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계약자! 일어나!]
머릿속을 울리는 해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단잠에 빠진 나를 깨웠다.
‘일어나라고? 벌써 아침인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방안은 아직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뭐야, 아직 밤이잖아.’
나는 짜증스럽게 내 옆에 바짝 다가온 해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무겁고 거대한 개를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어나라니까! 응접실에 누가 들어왔어!]
[이 밤에 누가 오긴 뭘 온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잖아! 암살자 같은 거 아냐? 얼른 일어나라고!]
[암살자라뇨. 내가 뭐라고 암살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찾아오겠어요?]
나는 손을 뻗어 잠투정하는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해리의 몸을 토닥였다.
[착각일 거예요. 그러니까 더 자요, 해리.]
[내가 그런 걸 착각할 리가 없잖아? 나 푸른 마법사 테오하리스라고!]
[그래요. 그쪽이 위대하신 마법사이신 건 잘 알겠으니까, 더 자라고요.]
[아오, 정말!]
나를 설득하는 걸 포기했는지 해리가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뒤이어 개의 가벼운 발소리가 응접실로 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포기했네.’
나는 해리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쁨과 함께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꺅!”
응접실에서 들려온 짧은 비명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귓가를 때리는 비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진짜로 암살자가 온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브리아를 없애고 싶어 할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캐서린네 물고기가 보냈나?’
설득력이 있었다. 이브리아가 꼴 보기 싫어 목재 거래를 끊어 버린 녀석도 있으니, 아예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고 암살자를 보낼 녀석도 있을 법했다.
‘루크일까?’
뒷세계를 주름잡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라면 암살자를 보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루크인가 보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딱히 위기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푸른 불꽃의 대마법사가 내 애완견인데 무슨 걱정이야? 살려 달라고 소원만 빌면 되는데.’
나는 느긋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까치발을 들고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응접실에서는 이미 해리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었다. 문제는 해리를 앞에 두고 허둥거리는 상대의 얼굴이 아주 눈에 익다는 것이었다.
‘……엠마잖아?’
“이, 이거 줄 테니까 조용히 해 줘.”
엠마가 덜덜 떨며 해리에게 닭고기를 내밀었다. 내 방에 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미리 준비해 온 모양이었다.
해리가 으르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닭고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해리가 진짜 개였다면 꽤 효과적인 회유였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개인 척하고 있는 악마였다.
‘당연히 닭고기 따위에는 혹하지 않는……’
흐뭇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순간 해리가 닭고기를 받아먹었다. 그것도 아주 얌전하게.
‘겨우 닭고기에 넘어가는 거야?’
나는 황당해서 입을 떡 벌렸다.
[해리, 거기에 넘어가면 어떡해요!]
[너한테 불려 온 뒤로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배가 고픈 걸 어떡해?]
[그렇다고 닭고기를 받아먹어요? 지금 이 시점에?]
[그러게 누가 굶기면서 일 시키래?]
[악마도 삼시 세끼 다 챙겨 먹는 줄 몰랐죠.]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참고하도록 해.]
해리는 나의 핀잔을 들은 척도 않고 닭고기 뜯기에 열중했다. 고기를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지켜보는 나까지 배가 고파질 지경이었다.
“다행이다. 잘 먹는구나.”
나와 해리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엠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해리가 소란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곧 엠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향한 곳은 내 방이 아니었다.
엠마는 응접실 한쪽의 벽난로를 향해 걸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을 잠시 지켜보더니, 입술을 질끈 깨물고 비장한 얼굴로 몸을 낮추었다.
나는 엠마의 손에 들린 램프를 보고 그녀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불을 가져가려는 건가?’
벽난로의 불을 조심스럽게 램프의 초로 옮기는 모습을 보니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해리가 호들갑을 떨어서 나까지 괜히 긴장했잖아.’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엠마를 향해 다가갔다.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달라고 해야겠다.’
너무 놀라서 잠이 달아나 버린 상태에서 구운 닭고기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졌다.
“엠마.”
“꺄아아아악!”
엠마를 부르자마자 그녀의 입에서 엄청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으악! 갑자기 뭐야!”
덩달아 놀란 내 입에서도 비명이 이어졌지만, 동시에 튀어나온 굵은 목소리가 내 비명을 묻어 버렸다. 이런 굵은 목소리를 낼 사람은 여기에 하나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해리를 보았다. 먹고 있던 닭고기까지 떨어뜨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개와 눈이 마주치자 놀라움보다 황당함이 커졌다.
[해리, 지금 개인데 ‘으악’이라고, ‘갑자기 뭐야’라고 한 거예요?]
해리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아는지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나도 놀라서 그랬어. 불가항력이었다고. 그러는 너도 소리 질렀잖아!]
[난 인간이니까 그렇고, 해리는 악마잖아요. 악마는 그러면 안 되죠.]
[넌 악마에 대한 이상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 엄청 강하고 멋진 걸 빼면 악마도 인간이랑 크게 다르지 않거든!]
[이런 상황에서 은근슬쩍 자기 자랑하지 마세요.]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엠마를 바라보았다. 엠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역시 해리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게 틀림없었다.
‘말하는 동물을 데리고 있다니. 누가 봐도 마녀잖아.’
나는 낭패감에 젖어 해리를 노려보았다.
[이거 어떻게 수습할 거예요?]
[음. 네 목소리라고 하자.]
[그걸 믿겠어요?]
[그럼 그냥 죽일까? 역시 그게 제일 편하잖아. 너는 비밀을 지키고, 나는 즐거움을 얻고. 어때?]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는 모습에 진심이 가득했다.
[헛소리 좀 그만해요.]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해리를 무시했다. 예상했던 대로 해리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역시 수습은 전부 내 몫인가?’
“엠마.”
눈치를 살피며 엠마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요, 요, 요,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 엠마가 이렇게 덜덜 떨며 용서를 구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상한 목소리를 들어서 죄송합니다, 이런 건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고 있으니 엠마가 더욱 절박한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죽을죄인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상황이 너무 절박하여 유혹이 너무 심했습니다. 부디 선처하여 주십시오.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도둑질?”
확실히 이브리아의 방은 도둑이 탐낼 만한 공간이었다.
‘이 방에 놓여 있는 장식품 하나만 갖다 팔아도 대단한 돈을 만질 수 있을 테지.’
하지만 엠마는 이브리아의 하녀였다. 이 방에서 물건이 없어지면 곧장 의심받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금방 들통날 일을 할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하는 모양새만 봐도 엠마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까다로운 공작의 딸이 온다고 하니, 책잡히지 않기 위해 저택에서 가장 똘똘한 하녀를 붙여 준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엠마가 뭔가를 훔치려고 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는 뜻일 터.
나는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엠마에게 물었다.
“도대체 뭘 가져가려고 했던 건데?”
“요,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나는 손을 들어 엠마의 말을 끊었다.
“아니. 용서해 달라는 말은 됐고.”
“히익.”
내 말에 엠마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 말을 용서 따위 절대로 안 해 줄 거니까 단단히 각오해라-라고 받아들인 게 틀림없군.’
이놈의 악역 얼굴에는 무슨 말을 해도 협박, 빈정거림, 비웃음 등의 부정적인 말로 해석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나는 엠마의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내 뜻을 전했다.
“그냥 가져가. 그게 뭐든.”
“……예?”
“네가 가져가려던 거, 그거 가져가라고. 그냥 줄 테니까.”
“……예에?”
엠마는 이제 완전히 다른 의미로 넋이 나가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반짝거리고 예쁜 물건들.
‘하지만…….’
“네가 뭘 가져가려고 했든, 그건 나한테 별로 가치 있는 게 아닐 거야.”
어쩌면 진짜 이브리아에게는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든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알맹이가 이브리아가 아닌 내게는 이곳의 어떤 것도 큰 의미가 없었다. 유일한 의미라면 값이 나간다는 것뿐이겠지만, 이브리아가 가진 것 중에는 비싼 게 많았다.
‘하나 정도 엠마에게 준다고 해서 큰 구멍이 나는 것도 아니지.’
하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 없는 이것들이, 엠마에게는 무모한 짓을 하게 만들 정도로 간절하다면? 그냥 쥐여 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내게는 차고 넘치니까.
“그러니까 그냥 줄게. 가져가.”
그리고 나는 그걸 뇌물 삼아 해리의 비명을 못 들은 걸로 해 달라고 하는 거다.
‘아주 합리적인 거래지.’
나는 스스로의 계획에 감탄하며 웃었다. 물론 이 웃음 역시 악역 효과로 아주 비열하게 보였겠지만 말이다.
“정말로, 제게 주신다고요?”
엠마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확신을 주기 위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두 눈에 희망이 차올랐다.
“정말로 제게 불을 주신다고요?”
“그래. 준다니까. 불 정도는 내가……”
선심 쓰듯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 불?”
미술품도, 은촛대도, 보석도 아니라, 고작 불?
“엠마가 훔치려던 게 불이라고?”
황당해서 몇 번이나 되묻는 나를 보며 엠마의 두 눈에 차올랐던 희망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역시 그건 안 되는 거군요.”
그녀가 무척이나 시무룩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순식간에 체념하는 엠마를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고작 불을 훔치려고 왔다는 것도, 그걸 들켰다고 죽을죄를 지은 사람처럼 사죄한 것도 다 황당했다.
“난 또 뭐라고. 불이 필요해서 온 거였으면 그냥 말하지 그랬어? 도둑질을 하려고 했다기에 보석이라도 훔치러 온 줄 알았잖아.”
나는 엠마가 놀라서 내팽개친 램프와 초를 집어 들었다. 초에 불을 붙이고 램프 안에 넣자 불이 환하게 타올라 어둠을 밝혔다.
“자. 가져가.”
나는 엠마에게 램프를 건넸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그녀가 선뜻 손을 내밀지 않았다.
“불 가지러 왔다며?”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그냥 불이잖아?”
“하지만 흑철목을 태우는 신비한 불인데요?”
“그래도 그냥…… 불인데?”
누군가에게 나눠 준다고 해서 내 몫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눠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낮에 집사도 사람들에게 나눠 주겠다면서 불을 가져갔잖아. 그건 어쩌고?”
“남작님께서 저택 밖으로 불이 나가지 않도록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저택 내에서도 불이 꼭 필요한 곳에만 나눠 줬기 때문에, 저 같은 하녀들은 불 근처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일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남작이 불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으니, 엠마는 자신이 경계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내 방에서 불을 가져가려고 한 것이다.
‘문제는 남작이 왜 불을 통제하려고 하는가-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불을 나눠 줘서 영지 사람들 전부 따뜻하게 지내면 좋은 거 아냐?’
원래 귀족들이 제 것을 아랫사람들과 나누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남작이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뭔가 이유가 있긴 하겠지. 그런데 그게 자기 사람들 얼어 죽는 것보다 중요한가?’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영지를 관리하는 사람의 복잡한 생각을 내가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고민하기를 포기하고 램프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나, 엠마. 지금 바로 가자.”
“어디를요?”
“어디긴? 불이 필요한 곳이지.”
“불이 필요한 곳이라면…….”
“남작이 나한테는 저택 밖으로 불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았거든.”
나는 손에 든 램프를 흔들며 웃었다.
“게다가 이건 내 불이니까, 이걸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이지. 대신 엠마는 오늘 보고 들은 걸 잊어 줘. 어때?”
“오늘 보고 들은 것을요?”
“그래. 모두.”
내가 해리를 슬쩍 노려보며 말하자 잠시 망설이던 엠마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거래 성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