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56)

* * *

저택을 나서면서도 엠마는 영 불안한 눈치였다.

“정말 이렇게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남작님께서 절대 안 된다고 하셨는데…….”

“엠마, 불 가져가겠다고 먼저 내 응접실에 숨어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조금 은밀하게 들어간 것뿐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숨어들었다고 하고 말이지.”

“그건 또 그렇지만…….”

엠마가 우물거리는 사이 저택의 입구에 다다랐다. 남작의 지시 이후 경비가 삼엄해졌는지 정복을 입은 기사 하나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엠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시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가 내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렇겠지. 남작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니.”

“불을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는 절대 안 내보내 줄 겁니다.”

“그럼 엠마는 어떻게 나가려고 했는데?”

내 질문에 엠마가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 사용인들끼리만 아는 개구멍이 있어서…….”

“개구멍이라. 별로 끌리진 않네.”

저렇게 크고 편안한 문을 두고 내가 왜 개구멍을 쓴단 말인가? 나는 당당하게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아, 아가씨!”

엠마가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내 뒤로 따라붙었다.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밖으로 나가야지.”

“입구는 기사님이 지키고 계시잖습니까?”

“그러네. 나도 잘 보여.”

“그걸 다 보셨으면서 이렇게 당당하게 가시면…….”

“무슨 일이지?”

엠마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는 그때.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속닥거리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기사치고는 되게 흐릿한 인상이네.’

검이나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약한 인상이었다.

‘전형적인 엑스트라 상이군.’

나는 바짝 얼어붙어 내 눈치를 살피는 엠마를 뒤로하고, 태연하게 기사에게 인사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네요.”

“……아가씨?”

뒤늦게 내 정체를 확인한 기사가 놀란 얼굴로 인사했다. 내 얼굴만 보고도 화들짝 놀라는 것이 내 악명을 익히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대충 인사를 받아 준 뒤 턱짓으로 대문을 가리켰다.

“산책을 나가야겠으니 문 열어 줘요.”

“산책을요? 이 밤에?”

“네. 산책을요. 이 밤에.”

단호한 대답에 기사가 얼빠진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휘영청 뜬 달이 선명할 정도로 깊은 밤이었다. 누가 봐도 산책에 어울리는 시간이 아닌 건 확실했다.

“이 녀석이 산책을 나가자고 보채서 말이에요. 아, 소문은 들었죠? 내가 기르는 개.”

그제야 하늘을 바라보던 기사의 시선이 발치로 향했다. 집사가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해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저택 내에서 수소문했다. 기사 역시 해리에 대해서 당연히 알고 있을 터였다.

“멍!”

기사의 시선이 제게 닿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해리가 우렁차게 짖었다.

‘몇 번을 들어도 영락없는 개라니까.’

해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 대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었다.

“보다시피 이 녀석이 계속 보채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있어야죠.”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제게 맡기시면 대신 산책을 시키고 돌아오겠습니다.”

기사가 그렇게 말하며 해리를 데려가려는 듯 손을 뻗었다. 물론 해리는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컹!”

해리가 뻗어 오는 손을 금방이라도 물어 버릴 듯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기사가 놀라서 손을 뺐다.

“해리, 그러면 안 되지.”

나는 괜히 엄한 척 해리를 나무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의 사나운 기세는 어디 갔는지 얌전하게 내 손길을 받는 해리를 보며 기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녀석이 그새 주인을 정했나 봐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전혀 따르질 않아서……. 경에게 산책을 맡기긴 힘들겠어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밤이 너무 늦어 밖으로 나가시기에는 위험하고, 또 남작님께서 누구도 불을 가지고 나갈 수 없다 명하셔서…….”

“그래서 나갈 수 없다?”

“예. 그렇습니다.”

기사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상당히 심약해 보이는데, 의외로 강단이 있었다.

‘어쩔 수 없네.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나는 악역의 필살기를 쓰기 위해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었다. 뚱한 얼굴로 팔짱을 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기에다 인상까지 팍 쓰자 그렇지 않아도 유약해 보이던 기사가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봐요, 경. 지금 내 앞길을 막는 거예요? 나 이브리아 오베론인데?”

“아, 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아가씨의 앞길을 막겠습니까!”

“그럼 당장 내 앞에서 비키면 되겠네.”

“그, 그, 그런데 제가 또 비켜 드릴 수는 없는데…….”

“막겠다는 거예요, 비키겠다는 거예요? 네?”

“히익!”

눈을 부릅뜨고 이를 바드득 갈자 기사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새하얗게 질렸다.

“비, 비, 비, 비켜 드릴 테니 제발 손가락은 자르지 말아 주십시오! 기사로서의 제 미래가!”

“손가락?”

협박이 제대로 먹히기는 한 것 같은데, 그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난 손가락 자른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데?’

이 무슨 창조 협박이란 말인가?

얼떨떨하게 선 내게 엠마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가씨께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 박제해 둔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잘린 손가락 따위를 박제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저는 손가락을 박제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나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예? 해 본 적 없으세요?”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 소문이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눈치였다.

“……내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는 확실히 알겠네.”

원래 소문이라는 게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질수록 부풀려지는 법이었다. 수도가 있는 남부에서 이곳, 북부의 에렐까지.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쳐 소문이 과장되었을까?

‘손가락을 잘라서 구워 먹는다는 소문이 아닌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난 손가락에는 관심 없으니까 안심해요.”

“그, 그, 그럼 기어이 제 목을 베신다는……!”

“목에는 더더욱 관심 없어요! 그냥 저 문만 열어 주면 된다니까요.”

“그런데 정말 밖으로 나가시는 건 안 되거든요.”

결국 대화가 처음으로 돌아왔다.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좋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안 되겠군요.”

나는 과장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해리에게 명령했다.

“해리, 저 기사님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나와 기사의 대치를 지루한 얼굴로 보고 있던 해리가 반색했다.

[정말? 손가락 먹어도 돼? 이왕 먹는 거 팔다리랑 머리까지 다 먹어 버려도 될까?]

[되겠어요? 그냥 협박만 하는 거니까, 손가락 물어뜯는 척만 해요.]

[쳇. 재미없어.]

해리가 투덜거리면서도 내 명령에 따라 기사에게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손을 물어뜯을 듯 음산하게 으르렁거리는 해리의 모습에 기사가 펄쩍 뛰었다.

“아, 아, 알겠습니다!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기사가 훌쩍거리며 대문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안 되는데’라거나, ‘대장님께 혼날 텐데’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 늦은 시간에 문지기나 하고 있는지 알겠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엑스트라 기사를 지나쳐 저택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 뒤를 엠마가 따랐다.

“불을 가지고 가려던 곳이 어디야? 그쪽으로 안내해, 엠마.”

“예, 아가씨!”

엠마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가지고 저택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엠마가 앞에서 걷고, 나와 해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 뒤에 있어서는 안 될 한 명의 발소리가 더 있었다.

“왜 따라와요?”

입구에서 나와 실랑이를 벌였던 엑스트라 기사였다. 그가 여전히 훌쩍거리며 내 뒤를 밟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은 시간이고, 아가씨와 하녀만 보내기엔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서 우리를 호위하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게 기사의 의무니까요.”

기사가 뿌듯하고 자부심에 가득 찬 얼굴로 가슴을 내밀었다. 물론 전혀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마음은 참 기특한데요.”

나는 어느새 완전히 멀어져 거의 보이지도 않는 저택의 대문을 가리켰다.

“저 문, 혼자 지키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맞습니다.”

“경이 이렇게 나를 따라왔으니 저 문은 누가 지키죠?”

내 질문에 기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그렇게 눈동자가 두어 번 좌우를 왕복했을 때쯤.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 어, 어쩌지요, 아가씨? 지금 대문은 텅 비어 있습니다! 남작님께서 잘 지키라고 하셨는데!”

“나를 따라나섰을 때부터 그걸 생각했어야죠.”

악역으로 태어나 하는 일마다 더럽게 꼬이는 나나, 엑스트라로 태어나 하는 일마다 어딘가 모자란 이 기사. 둘 다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니까, 이번엔 조금 도와줄까?’

나는 당황해 울먹거리는 기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그를 위로했다.

“울지 마요. 별일 없을 테니까.”

“흑. 정말로 별일 없을까요?”

“무슨 일 있으면 내가 협박해서 데리고 나왔다고 해요. 그럼 경한테 잘못을 묻진 않겠죠.”

“하지만 아가씨는 그러신 적 없는데요?”

“혼나는 거 무섭잖아요. 여기서 날 혼낼 사람은 없으니까, 그냥 내 이름 팔아요. 나 지키겠다고 따라 나온 게 기특해서 내 이름 빌려주는 거예요.”

“아, 아가씨…….”

내 말에 잦아들었던 기사의 눈물이 다시 터졌다.

“아니, 도와준다는 데 왜 또 울어요?”

“너무 감사해서…… 혹시라도 제가 기사단에서 쫓겨나서 손가락이 필요 없어지면 아가씨께 드리겠습니다. 열 손가락 다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 나 진짜 손가락에 관심 없다니까요! 눈물 뚝 그치고, 호위나 제대로 해요. 그러려고 따라 나온 거라면서요.”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훌쩍거리던 그가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예, 아가씨. 제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기사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외쳤다. 정말 믿음이 안 가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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