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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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어차피 나의 구구절절한 심정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브리아 오베론’이 되었다.

이브리아 오베론.

소설 <레이디 캐서린>에 등장하는 흔하디흔한 악역이었다. 실존 인물이 아니라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뜻이다. 어쩌다 다른 사람이 돼 버린 것도 어이없는데 그게 종이 쪼가리 안에만 존재하는 인간이라니.

이 지점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 인생, 도대체 왜 이래?

소설 <레이디 캐서린>은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족을 가진 남작가의 외동딸 캐서린이,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내로라하는 왕국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로맨스 소설이었다.

후에 왕이 되어 왕국을 다스리게 되는 왕세자 카시안.

첫째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난 비운의 1왕자 리던.

검을 다루는 솜씨가 대륙 제일이라는 왕립 기사단장 엘.

평민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천재 학자 메이슨.

뒷골목에서 구를 대로 구른 정보 길드의 수장 루크.

캐서린은 이 남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거대한 어장을 멋지게 관리하다가,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 그러하듯 왕이 된 왕세자와 결혼해 왕비가 된다. 캐서린을 사랑하던 네 남자는 순순히 물러나 아련하게 그녀의 행복을 빌어 준다.

아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 세계는 여주인공 캐서린만의 행복을 위해 설계된 곳이었다.

그 세상 속에서 ‘이브리아 오베론’은 공작의 딸이자, 캐서린을 질투하며 온갖 패악을 부리는 왕세자의 약혼녀였다.

처음 시작은 소소한 괴롭힘이었다. 뒤에서 나쁜 소문 흘리기, 무도회에서 와인 끼얹기,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대놓고 비웃기 등등. 하지만 캐서린이 점점 왕국의 중심이 되어 갈수록 이브리아의 괴롭힘은 심해져 결국에는 그녀를 죽일 계획까지 세우게 된다.

물론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왕국 모든 곳에 귀가 있다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 캐서린 쪽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공작 영애가 세운 계획이 얼마나 어설펐겠냐고.’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원래 악역들의 계획이 그런 법 아닌가?

‘무슨 계획을 세우든 중간에서 보기 좋게 고꾸라지는 게 악역의 미덕이지.’

역시나 이브리아도 전형적인 악역답게 일 한번 제대로 쳐 보지 못하고 중간에 발각된다.

어설픈 작당에 비해 이후의 파장은 컸다. 사소한 괴롭힘 정도는 공작가의 힘으로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살인 미수는 상당히 민감한 사건이었다. 상대가 왕국 사람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 캐서린이었기에 더 그랬다.

캐서린 어장 속의 다섯 남자가 합심해서 이브리아를 몰아세우자 이름 높은 오베론 공작도 제 딸을 감싸 주지 못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브리아는 왕세자에게 파혼당하고 사교계에서 영원히 퇴출된다.

그 전까지 이브리아는 공작가의 막내딸로, 왕세자의 약혼녀로 늘 빛나는 삶을 살았다.

‘아마 그 빛나는 삶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었겠지.’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몰락이 찾아왔다. 당연하게도 이브리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오랜 방황 끝에 자살. 그게 악역 이브리아 오베론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나는 이브리아가 아니다. 아니, 이브리아는 이브리아인데, 어쨌든 그녀가 저질렀던 과거의 행적은 모두 내가 벌인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하나 죽어 나갔다면 이 몸을 차지한 죄로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서린은 멀쩡했고, 세상은 여전히 그녀를 위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내가 죄책감을 느끼며 지난 일을 바로잡겠다고 오지랖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살든 캐서린은 행복할 거니까.

이브리아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사람들의 애정을 가져가는 건 처음부터 여주인공 캐서린으로 정해져 있었다. 진짜 이브리아는 그걸 몰랐고, 결국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악역이라고 부르는 것도, 뭐 어때?

이브리아는 공작의 딸이라서 평생 집 안에만 처박혀서 놀고먹어도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인생에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할까? 허상에 불과한 종이 쪼가리 속 사람들의 애정이 없다고 해서 이 ‘내 인생’이 불행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만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주변 눈치 보지 말고 막 살자고.

“실망입니다, 이브리아. 당신이 분별 있고 사려 깊은 여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살인이라니…… 이런 무서운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몰려와서 빽빽대는 캐서린 어장의 물고기들 따위, 내가 알게 뭐람?

“이게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또 훗날 왕세자비가 될 여인으로서 용납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캐서린은 죽은 게 아니니까, 나의 죄목은 살인이 아니라 살인 미수였다.

“살인이 아니라, 살인 미수요.”

나는 피곤해져서 한숨을 내쉬며 물고기의 말을 정정해 줬다.

‘이걸로 드디어 마지막 다섯 번째로구나.’

처음에는 1왕자가, 그다음에는 기사단장이, 그 다음다음에는 천재 학자가, 그 다음다음다음에는 정보 길드의 수장이…….

그놈의 물고기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례대로 내게 찾아와 온갖 저주와 비아냥을 쏟아내더니, 이제는 <레이디 캐서린>의 남자 주인공, 왕세자 전하께서 화려하게 등장하셨다.

‘최종 보스 등장이네.’

달리 말하자면, 이 물고기만 잘 처리하면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할 놈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그대는 살인을 하려고……”

“네, 저도 제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니 유감이에요.”

나는 산뜻하게 웃으며 또 비난의 말을 뻐끔거리려는 물고기의 말을 가로챘다.

“반성하는 뜻에서 앞으로는 사교계에 나타나지 않고 조용히 살게요. 물론 저랑 파혼도 하고 싶으시겠죠? 그것도 할게요. 됐나요?”

내 선언에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물고기, 아니, 왕세자 카시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브리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던 모양인지 완전히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왜요? 그걸 바라서 이렇게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게요. 해요, 파혼.”

어차피 하게 될 파혼인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원작의 이브리아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고 울면서 카시안에게 매달리지만,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브리아는 구질구질하게 굴다가 밑바닥을 보는 악역에서 탈출할 거거든.’

내가 한 짓도 아닌 일들을 바로잡겠다고 오지랖을 부리는 빙의녀도 사양이다. 내 목표는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쿨하게 퇴장하는 악역이었다.

“자. 볼일은 다 보셨죠? 그럼 이제 그만 가세요. 계속 이렇게 제 앞길 막지 말고요.”

하지만 앞을 막고 선 물고기는 미동도 없었다. 이러다 날이 샐 기세였다.

“됐어요. 그냥 내가 가죠, 뭐. 길이 앞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돌았다. 탁 트인 시야가 아주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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