라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미약하게 초 위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은 공중에서 이미 맥없이 꺼져버린 뒤였다.

벽난로를 열심히 채우던 엠마의 행동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이…… 신비한 불이…….”

고장 난 것처럼 ‘불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엠마를 보며 넘어진 소녀가 울상이 되었다. 돌아가는 사정은 정확히 몰라도, 자신이 뭔가 사고를 쳤다는 것은 느낀 모양이었다.

“어떡해요, 아가씨? 저택에서 겨우 가지고 나온 불인데…… 저게 어떤 불인데…….”

엠마가 벽난로 앞에 주저앉았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불이…… 저게 있어야 애들이 따뜻한데…… 흑.”

“어, 언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넘어진 소녀가 재빨리 일어나 울고 있는 엠마를 토닥였다. 오히려 그게 엠마의 눈물을 더 키웠다. 그녀는 소녀를 끌어안고 아예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엠마의 울음이 아이들에게 전염되었다. 처음에는 엠마가 안고 있던 소녀가, 그다음에는 그 옆에 있던 소년이, 그다음에는 또 그 옆에 있던 소녀가…….

이런 식으로 번진 울음이 구빈원을 가득 채웠다. 열 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이 동시에 통곡하는 진풍경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미치겠네. 오늘 왜 이렇게 우는 사람을 많이 만나지? 오늘은 꼼짝없이 보모가 될 운명인가?’

나는 볼을 긁적이며 가장 큰 소리로 목 놓아 울고 있는 엠마 앞에 섰다. 울음을 번지게 한 원흉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울지 마. 네가 우니까 애들도 울잖아.”

“하지만, 불이, 애들이, 얼어 죽을, 흑!”

도무지 울음을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이 시끄러운 상황을 끝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나는 눈짓으로 해리를 불렀다. 아이들에게서 겨우 빠져나와 만신창이가 된 해리가 비틀거리며 내 옆에 섰다. 나는 몸을 굽혀 해리의 털을 정리해 주며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 흑철목이 가득했다.

[해리, 불이 필요해요. 그때처럼.]

[보는 눈이 많은데? 저택의 그 불, 우연히 만들어 낸 걸로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랬죠. 그런데…….]

나는 천천히 울고 있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비쩍 말라서는 얇은 천으로 만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아이들. 엠마의 판단이 옳았다. 따뜻한 불이 없다면, 아이들은 밤의 추위기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못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봤으니 안 도와줄 수는 없잖아요. 나도 사람인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일부러 나서서 착한 일을 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봉사 활동이나 기부? 그런 거 할 정신이 어딨어? 내가 먹고살기도 바빴다고.’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버리면, 그걸 외면할 정도로 모질지도 못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

나 역시 그런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해리, 불이 필요해요.]

[뭐, 나야 내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해리가 어쩐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고, 동시에 벽난로에 불이 솟아올랐다.

“와악!”

솟아오른 불길에 심약한 라이오넬이 비명과 함께 제자리에 주저앉았고, 울고 있던 엠마는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잦아들었다. 타오르는 흑철목에 내부 공기가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누나, 마법사예요?”

타오르는 벽난로를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뒤 엠마를 바라보았다.

“엠마, 기억하지? 저택에서 했던 약속.”

엠마가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확인차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보고 들은 것은?”

“전부 잊어야 합니다.”

정답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그만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네. 엠마는 아이들을 좀 더 진정시킨 뒤에 돌아와.”

내 말에 엠마가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저도 아가씨를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엠마, 입은 너 말고 아이들에게도 있잖아.”

아이들의 입단속도 제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엠마가 눈치 빠르게 내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확실히 단속하겠습니다.”

나는 엠마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여전히 놀란 얼굴로 퍼져 있는 라이오넬에게 손짓했다.

“경은 나와 같이 돌아가죠.”

“예, 아가씨!”

라이오넬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주저앉았던 자리에 자신의 검을 떨어뜨린 채로.

‘이 사람, 기사로서 괜찮은 거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해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자, 쟤 그냥 버리고 가면 안 될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터질 것 같은데.]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라이오넬은 계속 허둥댔다.

구빈원으로 향할 때보다 허둥거림이 두 배는 더 심해진 상태였다. 내가 흑철목을 태운 걸 보고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아이들의 입단속은 엠마에게 맡겼으니, 이쪽의 입단속은 내 몫이었다.

“라이오넬 경.”

“예, 아가씨.”

“오늘 보고 들은 건…….”

내가 은근히 말끝을 흐리자 라이오넬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그가 잔뜩 긴장한 채 비장하게 말했다.

“오늘 보고 들은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만약 어디선가 오늘 일이 들려오면 경이 발설한 거라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받아 갈 거예요.”

말도 안 되는 협박이었지만 이 심약한 엑스트라 기사에게는 꽤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히이익!”

라이오넬이 하얗게 질려서 숨을 삼켰다. ‘역시 그 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빤히 보였다.

“절대로 말 안 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좋아요. 믿을게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라이오넬을 보며 나는 그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런데 저 뒤에 떨어진 검, 어디서 많이 보던 거 아니에요? 엄청 익숙한데.”

라이오넬의 검이었다. 내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라이오넬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렇군요. 제 검과 정말 비슷합니다. 이게 길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흔한 검은 아닌…… 어라? 혹시 저게 내 검인가?”

라이오넬이 허리춤을 더듬거리며 허둥대기 시작하자, 해리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자,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얘 버리자.]

* * *

엠마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브리아 오베론. 엠마가 지겹도록 들어 온 이름이었다.

에렐은 오베론 공작령이라 사용인들 사이에서 본가에 대한 소문이 많이 돌았다. 그중에서도 이브리아에 대한 소문이 가장 많았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가장 자극적이기 때문이었다. 힘든 일을 견디며 속닥거리기에는 자극적인 소문이 제격 아닌가? 이랬다더라, 저랬다더라. 막장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속닥거리고 있으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이브리아를 수식하는 말은 아주 많았다. 대부분은 부정적인 말이었다. 왕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마녀. 오베론 가문의 망나니. 공작도 포기한 문제아.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에다, 오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브리아의 직속 하녀가 되라고 했을 때 절망했다. 자기가 부리는 하녀가 말실수를 했다고 혀를 잘라 버렸다는데, 그런 무도한 사람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남작이 시급을 두 배로 올려 준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냥 하녀 일을 그만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직접 만난 이브리아는 소문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귀한 불을 훔치려고 했는데.’

엠마를 벌주기는커녕, 직접 저택 밖으로 나와 불을 나눠 주었다. 엠마는 이브리아가 피운 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따뜻한 온기에 얼어붙은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언니.”

생각에 잠긴 엠마 옆으로 소녀 하나가 다가왔다. 넘어지면서 램프를 건드렸던 그 아이였다.

“아까 그분은 누구셔?”

조심스러운 질문에 엠마가 웃었다.

“내가 모시는 분이야. 오늘 너희에게 큰 은혜를 주신 분이기도 하고.”

“그럼 좋은 사람이야?”

소녀의 질문에 엠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문 속의 이브리아는 좋은 사람과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의 과거 행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엠마가 본 이브리아는 달랐다.

“응. 좋은 분이셔.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음…… 우릴 따뜻하게 해 줬으니까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렇지?”

“응. 그리고 엄청 예뻤어.”

소녀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봐. 조금 무섭게 생겼지만, 엄청 예뻐.”

“맞아. 우리 아가씨 엄청 예쁘셔. 조금 무섭게 생기셨지만 말이야.”

엠마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어느새 그녀는 이브리아를 ‘우리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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