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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120)

111화

샤를로즈는 제 덩치보다 3배 이상은 큰 셔츠가 원피스가 되어 버리는 난감한 상황에 바지를 입히려는 하녀들을 그냥 물렸다.

굳이 바지는 입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어차피 무릎 밑까지 오니까 뭐, 굳이 입지 않아도 될 것 같네.

샤를로즈는 제 몸에 걸쳐진 헐렁한 루아의 셔츠를 내려다보며 대충 옷 주름만 정리했다.

슬슬 루아를 부르려고 그의 침실 방문을 열고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그러자 익숙한 두 명의 악마가 보였다.

루아와 바로크엘.

둘이 무슨 대화를 하길래 저렇게 서로 상반된 분위기일까?

샤를로즈는 둘의 대화가 너무나도 궁금해 인기척을 죽이고 그 둘의 뒤에서 대화를 엿들었다.

운이 좋게도 그 악마 두 놈은 샤를로즈가 뒤에 있는지도 모르고 실컷 떠들고 있었다.

“샤를로즈가 그렇게 좋아? 네 성격이 아예 변해 버릴 정도로?”

“좋아. 아니, 미치도록 사랑해.”

“악마가 사랑에 미치면 답도 없다던데, 네가 보기 좋은 예시였군.”

바로크엘은 루아의 사랑에 빠진 모습에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선대 대악마께서 네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 뒤지셔야 했는데. 안타깝네.”

“갑자기 선대 이야기는 왜 나오는데.”

“네가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니까.”

루아가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

샤를로즈는 루아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기에 바로크엘의 등을 콕콕 찔렀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데요?”

“그거야 당연히 루아 새끼가 싫어하는 선대-. 샤를로즈?”

바로크엘은 제 뒤를 찌르는 누군가를 정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방정한 입을 떠들었다.

뒤를 돌아보고나서야 그게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샤를로즈 레베크.

루아의 현 약혼녀이자, 그와 곧 결혼하게 될 인간 여자.

“…샤를로즈!”

루아도 뒤늦게 샤를로즈가 제 뒤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인기척을 숨긴 거지?

대악마와 그다음으로 힘센 악마에게 인기척을 숨길 수 있는 인간이라니.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인간들의 인기척이라면 웬만한 하급 악마들까지도 다 알아차릴 수준이었다.

바로크엘도, 루아와 같은 생각으로 샤를로즈가 어떻게 인기척을 없앤 것인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론이 나오지 않자 결국 그녀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바로크엘은 호기심이 생기면 그 호기심을 풀 때까지 고집하는 스타일이었으므로.

“샤를로즈, 어떻게 인기척을 숨겼어?”

“네? 그냥 조용히 다가간 것뿐인데요?”

샤를로즈의 황당한 대답에 바로크엘은 점점 더 알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뿐이야?”

바로크엘은 샤를로즈의 어깨를 잡으며 이 망할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애썼다.

루아는 샤를로즈에게 쉽사리 손을 가져가는 바로크엘의 손목을 잡았다.

“손 떼. 바로크엘. 네 궁금증은 알아서 풀어. 샤를로즈 괴롭히지 말고.”

“아니, 루아. 네 머리로도 이해가 안 가잖아. 어떻게 인간이 악마를 속여!”

“그럴 수도 있지. 샤를로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잖아.”

“아, 하긴. 신의 후계자라고 했지.”

바로크엘은 루아에게 손목이 꺾이기 싫어 얼른 샤를로즈의 어깨에 손을 떼며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샤를로즈는 둘의 대화가 끝나보여 이제 제 물음에 대답해 보라며 바로크엘의 소매를 빠르게 붙잡았다.

“바로크엘, 어디 가요. 루아가 싫어하는 이야기 해 줘요.”

“샤를로즈…….”

루아는 왜 그러냐며 샤를로즈를 말렸지만, 그녀는 본래 속내까지 시꺼먼 악녀 아니었던가.

인간이든 악마든 싫어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듣고 싶은 법.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에게 어서 말해 달라며 그의 소매를 잡은 손을 떼지 않았다.

루아는 저 얇디얇은 샤를로즈의 손목을 잡았다가는 부러질 것 같아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루아가 싫어하는 이야기가 왜 듣고 싶은데…?”

마지못해 바로크엘이 한마디했다.

그러자 샤를로즈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루아의 모든 걸 알고 싶거든요.”

“…지독하네. 샤를로즈.”

“어머, 칭찬인가요, 바로크엘?”

“칭찬이면 칭찬이지.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봐.”

“저도 당신 같은 악마는 처음 봐요. 화제가 넘어가기 전에 얼른 이야기 해 줘요. 루아가 싫어하는 이야기요. 전에 저를 찾아왔을 때 그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잖아요.”

“그거는.”

“샤를로즈, 일단 바로크엘의 소매를 놓고 이야기해요. 제가 다 이야기해 드릴게요.”

“정말요?”

그 순간, 샤를로즈는 능숙하게 바로크엘의 소매를 붙잡던 두 손을 놓았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행동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천천히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옷 제 셔츠죠?”

“아, 네. 루아 셔츠가 너무 커서 바지까지는 못 입겠더라고요. 그래서-.”

루아의 귓가가 새빨개지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바로크엘은 루아가 인간처럼 감정표현하고 있는 지금이 신기한 건지 킥킥대기 시작했다.

평소같았으면 바로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샤를로즈가 앞에 있어서 그런지 루아는 온순한 양에 불과했다.

바로크엘은 한 30년 정도 놀려 먹을 수 있는 재밋거리가 생겼다며 속으로 좋아했다.

루아는 바로크엘의 반응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샤를로즈를 힐끗 보며 고개를 계속 숙이며 부끄러워할 뿐이었다.

샤를로즈는 루아가 왜 저러는지 눈치를 채지 못해 고개만 갸웃거렸다.

“바로크엘, 제 모습 이상해요?”

“아니. 예쁜데?”

바로크엘의 대답에 조금 전까지 부끄러워하던 루아가 고개를 쳐들고선 바로크엘의 멱살을 붙잡았다.

“샤를로즈를 쳐다본 그 두 눈. 잘 감쳐 놔.”

“어어, 왜 그래. 나는 예쁜 걸 예쁘다고 진심으로 칭찬해 준 건데!”

“샤를로즈 보지 마. 돌아서. 바로크엘.”

샤를로즈는 루아의 살벌한 반응이 신선했다.

계속 보고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루아가 싫어하는 이야기를 이제는 들어야 겠다며 샤를로즈가 루아의 등을 콕콕 찔렀다.

“루아, 바로크엘이랑 그만 놀고 저랑도 놀아 주세요. 싫어하는 이야기마저 해 주셔야죠.”

“아.”

루아는 그 이야기만큼은 정말 하기 싫었지만, 샤를로즈가 정말 원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운을 띄었다.

“사실 별 이야기 아니에요. 제 선대 대악마와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바로크엘이 자꾸 절 놀리려고 꺼낸 거예요.”

“사이가 안 좋은데 싫은 이야기는 또 뭐예요?”

“하아. 그러니깐요. 선대 대악마는 저를 만들어 낸 인간으로 치면 아버지죠. 아버지는 절 완벽한 악마로 만들기 원하셨어요. 저는 그런 아버지 밑에 컸고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었어요. 스스로 목숨을 끊었더군요.”

“유언은 없었어요?”

“없었어요. 차라리 유언이라도 있었으면 덜 원망스러웠을 텐데요.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궁금하기도 하면서 왜 혼자 떠나신 건지, 왜 저를 만들고 그렇게 가 버린 건지.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바로크엘은 은근슬쩍 루아의 슬픈 이야기에 말을 덧붙였다.

“루아가 선대 대악마를 정말 잘 따랐거든. 진짜 친부처럼. 사이가 좋았지. 그래서 루아가 더 싫어해. 그 죽은 선대 대악마를.”

샤를로즈는 왠지 모르게 루아의 과거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런지 샤를로즈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루아의 등에 제 두 팔을 휘감았다.

“뭔가 이해가 돼요. 루아가 왜 싫어하는지.”

루아는 갑작스러운 샤를로즈의 백허그에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자신이 아는 샤를로즈는 이렇게까지 스킨십을 많이 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이러한 집착도 하지 않았다.

생소한 샤를로즈의 모습에 루아는 심장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받았다.

샤를로즈의 변화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루아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바로크엘의 앞이라서 더 꾹 참았다.

바로크엘이 자신의 눈물까지 알면 100년은 놀릴 게 분명했으니.

100년은 무슨.

죽기 직전까지 놀릴 것이 눈에 훤했다.

“샤를로즈, 얼른 방으로 들어가요.”

“엥, 나는? 나는?”

바로크엘은 떠나가려는 루아의 모습에 당황해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루아, 바로크엘도 같이-.”

“샤를로즈. 지금은 제 마음대로 하게 해 주세요. 제발요.”

샤를로즈는 제 손목을 붙잡고 가는 루아를 보며 어리둥절했다.

바로크엘은 허무하게 떠나가는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루아, 너 진짜로 미쳤구나. 선대 대악마가 이 꼴을 보시면 대성통곡을 하시겠네.”

바로크엘은 킥킥대면서 왠지 모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악마는 인간을 사랑하면 죽는다고들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루아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으면 했다.

오랜 소꿉친구이자 자신의 유일한 라이벌인 루아에게는 행복만이 있길 바랐다.

***

샤를로즈는 다시 루아의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쾅!

문이 닫히고 루아가 굉장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를로즈가 먼저 저를 유혹한 거예요.”

“…루아?”

루아는 샤를로즈의 어깨를 살짝 밀어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 위에 올라탄 루아의 두 눈은 이미 맛이 간 상태였다.

“샤를로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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