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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120/120)

120화

한 편, 티아는 샤를로즈 방으로 이동했다.

해리슨과 요한과 함께 말이다.

모험이라기에 한 일주일은 바깥에 나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티아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샤를로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해리슨과 요한은 티아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티아는 요한에게 짐을 달라고 했고, 그는 허공에 손을 뻗은 다음 허공 안에 손을 넣어 그녀의 짐을 빼 주었다.

“바닥에 놔 주세요. 요한.”

“응.”

어색한 분위기 속 요한은 티아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다.

해리슨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랜만에 티아와 가까이 있으니 긴장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티아는 둘 상태가 영 아니라고 생각해 소꿉친구로서 옛날이야기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옛날에는 저희 셋이 참 친했는데요. 그렇죠?”

“그렇지.”

“좋았지.”

해리슨과 요한이 티아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티아는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자신은 여자 주인공.

저 둘이 남자 주인공들이라면.

저 둘 중 한 명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으려나.

끔찍이도?

“폐하와 요한은 제가 좋아요?”

해리슨은 티아의 물음에 얼굴이 붉어졌다.

“조, 좋아해. 오래도록 좋아했어. 지독한 짝사랑이지.”

“나도 좋아해. 폐하가 가진 마음보다 더.”

요한은 이에 질 수 없었다.

티아에게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티아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저를 좋아하는 남자가 좋더라고요. 우리, 잘해 볼래요?”

티아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해리슨과 요한은 멍청하게 넋을 놓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싫어요?”

“좋아서. 너무 좋아서.”

해리슨은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주저앉으며 힘없이 대답했고, 요한은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렸다.

“나도 좋아. 미치도록.”

“좋아해 줘서 다행이네요. 그럼 잘해 봐요. 우리.”

티아는 저 둘이 샤를로즈에게 했던 행동을 용서했다.

그야 당사자인 샤를로즈가 괜찮다고 했으니.

처음에는 용서가 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화를 내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소중한 소꿉친구였다.

늘 제 곁에 있어 준 유일한 친구들.

그리고 저를 아껴 주며 챙겨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잃는 건 불행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티아는 해리슨과 요한을 선택했다.

남자 주인공들로.

이런 좋은 분위기는 샤를로즈의 등장으로 깨져 버리고 말았다.

“축하해, 티아.”

언제 온 것인지 인기척도 없이 뒷짐을 지고 걸어오는 샤를로즈의 모습에 티아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샤를로즈 언니! 언제 왔어?”

“조금 전에. 네 고백을 우연히 들었지 뭐야.”

“언니!”

“나도 이제 결혼을 하니 너와 자주 만나지 못해. 그러니 네 짝들을 제대로 찾아야지. 안 그래?”

“……그래도 난 언니가 제일 좋아.”

“안타깝지만, 난 루아의 것이거든.”

“언니, 벌써 그 악마 놈한테 마음을 다 준 거야?!”

“그럼. 내 남편인데.”

“부러워! 루아!”

루아와 레나가 허공에 갑자기 나타났다.

이건 아마도 샤를로즈의 신의 능력 중 하나인 듯싶었다.

티아는 갑자기 나타난 루아와 제레미를 둘러업은 레나의 등장에 또 까무룩 놀랐다.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요!”

“샤를로즈의 능력인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에요. 티아.”

“맞아요. 티아. 저는 그저 신님께 복종할 뿐이에요.”

“언니가 신? 정말 신이 된 거야?”

“응. 그레이스도 만들었어. 아니지, 환생시켰어.”

“그레이스는 어디 있는데?”

“루아가 업고 있어.”

티아는 그레이스의 환생이 궁금해 루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보이는 건 샤를로즈의 어린 시절과 빼닮은 여자애가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언니랑 똑같이 생겼어.”

“내가 그레이스를 닮은 거였어. 그레이스가 나를 만들 때 자신의 외형을 많이 참고했다고 하더라고.”

“신의 능력은 대단하네. 그런데 루아랑 언니 그리고 그레이스랑 같이 있으니 애 낳은 부부 같기도 하네.”

“그래? 그럼 내가 그레이스를 데려갈까.”

“언니, 장난 좀 쳐 본 걸로!”

“농담이야. 나도 루아와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지고 싶어.”

“언니는 아이라면 질색했었잖아. 옛날부터 아기는 싫다면서 성질을 내곤 했지.”

“예전과 지금 나는 다르잖아.”

“그러게. 샤를로즈 언니, 정말 많이 달라졌어. 그래서 내가 더 기뻐. 언니가 웃어 줘서, 행복해 줘서.”

티아는 어설프게 웃으며 민망한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샤를로즈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과 슬픔이라는 감정 때문에 불안했는데 이제는 그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샤를로즈, 그러니까 언니는 굉장히 안정적으로 보였다.

지금.

예전에는 조금만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잔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튼튼했다.

누가 건드려도 넘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기야 이제 남편도 생겼으니까.

언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건 씁쓸하지만, 언니의 선택이라면 존중할 것이다.

티아는 샤를로즈의 목소리에 숙인 고개를 들었다.

“내일 루아와 결혼식을 올릴 건데요, 다들 참석하실 거죠?”

“응!”

티아가 제일 먼저 반응했고, 나머지들도 긍정적인 반응을 내보였다.

그렇게 샤를로즈와 루아의 결혼식은 순조롭게 다음 날 진행하게 되었다.

모험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아쉬운 여행은 끝이 났고, 세상도 무사히 지켰다.

샤를로즈는 내일 하루만큼은 평화로운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레베크 공작저에서 자는 마지막 밤이었다.

샤를로즈는 정신을 차린 제레미와 티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제레미 오라버니, 티아. 고마웠어요.”

“……뭐를?”

제레미는 그간 그레이스 때문에 기억이 모두 날라가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도 몰랐다.

미간을 좁히며 제 형인 유진의 죽음에 대해 속으로 침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샤를로즈가 고맙다고 하니 이질감이 들었다.

“샤를로즈, 대체 뭐가 고마운데. 뭐가!”

제레미는 윽박을 지르며 샤를로즈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모두 다요. 저, 내일 결혼하잖아요.”

“……결혼? 누구랑?”

“루아요.”

“그 대악마와 결혼을 한다고?”

“네. 제레미 오라버니.”

“미쳤어? 넌 인간이고, 그 녀석은 대악마야! 죽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보네.”

하아.

조금 얌전해질 줄 알았는데.

날뛰네.

샤를로즈는 티아에게 대충 눈짓을 주었다.

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즈의 모든 행동에 침묵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끄덕임이었다.

“제레미 오라버니, 저는 이번에 영웅이 된 페롤로제나 공작과 결혼해요. 페롤로제나는 황가가 아끼는 위대한 가문이죠. 그러니 날뛰지 마세요. 악마도 뭣도 없어요.”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기억을 억지로 바꿨다.

자신과 루아에 관한 기억을 말이다.

제레미의 푸른색 두 눈이 풀리면서 샤를로즈의 멱살을 잡은 손도 자연스럽게 툭 떨어졌다.

“아, 축하해. 샤를로즈.”

곧 들려오는 제레미의 목소리는 얌전했다.

샤를로즈는 이제 됐다며 방긋 웃었다.

제레미가 평생 과거를 곱씹으며 고통받을 바에는 기억을 왜곡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는 샤를로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제레미 오라버니. 내일 푹 쉬세요. 굳이 오지 않아도 돼요.”

“알았어. 쉴게.”

제레미의 공허한 눈빛이 샤를로즈에게 닿았다.

샤를로즈는 제레미에 대해 일말의 양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제게 모질게 굴었던 나쁜 오라버니.

제게 이유 없이 집착하고 막대했던 나쁜 오라버니.

샤를로즈에게 있어 제레미는 그저 나쁜 사람이었다.

“그럼, 티아. 제레미 오라버니랑 같이 나가 줘. 오늘 밤은 혼자 있고 싶어.”

“아쉽다. 같이 자고 싶었는데.”

“미안. 마음이 뒤숭숭해서.”

“알았어. 난 언니를 존중해.”

티아는 제레미를 끌고 샤를로즈의 방에서 나왔다.

그렇게 샤를로즈는 루아와 레나도 없이 혼자 밤을 보냈다.

침대에 홀로 누워 있으니 주변이 허전했다.

늘 바글바글했었는데.

악녀의 엔딩은 씁쓸한 퇴장이 아니야.

악녀라고 무조건 불행하지 않아.

샤를로즈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죽은 제 어머니의 꿈을 꿨다.

[아가, 행복하거라.]

[네, 어머니.]

처음으로 죽은 어머니가 반겼다.

매일 어둡던 그 꿈이 아니었다.

샤를로즈의 두 눈에 눈물이 살짝 맺혀 매끄럽게 뺨을 타고 떨어졌다.

***

영웅, 루아 페롤로제나와 악녀라고 불리는 샤를로즈 레베크의 결혼식은 제국에서 큰 이슈 거리가 되었다.

얼마나 화려하게 결혼식을 진행했는지 수도 곳곳이 들썩들썩했다.

루아 페롤로제나와 샤를로즈 레베크의 결혼식을 보기 위한 하객들이 줄을 이었고, 폭군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황제 또한 참석해 큰 이슈가 되었다.

그렇게 샤를로즈 레베크는 샤를로즈 페롤로제나가 되었고.

세간에서는 그 둘의 결혼식은 선과 악의 결혼식이라고 불렸다.

영웅과 악녀와의 결혼식이니.

혹시 영웅이 악녀에게 홀린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페롤로제나 저택 안은 늘 화기애애했다.

“샤를로즈!”

“루아.”

“사랑해요, 미치도록.”

“저도요.”

루아는 샤를로즈에게 과감한 키스를 하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

샤를로즈는 그의 두꺼운 목에 두 팔을 둘러 그의 키스에 크게 반응했다.

샤를로즈는 평생 이 행복을 느끼며 신으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루아와 잘 살아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비로소 가짜 악녀는 이야기에서 퇴장할 수 있었다.

이제 가짜를 괴롭힐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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