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56)

* * *

“내가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건데?”

해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거야…….”

나는 대답 대신 무릎을 굽혀 내 앞을 지키고 선 개와 눈을 맞추었다.

복슬복슬한 하얀 털의 커다란 개. 견종으로 따지자면 사모예드에 가까워 보였다.

‘이 순하고 귀여운 얼굴 안에 해리가 들어 있다니.’

정확히 말하면 해리가 이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니었다. 해리가 변신을 한 거니까, 그냥 이 개 자체가 해리였다.

“악마와 개라니. 별로 어울리지는 않네요.”

“어째서?”

“개는 순하고 충성심 강한 이미지잖아요.”

내 말에 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인간들은 우리를 너무 교활하게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우리 악마들도 꽤 충성심이 강하다고.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약을 지키잖아.”

“그건 충성이 아니라 충실이죠. 충성은 좀 더 마음에서 우러나는 거라고요.”

“아무튼 인간들이란. 능력만 빌려주면 됐지, 꼭 마음까지 원한다니까. 피곤하게.”

해리가 잔뜩 질린 목소리로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살 만큼 산 노인들이나 할 소리였다.

“해리, 개 모습으로 그런 말 하면 되게 웃긴 거 알아요?”

“내가 이 모습이 되고 싶어서 됐어? 네가 뭐로든 변신할 수 있냐고 물어봐서 한 거잖아.”

악마들은 모두 자신의 영혼과 연결된 영혼수(靈魂獸)를 가지고 있는데, 필요에 따라 그 형태로 변신할 수가 있다고 했다. 해리의 경우는 그게 개였다.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생각보다 유명한 귀족 아가씨라서,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남자를 데려오면 이상한 소문에 휩싸이거든요. 난 에렐에 처박혀서 최대한 조용히 지내는 게 목표라.”

왕세자에게 파혼당하고 시골로 쫓겨난 공작 영애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사내를 들였다고? 더러운 소문이 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공작이 사고 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여기서까지 남자 문제로 소란을 일으키면…….’

아마 공작의 분노가 대단할 것이다. 이번에는 시골로 내치는 게 아니라, 아예 집안에서까지 내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부잣집 딸로 호의호식하겠다는 나의 꿈도 끝이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있어요. 원래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니까.”

해리의 영혼수가 평범한 개라서 다행이었다.

‘산책하다가 길 잃은 개를 발견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주인 없는 녀석처럼 보이니까 그냥 내가 기르겠다고 말이야.’

귀족들이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건 일반적인 일이니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귀족 영애들이 많이 기르는 소형견이 아닌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개라는 점에서는 합격점이었다.

‘뱀이나 박쥐 같은 걸로 변했어 봐. 옆에 두는 게 얼마나 수상했겠어?’

악독한 여자라는 악명에다 마녀라는 오해까지 살 판이었다.

‘아니지. 악마를 불러내서 하수인으로 부리니까, 이곳 인식으로는 마녀 맞잖아? 나 악역도 모자라 마녀까지 된 거야?’

악역에 이어 마녀라는 타이틀까지 섭렵하다니.

‘이런 시대에는 마녀사냥 같은 게 있지 않나? 잡히면 고문하다 죽여 버리던데. 화형하기도 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건 절대 들키면 안 되겠구나. 인생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서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미 쏟아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무튼, 사람들 앞에서는 최대한 평범한 개인 척해 줘요. 지금처럼 말도 하면 안 돼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완벽한 개 연기를 보여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뒤이어 해리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왕!’ 하고 짖었다.

“오?”

울음소리가 의외로 진짜 개들과 흡사했다. 내가 감탄한 얼굴로 손뼉을 치자, 해리가 뿌듯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인간들한테 내가 만든 불은 어떻게 설명할 거야? 저 나무, 평범한 불로는 안 타서 나까지 부른 거 아냐?”

해리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벽난로 안의 흑철목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예쁘게 타고 있었다. 추위를 물러나게 해 주는 고마운 불이었다.

“일단은 나도 마법사니까 마법으로 엄청 강한 불을 만들었다고 하죠, 뭐.”

마법사는 마력을 다뤄 신비한 힘을 쓰는 사람들이었다. 신화 속 푸른 마법사처럼 강한 힘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불을 피우거나 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도 있었다.

마력을 다루는 건 아주 희귀한 능력이기 때문에 왕국에서도 마법사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브리아가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왕국의 어떤 사람도 이브리아를 마법사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네가 마법사라고?”

해리가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살폈다.

마법사들은 몸 안에 깃든 마력을 운용해 마법을 쓴다. 하지만 이 마력은 훈련으로 늘릴 수 없었다. 태어날 때 가지고 있는 양이 전부라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다는 거지.’

마력치는 1에서 10까지로 측정하는데, 단순하게 1에서 10으로 갈수록 마력량이 많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소설의 설정상 이브리아의 마력치는 0.5였다.

실제로 이브리아가 불의 마법을 쓴다고 가정하면?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초에 불을 붙이는 것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미약한 힘이었다.

‘0.5라니…… 이브리아가…… 내가 쩜오라니!’

그에 비해 여주인공 캐서린은 마력치 9를 기록한 강한 마법사였다. 별 볼일 없는 집안의 딸이었던 캐서린이 처음 주목을 받게 되는 이유도 강한 마력에 있었다.

‘덕분에 이브리아는 더 하찮게 보였지.’

신분은 조금 낮았지만 대단한 재능을 가진 여주인공과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신분만 가진 악역. 소설에서는 당연한 구도였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마력이 조오오오오금 있긴 하네. 정말 티끌만큼이지만. 제로랑 비슷한 수준인데?”

한참이나 나를 살피던 해리가 코웃음을 쳤다.

제로는 마력을 지니지 못한 채 태어나는 사람을 뜻하는 마법사들의 은어였다. 마력으로 재능을 가늠하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모욕이었지만, 마력이 없는 게 당연한 세계에서 온 나로서는 그게 뭐 그리 모욕적인 일인가 싶었다. 덕분에 제로와 비슷한 수준이라며 나를 약 올리는 해리의 말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렇죠. 다들 그러더라고요. 이 정도면 겨우 제로를 면한 거라고요. 차라리 평범한 사람이면 덜 우스웠을 거라고.”

차분한 대꾸에 해리가 눈을 껌뻑였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한 모양이었다.

“……넌 분하지도 않냐? 제로나 다름없다고 놀리는데.”

“어쩌겠어요? 그렇게 타고났는데. 분하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살아야죠.”

“넌 왜 이렇게 인간이 비관적이야?”

“전혀요. 전 오히려 긍정적인 편인데요? 이름뿐인 마법사인 대신에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이렇게 태어난 게 더 좋았다. 이브리아가 마력이 높은 대신 신분이 낮고 가난했다면 빙의한 순간부터 좌절했을 거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흙수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피곤해.’

무능한 금수저가 인생을 살기엔 최고였다.

“인간들은 모두 마력에 집착하는 줄 알았는데.”

해리가 별종을 본다는 듯 천천히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말처럼 사람들은 경이로운 힘을 가진 마법사들을 동경했다. 그 존재가 소수이기에 더욱.

그래서 사람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마력을 측정했다. 부디 내 아이에게 소수의 선택받은 재능이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해리도 그 부분을 지적하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마력 측정부터 하지 않냐? 그럼 네 마력 수준도 다 알려졌을 테고, 네가 저 불을 피웠다는 말도 믿어 주지 않을 텐데?”

“상관없어요. 내가 그랬다는데 누가 아니라고 하겠어요?”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왜요? 나 공작 영애잖아요. 여기에 나보다 신분 높은 사람은 없거든요.”

오베론 성에서라면 나보다 높은 사람이 둘이나 있다. 공작인 아버지와 소공작인 오빠. 하지만 여기서는 내 신분이 가장 높았다.

물론 신분이 높을 뿐 내게 영지를 움직일 실질적인 권한은 전혀 없었다. 모든 실권은 에렐을 관리하는 인세티아 남작에게 있었다. 오베론 공작가를 오랫동안 모셔온 충성스러운 가신 가문의 젊은 수장이었다. 원작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에렐로 오는 동안 주워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상당히 능력 있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인세티아 남작도 내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가리키며 ‘저건 보석이네요!’ 하고 말하면, ‘그렇군요. 저건 보석이군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브리아 오베론이니까.

작위로 따지면 남작이 이브리아보다 윗사람이지만 어쨌든 이브리아는 공작가의 직계였다. 결혼해서 이브리아의 성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핏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이 세상의 신분이었다.

“게다가 난 신분을 무기 삼아 열심히 휘두르는 데 별로 거부감이 없거든요.”

악역 이브리아 오베론. 이 얼마나 편리한 역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세상 살기는 악역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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