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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120)

113화

“네.”

레나의 품에 있는 선의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는 걸 느끼자 얼른 뒷걸음질 쳤다.

아직 이안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선의 심장이 왜 반응이 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안이 아직도 나를 찾아?”

계속되는 그레이스의 질문에 레나는 착하게도 잘도 대답해 주었다.

“네.”

“지금 어디 있어?”

“떠났어요. 어디론가.”

“아아, 그렇구나. 떠났구나. 이안도.”

그레이스는 굳은 얼굴을 빠르게 풀고선 다시 선뜻 웃는 얼굴로 바꾸었다.

레나는 그레이스가 들어 있는 제레미의 얼굴 표정이 확확 바뀌자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도 세상에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 그레이스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본능적으로 레나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스, 그만 소멸하세요.”

“내가 왜? 레나는 내가 영영 사라졌으면 좋겠어?”

“세상의 사랑을 알려 준 건 그레이스예요. 저는 그 세상을 지키고 싶을 뿐이고요.”

“레나는 정말 순수해. 아직도 내 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니. 역시 내 유일한 보좌관이야.”

“이제는 당신의 보좌관이 아니에요. 샤를로즈 님의 보좌관이에요.”

“주인이 바뀌어도 첫 주인을 잊기는 힘들걸.”

그레이스는 눈을 살포시 감더니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곧 레나의 앞까지 도달했다.

레나는 갑작스러운 그레이스의 행동에 뒷걸음치다가 그레이스의 손길이 제 어깨에 닿자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레나. 열심히 싸워 봐. 네 새로운 주인과. 나도 열심히 싸워 볼게.”

“그레이스! 제발 소멸해요. 그게 마음이 편하잖아요. 그리고 그레이스가 남긴 시험은 시나리오를 깨는 거 아니었어요?”

“응. 그게 내 시험이야. 샤를로즈가 열심히 깨고 있는 모양이던데. 요즘 성과가 더딘 것 같더라. 저렇게 여자 주인공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설마, 티아에게 뭔 짓이라도 한 건 아니죠?”

“뭔 짓이라니, 내 소중한 여자 주인공에게 뭔 짓 할 정도로 나 그렇게 나쁜 신 아니야.”

“지금 그레이스는 타락했잖아요.”

“타락한 건 맞지만, 비겁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지금도 내 선의 심장을 네게서 빼앗을 수 있지만 빼앗지 않고 있잖아. 아직 내 이성은 조금 남았다 이 말이지.”

그레이스는 툭툭, 레나의 작고 둥근 어깨를 두들긴 후 길고 두꺼운 두 팔을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샤를로즈가 준 동화책이나 읽으러 가야겠다.”

“…샤를로즈 님은 당신이 그레이스라는 거 모르고 있죠?”

“응. 의심하다가 말던데. 그 아이도 순진해.”

터벅, 터벅.

그레이스가 레나에게서 떠나려고 하자 레나는 그레이스를 붙잡으려다가 차마 팔을 마저 내뻗지 못했다.

그저 이를 악물며 그레이스를 못 본 척 넘어갔다.

마지막 남은 아량으로 넘어가 주려고 했다.

지금은.

레나는 빠른 속도로 레베크 공작저에서 나와 루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동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레이스가 시나리오를 망가트리지는 않겠지?

그레이스가 제레미의 몸을 망가트리지는 않겠지?

그레이스가…….

스스로 죽지는 않겠지.

레나는 꽤 오랜만에 본 그레이스가 매우 지쳐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불안한 무언가가 계속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꿈틀거림을 느꼈다.

‘샤를로즈 님, 제발 그레이스를 소멸시켜 주세요.’

결국 도달한 결론은 ‘그레이스의 소멸’.

레나는 그레이스가 이 잔혹한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게 그레이스에게는 해피엔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흑주술사답게 인간이 낼 수 없는 속도로 페롤로제나 공작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보다 급한 것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미루게 된 여자 주인공의 생일 파티보다 더.

레나는 그레이스만 소멸된다면 모든 것이 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페롤로제나 공작저 정문 앞을 서성이다가 공작저 주변을 지키던 바로크엘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크엘, 안녕하세요.”

“어, 너는 흑주술사?”

“샤를로즈 님의 보좌관 레나예요.”

“아, 맞아. 레나라는 이름이 있었지.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샤를로즈 님이 여기 계신 것 같아서요.”

“응, 아까 왔어. 오늘 무슨 일이래. 다들 이곳에 찾아오고.”

“급한 일이에요. 죄송한데, 샤를로즈 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급해요!”

“으음. 급하다면 어느 정도로 급한데?”

“세상의 종말이 걸려 있는 급한 용무예요.”

“아아, 세상의 종말이라. 아주 급한 용무군.”

바로크엘은 레나가 눈에 띄게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인 것 같아 저택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로 했다.

거짓말이면, 죽이면 되니까.

바로크엘은 샤를로즈와 루아가 있는 루아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노크를 했다.

“루아~ 레나가 왔어. 아주 급한 용무래. 들어간다?”

“샤를로즈 님!”

레나는 두 발을 동동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바로크엘은 레나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놀려 주려고 하는데, 그때 침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곧 루아의 긴 셔츠 하나만 입고 나오는 샤를로즈가 보였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얼굴이 보이자 무릎을 꿇었다.

“샤를로즈 님, 악의 심장을 찾았어요.”

샤를로즈는 레나의 둥근 윗머리를 빤히 보다가 그래? 라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내일 혼인 신고서를 처리해 달라고 폐하께 부탁해야겠네.”

“오늘 떠나셔야 할 것 같아요.”

“어째서? 조금 시간을 둬도 된다고 했잖아.”

“그레이스를 만났어요.”

레나는 솔직하게 다 불었다.

그레이스의 소멸을 위하여.

“그레이스는 제레미 도련님의 몸에 들어가 있었어요.”

“…하, 그래서 낯설게 느껴졌던 거구나.”

“샤를로즈 님, 그레이스가 폭발하기 전에 얼른 가서 악의 심장을 없애야 해요.”

“루아, 일이 갑자기 꼬였는데 혼인 신고서는 나중에 처리해도 괜찮겠어요? 지금 레나 꼴 좀 봐요. 살려 달라고 빌빌대고 있거든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루아가 한숨을 폭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샤를로즈는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는 자신의 것.

혼인 신고서는 나중에 처리해도 괜찮았다.

샤를로즈의 변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놓였으니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루아가 문 앞까지 긴 다리로 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고 있는 레나를 향해 물었다.

“모험은 며칠이 걸릴 것 같지? 악의 심장의 위치는?”

“악의 심장의 위치는 저주의 숲, 마르헨티에 있다고 선의 심장이 반응했어요.”

“마르헨티라. 정확한 위치까지 잡지는 못한 모양이지?”

“네. 선의 심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까운 위치만 알려 주지 정확한 위치는 알려 주지 않아요. 악의 심장이 또 어디론가 사라질 가능성도 높구요.”

“심장이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왜 사라지지?”

“신의 심장 두 개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거든요.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시간만큼 지내고 떠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어요. 제가 가진 선의 심장은 그레이스의 육체가 사라지면서 제가 얻은 거라서 제 품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떠나지 못하게끔 가둬 두고 있거든요.”

“음. 복잡하네.”

샤를로즈는 루아와 레나의 대화를 들으며 그저 얼른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 이참에 그레이스도 억지로 데려가는 게 어때? 아니지.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깨려면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들이 필수지. 다 같이 여행 겸 모험을 떠나는 것도 괜찮겠어.”

샤를로즈는 귀찮은 일은 한 번에 끝내자는 판단을 머릿속에 땅땅 내렸다.

당혹함에 레나의 푸른 눈이 빠르게 흔들렸다.

샤, 샤를로즈 님……?

조용한 목소리로 갑자기 일을 크게 만드는 샤를로즈를 말리려고 했지만, 돌진하는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그래, 다 같이 끝내 버리자. 세상이 멸망하든 평화롭든. 아예 끝을 내 버리자. 우리.”

샤를로즈는 이 지친 빙의에, 아니 퇴장에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다.

자신은 이제 너무나도 지쳐 더는 귀찮은 일을 하기 싫었고.

세상이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 해 볼 거 다 해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에.

갑작스러운 사랑도, 여동생의 집착도, 돈지랄도, 부하의 관심도, 악역의 역할도.

아아, 이제 다 잊고 떠나고 싶네.

그렇게 생각하자 계속 무거웠던 마음이 뭔가 홀가분해졌다.

아직 일이 끝나기도 전인데도 말이다.

샤를로즈는 환한 미소를 머금고 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나, 가자. 마지막으로 깽판이나 더 쳐야겠어. 악녀로서.”

“샤를로즈 님…?”

“루아, 가요. 세상의 끝을 우리가 정할 차례예요.”

루아는 이미 준비가 끝났다며 겉옷을 입으며 샤를로즈의 뒤를 쫓았다.

바로크엘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오려고 했지만, 루아가 막았다.

“바로크엘, 집 잘 지키고 있어.”

“엥, 나는? 안 가?”

“바로크엘, 미안해요. 주연들만 초대된 파티라서요. 나중에 후기는 꼭 들려드릴게요.”

“에에에?”

또 혼자 남겨진 바로크엘은 절규했다.

왜 자꾸 자신만 따돌리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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