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인세티아 남작은 타오르는 벽난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흑철목을 태우는 불길. 이브리아의 벽난로에서 얻어 온 불이었다.
‘어떻게 흑철목이 불에 탈 수 있지?’
이브리아는 간절하게 기도하다 우연히 만든 불이라고 했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게 가능했다면 에렐의 누구도 추위에 떨 이유가 없었다.
마법사의 힘이 대단하다기에 왕도의 유명한 마법사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흑철목을 태우는 데에는 실패했다.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 낸 불이 아니다. 이건, 이브리아 공녀가 가진 힘인 거야.’
어린 공녀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남작이 아니었다. 척박한 북쪽의 땅을 개척하며 험하게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가? 왕도라는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어린애에게 속아 넘어가기에는 인세티아 남작의 잔뼈가 너무 굵었다.
‘하지만 공녀의 마력치는 극히 낮다고 알려졌는데. 이렇게 강한 불을 만들어 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마력치가 낮다고 한 거지?’
남작은 이브리아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상관인 오베론 공작의 얼굴을 떠올렸다. 철두철미한 전략가인 그라면 딸의 강한 마력을 숨긴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외부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서겠지. 강한 힘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니까.’
오베론 가문은 그렇지 않아도 왕가와 맞먹을 정도의 전통과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대단한 힘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다면? 이브리아가 지금처럼 자유롭게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기엔 느껴지는 기운이 지나치게 평범했는데…….’
하지만 남작은 곧 고개를 저었다. 원래 엄청난 경지에 이르면, 평범한 사람은 오히려 그 경지를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공녀의 경지가 거기에 다다랐다는 말인가?’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공작께서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 것 같군.’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인세티아 남작은 그 뜻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의문을 가득 품고 있으면서도 이브리아를 깊게 추궁하지 않았다.
‘공작께서 먼저 언급하시기 전까지는 나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렐에 내려오는 오랜 전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북방에만 내려오는 전설. 왕국의 건국 신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 사람들도 자신들만의 전설을 품고 있었다.
지금은 왕국에 종속되어 지배를 받고 있지만, 북방은 본디 별개의 나라였다.
인종도, 문화도. 왕도의 중앙 귀족과 완전히 다른 나라.
왕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푸른 마법사의 강력한 불길에 무너지기 전까지 북방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삶을 살았다. 오베론 가문도 태생은 이곳, 북방이었다. 뿌리가 다르니 다른 가문에 비해 왕가의 견제도 심했다.
‘이곳, 최북방의 에렐에서 시련을 몰아낼 새로운 불길이 시작된다고 했지. 그게 이 땅을 구원할 영웅의 첫걸음이라고.’
혹시 이브리아가 만들어 낸 이 불이 그 전설의 불꽃은 아닐까?
공작 역시 이것을 모두 알고 제 딸을 이곳으로 보낸 걸까?
이 땅의 자유, 북방 사람들 모두가 품고 있는 그 전설을 시험하기 위해서?
‘나는 침묵한다. 모든 것이 드러나기 전까지.’
인세티아 남작의 눈이 깊이 침잠했다.
“우선은 입단속이 필요하겠군.”
외부에 이브리아가 만들어 낸 불의 존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손을 써야 했다.
* * *
집사가 하루 종일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소문했으나, 당연하게도 개를 잃어버렸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주인 없는 개라는 게 확실해진 해리는 늦은 밤 집사의 손에 이끌려 내 방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목에는 목줄이 채워져 있었다.
“목줄이네요?”
“그 집사라는 인간이 채웠어. 큰 개는 위험하다나? 목줄이라니. 이 테오하리스 인생 최고의 굴욕이야.”
바닥에 드러누운 해리가 발을 뻗어 목줄을 벅벅 긁었지만, 단단하게 채워진 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풀리겠어요?”
나는 픽 웃고는 몸을 숙여 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열심히 발버둥 치던 해리의 발이 허공에서 굳어 버렸다.
“왜 이 타이밍에 머리를 쓰다듬어?”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건 위로의 의미라며?”
내가 처음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한 가지 행동이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하잖아요. 지금은 칭찬의 의미예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계속 손을 움직였다.
“굴욕을 잘 참아 준 거 고마워요, 해리.”
내 말에 해리가 코웃음을 쳤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네가 개로 변하라고만 안 했어도 이런 굴욕은 없었거든!”
“알아요. 그러니까 기특해서 이렇게 칭찬해 주잖아요. 아이고, 착하다. 참 잘했어요.”
나는 기계적으로 칭찬하며 해리의 목줄을 풀어 주었다. 갑갑하던 목줄이 풀리자 해리가 개운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다른 사람한테는 목줄 채우지 말라고 말해 둘게요. 대신 사람들 앞에서 사나운 모습을 보이면 안 돼요. 그럼 목줄을 안 채우는 명분이 없으니까요.”
“어제는 개가 되라더니, 오늘은 순한 양이 되라고 하는군.”
해리가 투덜거리며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늘어지는 그를 보며 이번에는 내가 황당해졌다.
“해리, 그거 내 침대거든요?”
“알아. 하지만 난 네 애완견이잖아.”
“그래서요?”
“그걸 몰라서 물어? 애완견에게는 주인의 침대를 공유할 권리가 있어.”
해리의 말처럼 애완동물과 한 침대에서 잠드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속에 든 건 속이 시커먼 악마잖아요.”
“어차피 계약자한테는 해코지도 못 해. 뭐가 걱정이야?”
“그건 그렇지만…….”
상대가 악마이다 보니 미심쩍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악마는 그럴듯한 말로 사람 홀리는 게 특기 아닌가?
“아무 짓도 안 해요, 아무 짓도. 너같이 풋내 나는 꼬마한테는 뭐 할 생각도 안 든다니까.”
해리가 귀찮다는 듯 꼬리를 느리게 살랑거렸다.
“그러고 보니, 너 지금 몇 살이냐?”
“올해 생일이 지나면 열여덟이에요. 그럼 성인이 되죠.”
원래 나이는 그것보다 많지만, 이브리아 기준이라면 아직 열일곱이었다. 내 말에 해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열여덟이라니. 이거 완전 부스러기구만.”
자랑할 게 없어서 나이로 잘난 체인가? 나는 기가 막혀서 팔짱을 꼈다.
“부스러기라고요? 그러는 해리는 도대체 몇 살인데 잘난 척이에요?”
“나? 2176살이다, 왜!”
“2176?”
상상하지도 못한 숫자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하긴. 테오하리스는 건국 신화 때부터 존재했던 악마였다.
‘당연히 나이가 많겠지.’
겉모습은 많이 쳐 줘야 2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여서 그걸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해리…… 당신 할아버지였어요……?”
“할아버지라니! 앞날이 창창한 청년한테 무슨 소리야?”
해리가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는 듯 두 귀를 바짝 세웠다.
‘악마 기준에서는 2176살이 청년인 건가? 그런 건가?’
아득한 숫자에 놀라서 해리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우아하게 침대에 늘어졌다.
“뭐 해? 안 잘 거야? 벌써 밤이 깊었는데. 침대가 싫으면 저어어기 소파에서 자도 되고.”
마치 자신이 침대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이건 내 침대인데, 이걸 두고 내가 왜 소파에서 자요?”
나는 입을 비죽이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워낙 큰 침대인 탓에 반대쪽에 누운 해리의 존재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포근한 이불과 훈훈한 공기가 기분 좋게 몸을 녹였다. 이게 모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덕분이었다.
‘추위에 덜덜 떠느라 하루 종일 얼마나 피곤했던지.’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순식간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만세!’
* * *
“뭐야, 잠들었어?”
해리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가늘게 떴다. 어느새 그의 모습은 새하얀 개가 아닌 인간형의 본체로 돌아와 있었다.
“부스러기라서 그런가? 아직 순진하구먼.”
아무 짓도 안 한다는 말을 믿고 악마와 한 침대에서 잠들다니.
‘의심 많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해리가 손을 뻗어 이브리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의 은발에 비하면 흔해 빠진 적갈색이었지만, 제 힘의 원천인 불을 닮아 있어서 꽤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만져도 깨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볼까지 쿡쿡 찔러 봤지만 이브리아는 귀찮은 듯 뒤척이기만 할 뿐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말을 믿어 준 건 고맙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한다.
‘내 얼굴 꽤 괜찮지 않나? 여자들이 다 좋아했는데.’
악마는 사람의 환심을 사서 그걸 이용해먹는 족속들이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는 데 가장 손쉬운 무기는 아름다운 외모였다. 악마는 이런 생리를 따라 아름다운 외형으로 진화했다.
해리는 그런 악마들 사이에서도 특별하게 더 잘난 축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계약자에게는 이 외모가 별로 먹히지 않는 것 같았다.
‘개로 변신했다고 내가 정말 개 새끼인 줄 아는 건가?’
세상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인간계로 나와서는 이렇게 개 취급이나 받고 있으니.’
그가 개 목걸이까지 찼다는 걸 마계에 있는 녀석들이 알게 되면 적어도 100년은 비웃을 것이다.
‘그러니까 개고생에 대한 보상은 꼭 받아야겠어.’
문제는 이 계약자를 어떻게 꼬드기는가였다.
‘내 계약자의 욕망은 뭘까? 생긴 것도 괜찮고, 신분도 높고, 돈도 많아 보이는데. 부족한 게 있으려나?’
하지만 해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인간이란 모두 마음 깊은 곳에 욕망을 지니고 있으니 그걸 건드려 주기만 하면 된다. 지금이야 전쟁도 싫다, 사람 죽이는 것도 싫다고 하지만, 옆에서 속살거리면 금세 넘어올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해리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이브리아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곧 네 욕망을 찾아낼 테니 기대하라고.’
그리고 악마는 쾌락을 얻겠지.
해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씩 웃는 순간. 바깥쪽 응접실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소리.
상당히 어설프긴 했지만 나름대로는 최대한 기척을 죽인 것 같았다.
‘암살자 같은 건가?’
첫 계약자를 만났을 때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이런 시각 은밀하게 찾아오는 손님은 대부분 암살자였다.
해리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이브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모른 척 내버려 두면 얘는 죽겠지? 그럼 계약도 자연스럽게 끝날 거고.’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자신에게는 가장 좋았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다.
‘이 테오하리스의 계약자가 어설픈 암살자한테 죽다니. 그건 안 되지.’
제 이름을 부른 인간이라면 이보다는 더 멋지게 죽을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충성스러운 개가 되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