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56)

* * *

흑철목이 불타고 있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땔감으로는 절대 못 쓴다던 흑철목이지만, 예상대로 악마의 불꽃은 평범한 불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런데 푸른 불꽃이라더니…… 생각처럼 그렇게 푸른색은 아니네?’

불씨의 중심부에 파란빛이 돌기는 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를 정도였다.

‘뭐, 색이 중요한가? 불이 붙었으면 된 거지!’

나는 일렁이는 불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벽난로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온기에 얼었던 몸이 노곤해졌다. 이제 말도 안 되는 에렐의 추위에 몸을 덜덜 떨 일도 없을 것이다.

‘땔감으로 쓸 흑철목은 널려 있으니까 지금 이 불씨를 잘 유지하기만 하면 되겠어.’

“이봐.”

완벽하게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나와 달리 악마는 불만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얻을 것을 모두 얻은 나는 더 이상 그의 기분을 맞춰 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도 거기 있었어요?”

나는 대충 손만 흔들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뤄졌으니까 집에 가요.”

“집에 가라고?”

“네. 집이요. 악마는 집도 없어요? 원래 살던 집으로 가라고요.”

악마들이 사는 동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생김새는 인간과 흡사하니 사는 모습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그쪽에도 집이 있고 가족이 있겠지, 뭐.’

하지만 악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날 불렀잖아.”

“그랬죠.”

“그럼 네가 날 책임져야지.”

“책임? 제가 왜요?”

“너 악마의 이름을 부르고 계약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물론 잘 알고 있다. 악마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나타나서 내 소원을 들어준다.

‘그게 전부 아닌가?’

멀뚱멀뚱 눈만 껌뻑이는 나를 보고 악마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이 계약은 종신 계약이라고!”

“……네? 종신 계약이요?”

“그래! 난 네가 죽을 때까지 네 옆에 있어야 돼! 끊임없이 네 소원을 들어주면서!”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싶었을 뿐이다. 소원을 들어주면 악마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종신 계약이라니? 계속 내 옆에 이런 걸 달고 있어야 한다니? 나는 이런 귀찮은 혹을 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당신은 악마잖아요? 악마들은 엄청 이기적이고요. 종신 계약이라니…… 아무것도 안 받고 왜 그런 손해 보는 짓을 하는데요?”

당연한 내 질문에 악마가 분통 터진다는 듯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그래서 보통은 대가를 받는다고! 아니면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는 녀석과 계약을 하지. 사람을 죽이거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는 그런 놈들 말이야.”

하지만 나는 그 둘 중 어떤 것도 아니었다. 악마의 진짜 이름을 불렀으니 내게서 대가를 받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흥미로운 유희로 생각하자니 내가 썩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지도 않았다.

“어, 그, 당신이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 소원이래도 안 돼요?”

“안 돼. 내가 마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네가 죽는 거.”

‘평범하게 생각하면 내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겠지만…….’

상대는 악마였다. 평범한 인간 따위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죽여 버릴 수 있는.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이고 마계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악마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바짝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한 손으로 내 목을 감쌌다. 공기가 따뜻해진 와중에도 그 손이 무척이나 서늘했다. 목을 틀어잡은 손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내 목을 비틀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내 시선에 악마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너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거지? 내가 널 죽일 수 없다는 걸.”

악마가 목을 감쌌던 손을 떼며 두 손을 들었다.

“너와 내가 계약으로 맺어지는 순간부터 난 네 목숨을 해칠 수 없어. 그 부분은 안심하라고.”

“그래도 뒤에서 수를 써서 날 빨리 죽게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요. 청부 살인이라든가 그런 것도 있고.”

“그러지 말라고 소원을 말하면 되잖아.”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던 악마가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런데 너 지금 나한테 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거야?”

“그렇지만…… 그쪽도 지금 나한테 알려 줬잖아요. 당신이 나 못 죽이게 하는 방법.”

내 말에 눈을 좌우로 굴리던 악마가 실수했다는 듯 경악하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 젠장! 말하지 말걸.”

“늦었어요.”

나는 웃으며 재빨리 소원을 빌었다.

“날 죽이면 안 돼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죽는 건 싫으니까.”

책 속이긴 해도 어렵게 얻은 두 번째 삶이었다.

‘게다가 팔자 좋은 귀족으로까지 태어났는데, 첫 번째 삶에서 못 해 본 호의호식은 해 보고 죽어야지 않겠어?’

문제는 갑자기 생겨 버린 이 악마님이었다.

“망했어……. 대가도 못 받고…… 사람도 못 죽여……. 하필 이렇게 재미없는 인간이 날 부르냐고……. 완전히 망했어…….”

나는 턱을 괴고 연신 망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악마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홀리는 악마답게 정말 잘생긴 외모였다. 캐서린의 다섯 물고기 중에서 가장 잘생겼다는 왕세자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흔하지 않은 은발에 붉은 눈동자라니. 이브리아는 흔해 빠진 적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인데 말이야.’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멍청한 얼굴로 자책하고 있는 얼굴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일 정도니까, 말 다 했지 뭐.’

나는 겉모습만은 매우 훌륭한 악마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내가 그쪽을 책임지면 된다 이거죠? 어쨌든 당신을 불러낸 건 나니까, 그 정도 책임은 질게요.”

“책임……”

악마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나를 보았다.

“어떻게 책임질 건데?”

그의 눈에 불만과 의구심이 가득했다.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공작의 딸이라 돈은 넘쳐 난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공작으로부터 상속받을 재산이 꽤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하나 건사하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곧 눈앞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인간과는 다른 식량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뱀파이어처럼 피를 먹는다든가?’

그래서 아까도 피 타령을 했던 게 아닐까?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재빨리 악마에게 물었다.

“악마도 인간이랑 먹는 건 똑같겠죠? 이상한 거 구해 오라고 하면 귀찮은데. 피나, 심장 같은 거요.”

내 질문에 악마가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를 어떻게 보고? 우리도 빵이랑 고기 먹는 문명인이거든!”

“그럼 문제없네요.”

“문제없다니? 먹고 자는 게 삶의 전부야? 내 삶의 재미는 어쩌라고! 악마는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일족이란 말이야!”

악마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헛웃음을 흘렸다. 이 악마님은 머릿속이 꽃밭인지, 진짜 재미없는 삶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이 악마님이 배가 부르셨네. 어디 한번 정말 삶이 재미없게 만들어 줘요?”

“흥. 네가 무슨 수로?”

“내 소원 다 들어줘야 한다면서요. 그쪽한테 먹지도 말고, 잠도 자지 말고, 매일 벽 보고 서 있으라고 소원 빌면 어떻겠어요? 삶이 참 재미없겠죠?”

자신만만하던 악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벽난로에 불이나 붙이라고 할 때 그 얼굴이네.’

기가 팍 죽은 그의 얼굴을 보며 내가 이겼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먹여 주고 재워 주면 책임은 다하는 걸로 해요. 재미는 알아서 찾으시고.”

악마가 입을 비죽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스럽지만 어쨌든 납득은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제 이쪽과는 대충 상황을 정리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이 악마를 뭐라고 소개할지가 문제였다. 외모가 너무 눈에 띄는 바람에 대충 얼버무리기도 힘들 것 같았다.

‘무슨 수든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때, 악마가 고민에 빠진 내 팔을 쿡 찔렀다.

“야. 인간.”

“네.”

“그런데 너 정말 전쟁 일으킬 생각은……”

“없어요.”

“……그래.”

단호한 대답에 악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분명 귀는 없는데…….’

꼭 실망으로 귀가 축 처진 대형견을 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가볍게 은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악마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 머리에 닿은 내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는 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 손은 뭐야?”

“어…… 위로?”

“그냥 평범한 개 취급 같은데…….”

악마라서 그런지 사람 마음 읽는 데는 귀신이었다. 나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하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쪽은 뭐라고 부르면 돼요? 진짜 이름은 막 부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한 말이지만 생각해 보니 중요한 문제 같았다.

‘지금처럼 계속 악마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이미 퍼져 있는 악명에 악마를 불러냈다는 유명세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원하는 이름 있어요? 있으면 그걸로 불러줄게요.”

“어차피 가짜라면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어. 뭐든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음. 그럼 멍청이라고 불러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멍청 씨?”

“야! 그건 아니지!”

악마가 내 손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 멍청이라니!”

“그러니까 뭐라고 부르면 될지 알려 줘요. 아니면 멍청 씨라고 부르지 뭐.”

“열 받아. 진짜, 어휴, 내가 어쩌다 이런 거한테 불려 나와서…….”

악마가 투덜거리며 제 머리를 헤집었다.

‘또다시 후회 타임인가?’

불을 다루는 악마라 몸에 열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벽난로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열을 모두 발산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니 갈수록 투덜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곧 침묵이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해리.”

“해리?”

“누군가 날 부른다면, 보통은 그 이름이야. 진짜 이름은 가족들끼리도 부르지 않으니까.”

“아. 그렇겠네요. 당신들한테 진짜 이름은 계약을 위한 거니까. 예전 계약자들도 당신을 해리라고 불렀어요?”

“넌 내 두 번째 계약자야. 첫 번째는 왕이 되고 싶다던 머저리였는데, 걘 날 어떻게 부르는지는 관심 없었어. 오직 내 힘만 원했지.”

“그 말은 내가 당신을 해리라고 부르는 첫 인간이라는 뜻이네요?”

“그…….”

나를 멍하니 바라보던 악마, 아니, 해리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스스로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는지 그가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 이상한 의미 부여하지 마!”

“제가 언제 의미 부여를 했어요?”

“했어! 방금 했잖아!”

“그냥 사실을 말한 거잖아요.”

“이봐 인간, 넌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 놓고 왜 이렇게 멀쩡해?”

“그게 낯간지러운 소리였어요?”

“그럼 그게 낯 안 간지러워? 와, 너 생각보다 무서운 애다?”

나는 다시 씩씩대기 시작하는 해리를 앞에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냥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 조금 손이 많이 가는 악마를 불러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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