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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20)

115화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방으로 향했다.

“샤를로즈 님!”

레나는 뒤이어 따라와 샤를로즈를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레나,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싶어.”

“세상을 지키셔야죠!”

“혹시 모르잖아. 우리가 세상을 지키지 못할지. 그럴 때 대비해서 나도 나 하고 싶은 거 할래.”

“샤를로즈 님!”

샤를로즈는 미소를 머금고 제레미의 방문을 열어 버렸다.

활짝 열린 방문 안으로 동화책에 푹 빠진 제레미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제레미가 아니지.

그레이스를.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레미 오라버니, 제가 사 준 동화책들은 재밌으신가요?”

“……으응. 재밌어!”

“그래요?”

그레이스는 샤를로즈는 방 안으로 들어오든 말든 별 신경 안 쓰고 동화책을 읽어 갔다.

“그 동화책, 신데렐라네요?”

“응! 재밌어!”

“제레미 오라버니는 신데렐라처럼 되고 싶으세요?”

샤를로즈는 그레이스의 옆에 찰싹 붙어 앉으며 물었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대답했다.

“응! 되고 싶어!”

“왜요? 왕자님과 결혼하고 싶어서요?”

“그것도 있고. 나도 행복하고 싶어.”

“그레이스는 언제가 제일 행복했어요?”

“나는 나를 모질게 굴었던 인간들이 내게 숭배한다며 소리쳤을 때. 아직도 그때가 생생해.”

“그레이스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니.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어째서요?”

“신이 되어 봤자 내 행복은 없더라고. 내 왕자님은 없었어.”

“그레이스의 왕자님은 어디에 있었는데요?”

“악마들이 사는 악마계에.”

“이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샤를로즈도 이안을 아네.”

“이안은 루아의 친자식과 다름없는 존재이기도 하고, 절 죽이려고 했거든요. 물론, 지금은 떠났지만요.”

그레이스는 신데렐라 동화책을 들던 두 손을 바닥에 차분히 내려놓았다.

“그래서 내가 그레이스라는 걸 알아서 이제 뭐 하려고, 샤를로즈?”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려 샤를로즈를 보며 물었다.

샤를로즈는 어깨를 으쓱대며 대충 대답했다.

“별짓 안 할 거예요. 그냥 저희와 같이 모험이나 떠나실래요?”

“…모험?”

“그레이스는 동료들과 모험을 동경한 적 없으세요? 저는 판타지 세계에 태어난다면 하고 싶었던 것 중 1순위가 모험이었거든요.”

“나도 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너와 적이야. 샤를로즈.”

“적이라고 무조건 적대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렇다고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적와 같이 모험을 떠나자는 정신 나간 발언을 하는 인간도 없지.”

“그레이스가 저를 악녀로 만들었잖아요. 악녀는 뭘 해도 욕을 먹거든요. 그러니깐 저랑 같이 세상을 지키는 모험이나 떠나요. 뭘 해도 욕먹을 거 아니까요.”

샤를로즈의 뻔뻔함에 그레이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샤를로즈. 넌 정말 기대 이상이구나.”

“뭐가 기대 이상인데요?”

“외모부터 매력?”

“그레이스가 악역을 좋아하니깐 이런 최고의 악녀가 태어날 수 있었던 거예요. 샤를로즈는 그레이스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내가 왜 악역을 좋아하는지는 안 물어보네? 그게 제일 핵심인데.”

“굳이 물어봐야 하나요? 알아서 다 이야기 하실 것 같은데.”

“정말이지. 샤를로즈, 정말이지 너무 뻔뻔해서 할 말을 잃을 뻔했잖아.”

“어차피 이렇게 나온 거 저도 세게 나오는 거거든요. 그레이스. 제 첫째 오라비를 죽이고 둘째 오라비의 몸을 가로채 간 도둑한테 예의를 차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도둑이라. 네 입장에서는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됐고, 왜 악역이 좋은 건데요? 레나도 모르는 눈치 같던데요.”

그레이스는 레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레나도 모르겠지.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레나는 슬그머니 샤를로즈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그레이스의 말에 경청했다.

“내가 왜 악역을 좋아하냐면, 세상이 싫어서야. 간단해.”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세상을 멸망하려는 거예요?”

샤를로즈는 이해가 안 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레이스는 이에 보충할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성녀와 악마의 혼혈이라는 건 알고 있지?”

“네.”

“나는 부모를 죽인 살인마에다가 마녀라고 불리는 아주 엄청난 괴물이었어. 세상 사람들은 나를 무척이나 경멸했지. 내게 다가오면 사람들이 죽곤 했으니까. 내 집은 어느 한 안전한 동굴이었어. 거기서부터 내 인생이 시작됐어.”

“어렸을 때 이야기인가요?”

“응. 내 어렸을 때는 암울했어.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악착같이 버텨 왔어. 내게 희망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내게 손을 내밀어 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날들이 오기만을 난 기다렸어.

그레이스는 마지막 말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런데 그 희망찬 날은 오지 않았군요.”

샤를로즈는 이미 예상한 듯한 말투로 그레이스를 떠봤다.

그레이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게 희망은 없더라고. 돌아온 건 나를 향한 매질과 돌멩이뿐. 따스한 손길은 없더라고.”

“신이 되기 전의 이야기죠?”

“응. 신이 되기 전의 이야기야.”

“당신 인생도 참 가시밭길이네요. 암울하기 그지없어요.”

“내가 샤를로즈라는 악녀를 좋아했던 이유도 샤를로즈의 인생이 바닥이거든. 희망이 없어서 좋아했어.”

“취향 참 독특하셔.”

“어두운 애들을 좋아했어. 예를 들자면 레나 같은.”

“레나도 실험체라는 걸 알고 계시는군요.”

“알고 있지. 신이 되고 나서 하늘에서 다 보고 있었으니까. 신의 제물로 바치는 애들을 다 죽였거든. 그런데 레나만은 살렸어. 저 애의 어두운 인생을 알아서.”

“그래서 악이 더 좋아졌다, 이 말인가요?”

“점점 악에 대해 물들였지. 내 첫사랑은 악마였고. 따지고 보자면, 나는 선이 싫어. 악이 더 좋아. 어둠이 좋아. 빛이 싫어. 해피 엔딩이 싫어. 하지만 나는 원하고 있어. 그 해피 엔딩을. 우습지?”

“별로, 우습지는 않아요. 저도 해피 엔딩을 원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저와 함께 떠나요. 당신의 악의 심장이 지금 저주의 숲에 있대요. 그곳은 어둠 천지라고 레나에게 들었어요. 그레이스가 좋아할 만한 곳 같은데. 같이 가요. 마지막일지 모를 여행인데.”

샤를로즈의 무덤덤한 어조에 그레이스는 샤를로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었다.

“내가 만든 샤를로즈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너는 강하구나.”

“사람은 언제든 강해질 수 있어요.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죠. 당신도 강해질 수 있어요. 사랑, 원하는 걸 쟁취하세요. 모든 걸 내려놓으세요. 그레이스.”

“이미 모든 건 다 내려놨어. 배드 엔딩을 기다릴 뿐이야.”

그레이스의 공허한 두 눈을 본 샤를로즈가 그레이스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짜악!

그레이스의 얼굴이 샤를로즈의 손힘에 저절로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샤를로즈 님!”

샤를로즈의 돌발적인 행동에 레나가 깜짝 놀라 샤를로즈를 말렸다.

“그레이스에게 손대지 말아 주세요, 샤를로즈 님! 제발요! 그레이스를 놔줘요!”

레나는 울부짖으며 샤를로즈의 오른팔에 매달렸다.

샤를로즈는 싸늘한 눈빛을 그레이스에게 주며 말했다.

“아프죠, 그레이스?”

“……응.”

오랜만에 맞은 것 같았다.

그레이스는 부풀어 오른 제 뺨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예전에도 이런 느낌이었지.

늘 몸에 상처를 달고 살았지.

늘.

그레이스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또르륵, 떨어졌다.

“그레이스, 모든 걸 내려놓으면요. 아픈 것도 안 아파요. 울지도 않아요. 당신은 아직 모든 걸 내려놓지 않았어요. 세상에 미련이 있다고요. 바보처럼.”

“내가, 삶에 미련이 있다고?”

“그럼 왜 아파하고 울겠어요?”

“그건-.”

“그레이스. 이제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그냥 세상의 이물질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이물질? 내가?”

“이물질보다는 신으로서의 명예로운 소멸이 더 낫지 않겠어요? 저 같으면 그럴 텐데.”

그레이스의 공허한 두 눈빛이 갑자기 사나워졌다.

“나는 이물질이 아니야! 나는 사랑받길 원하는 평범한 생명체라고! 평범한…… 생명체야.”

“레나, 죽은 신이 환생하는 방법은 없어?”

“딱 하나 있어요.”

“뭔데?”

“이 두 개의 심장을 합쳐서 죽은 신에게 건네주는 고대의 주술이 있더군요.”

“흑주술사는 세상의 많은 것을 알고 있네.”

“아무래도 신에게 다가가고 싶은 종족이라서 신에 대한 거의 모든 건 다 알고 있어요. 제 머릿속에도 들어 있고요.”

“그럼 또 하나 임무가 생겼네.”

“…뭔데요?”

“그레이스를 인간으로 다시 환생시키는 중대한 임무.”

샤를로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제 손 잡아요. 그레이스. 당신을 환생시켜 드릴게요. 꼭.”

“……샤를로즈?”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럼 평범하게 살 기회를 만들어 가면 되잖아요. 지금요.”

“샤를로즈, 나는.”

“고민할 시간 없는데요. 그리고 제 팔 떨어지겠어요.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악마가 아닌 인간이 제게 건네는 따스한 손길에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눈을 질끈 감고 샤를로즈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도 나는 아직 네 적이야. 나는 악에 사로잡힌 몸이야. 나를 죽이고 날 살려 줘. 샤를로즈.”

“좋아요. 그레이스. 그러도록 하죠.”

그렇게 샤를로즈는 그레이스를 제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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