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불이 붙었네요. 세상에.”
엠마는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속의 불길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첫날 내게 인사만 하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인세티아 남작과 저택 살림을 꾸리느라 바쁘다는 집사까지 내 방의 벽난로 앞에 모여들었다. 벌써 내가 흑철목에 불을 피웠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흑철목이 불에…….”
인세티아 남작이 불길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해리가 만들어 낸 불길은 일반적인 불과 조금 달랐다. 전체적인 색은 평범한 불과 비슷했지만, 중심부에 기이한 푸른색이 돌았다. 물론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차이점이었다. 만약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의 작은 차이였다.
‘그러니까 이게 신화 속의 그 푸른 불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내 예상대로 엠마와 집사는 불타는 흑철목을 보며 마냥 놀라움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작은 달랐다. 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께서 이 불을 피우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랬어요.”
“어떻게 하신 거지요?”
“음. 어떻게 했냐면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진지하게 두 손을 모으고 남작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두 손을 모으고.”
“모으고?”
“기도했어요! 아주 간절하게!”
“……예?”
나를 따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작이 맥이 풀렸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간절하게 기도하니, 불이 붙었다고요?”
“네. 나도 일단은 마법사니까,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잖아요. 마법사들은 종종 기이한 일을 해내곤 하니까.”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남작은 간단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아가씨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이건 흑철목입니다. 평범한 불에는 타지 않지요.”
“알아요. 엠마에게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냥 하니까 되던데요?”
여전히 가벼운 내 태도에 남작의 가지런한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나는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해 보이는 남작의 얼굴을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너무 추워서 불이 꼭 필요했잖아요. 간절한 내 마음에 마력이 응답했나 봐요. 이게 마법사의 기적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긴. 너 연기력이 좋구나?]
남작을 향해 천진한 척 웃어 보이는 내게 해리가 질렸다는 듯 속삭였다. 텔레파시처럼 머리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해리는 이것을 계약자 사이의 공명이라고 했다.
[조용히 해요, 해리.]
[어차피 저 사람들한테는 안 들리니까 상관없잖아.]
[내가 듣잖아요, 내가. 정신 사납다고요.]
순조로운 대화를 위해 나는 해리에게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다른 사람이랑 대화할 때는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 악마님. 새로운 소원이에요.]
[이렇게 모습을 숨기는 것도 답답한데 입까지 다물라는 거야?]
[해리, 벽 보고 서 있고 싶어요?]
[……치사하다, 치사해. 내가 친히 개로 변하기까지 했는데 옆에서 떠드는 것까지 못 하게 하는 거야?]
[그렇군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거네요. 그렇다면 역시 벽을 보고……]
내 말이 끝나기 전에 해리가 황급히 외쳤다.
[으악, 알았어! 입 다물면 되잖아!]
순식간에 조용해진 해리 덕분에 나는 남작과의 대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남작은 더 이상 나를 추궁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말도 안 되는 내 변명을 믿었을 리는 없는데.’
그는 추궁 대신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습니까? 확실히 아가씨께서는 마력을 타고나셨지요.”
애매한 반응을 보이는 남작을 대신해 옆에 있던 집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가씨의 불에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흑철목에 불이 붙다니…… 이건 엄청난 일입니다. 그간 상회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굴었습니까?”
집사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땔감으로 쓸 목재가 전혀 나지 않는 우리 에렐의 사정을 이용해 무리한 요구를 했지요. 저희는 어쩔 수 없이 그걸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요.”
‘음.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와 달리 집사는 상당히 격양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희에게도 땔감으로 쓸 목재가 있는 겁니다! 아가씨께서 만들어 내신 이 대단한 불길만 있다면 흑철목을 태울 수 있으니까요!”
무척이나 추운 지역임에도 땔감으로 쓸 목재가 없다는 건 분명한 약점이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아주 공공연한 약점이었을 터. 약삭빠른 장사치들이 이걸 이용해 제 이익을 챙기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에렐이 공작령치고는 낙후한 느낌이었나? 상황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는 집사의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뭐? 눈물?’
당황해서 바라보니 정말 집사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건 아가씨의 염원이 만들어 낸 기적입니다!”
“……응? 기, 기적?”
“세상에! 마력도 눈곱만큼밖에 없으신 분이…… 얼마나 간절히 에렐의 추위를 몰아내겠다 염원하셨으면 이렇게 신비하고 강한 불길이!”
“아니, 난 그냥 내가 추워서……”
나는 서둘러 부정했지만, 이미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든 집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이곳에 보내신 건 이런 큰 뜻이 있어서였군요. 저는 미처 그 뜻을 알지도 못하고, 큰 사고를 치고 오신 아가씨를 저희에게 떠맡긴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니. 당신이 한 생각이 맞는데.’
공작은 귀찮은 짐을 그냥 여기다 버린 거다.
‘내가 바로 그 짐이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용서라니. 그럴 필요가 있나……?”
집사가 했다던 그 생각이 전부 사실이니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집사의 얼굴이 더욱 감격에 찼다.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니……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신 분일 줄이야! 떠들썩한 악명도 모두 다 거짓이었던 모양입니다.”
인터넷도 없는 세상에 왕국 끄트머리에 있는 이 촌구석까지 이브리아의 악행이 전해졌다니.
‘이브리아 너 정말 전국구급 악역이었구나…….’
새삼스럽게 나의 명성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집사는 송구스럽다는 듯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긴, 왕도의 소문이란 전부 그런 거지요. 입 가벼운 남부 놈들의 이야기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걸 철석같이 믿어 버린 제 소견이 역시 짧았습니다.”
“아니, 그 소문도 전부…….”
“저는 어서 이 불씨를 저택 곳곳에 나눠 주고 오겠습니다. 드디어 저택도 제대로 돌아가겠군요. 모두 아가씨의 간절한 기도에 감사할 겁니다.”
불씨를 나눠 주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있는 불, 나눠 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불씨와 함께 집사의 저 말도 안 되는 착각도 널리 퍼질 거라는 게 문제였다.
나는 집사를 막기 위해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그의 재빠른 행동이 먼저였다. 초에 불을 옮겨 다급하게 사라지는 집사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보고 있으니 해리가 신이 나서 내게 속삭였다.
[저 녀석 입을 막아 줄까? 죽음으로 영원히 막아 버리는 게 제일 확실해. 어때, 너도 끌리지?]
[……닥쳐요, 해리.]
[아니면 말고.]
내 말에 한 발짝 물러난 해리가 무엇인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야, 너 그런데 말이 좀 험해졌다?]
[해리, 난 분명 닥치라고 했는데. 역시 평생 벽을 보면서 지내게……]
[아냐! 말 험해도 돼! 닥치는 게 내 특기인 건 어떻게 알고 그랬지? 이것 참 신통방통한 계약자라니까.]
순식간에 해리가 쪼그라들었다. 조용해진 해리를 대신해서 나와 집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인세티아 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개도 못 보던 녀석이군요. 왕도에서 오실 때 애완견을 데려오셨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만.”
남작이 확인하듯 엠마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처음 보는 개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 ‘왕!’ 하고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개군.’
나는 해리를 향해 칭찬의 눈빛을 보낸 뒤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잠깐 정원을 산책하다가 만났는데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정원에 저렇게 커다란 개가 떠돌아다녔다고요?”
남작이 의심스럽게 나와 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나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봐 줘요. 혹시 개를 잃어버린 사람이 있냐고요. 만약 주인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키울게요. 마침 쓸쓸해서 애완견이라도 들일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애완견이 필요하시다면 순하고 영리한 녀석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저런 족보도 모를 떠돌이 개보다는 나을 겁니다.”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저런 똥개가 아니라 품종견을 키우는 게 어떠냐는 소리였다. 그 말에 숨은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해리가 발끈해서 투덜거렸다.
[누가 누굴 보고 족보도 모른대! 내가 어떤 악마인 줄 알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일족의 왕이……]
‘어휴. 이 수다쟁이.’
입 다물겠다는 다짐은 잊은 모양인지 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의식적으로 해리의 목소리를 차단하고 남작에게 내 의사를 전했다.
“그럼 이 녀석을 다시 버리라고요? 불쌍하잖아요. 날씨도 이렇게 추운데.”
내가 고개를 까딱여 창밖을 가리키자 남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해리가 정말 평범한 개였다면 얼어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주인을 못 찾고 밖으로 돌려보내면 그냥 죽으라는 거잖아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 그래요?”
‘생명은 소중한 거니까. 그렇지?’
아주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남작은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엠마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제 청력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의심하는지 멍하니 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긴.’
나는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금세 알아챘다.
‘사람 죽이려고 했던 게 걸려서 여기까지 쫓겨난 애가 양심 운운하는 것도 웃기지.’
역시 악역에게는 악역다운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 속의 불량배들을 떠올리며 천천히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들어 짝다리를 짚었다. 최대한 오만하고 불량스럽게 보이도록. 그게 내 의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의도는 정확히 먹혀들었다.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조금 굳어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
나는 거기에다 쐐기를 박기로 했다.
“왜요? 불만이에요?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평소보다 목소리를 한 톤 높여서 말하자 내가 듣기에도 얄미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와. 별로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얄미운 목소리라니. 역시 악역이야.’
나는 이브리아의 악역 유전자에 감탄하며 해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선대로부터 피를 이어받은 내가…… 컥!]
목을 꽉 끌어안으니 홀로 자신의 족보를 읊어 대고 있던 해리가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키우겠다고 말했잖아요! 설마 안 된다는 거예요?”
이번에는 얄미움을 넘어 표독스럽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거기에다 눈까지 부라리고 있으니 보통 표독스러워 보이는 게 아닐 거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결국 나의 악역스러움에 남작이 굴복했다.
“우선 주인을 찾아보고,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가씨께서 이 녀석을 거둬 주시죠. 녀석도 고마워할 겁니다. 추운 날씨에 얼어 죽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지내는 게 나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