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수건 줘 봐요.”
“왜요?”
“닦아 주고 싶어서요.”
루아는 조금 전 집사에게 받은 하얀 수건 하나를 샤를로즈에게 건네주었다.
샤를로즈는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기 앉으세요.”라며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루아를 앉혔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그녀에게 어여쁜 신랑감으로 자리 잡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루아의 시커먼 속내도 모른 채 샤를로즈는 그의 젖은 몸을 수건으로 천천히 닦아 내렸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민망한 부분에까지 손이 닿으니 귓가가 괜스레 붉어졌다.
맨 처음에는 젖은 머리카락을 위주로 수건으로 만지더니 점점 내려가 얼굴, 목덜미 그리고 셔츠 안에 손까지 넣는 것이었다.
루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셔츠 안에 있는 샤를로즈의 손을 붙잡았다.
“샤, 샤를로즈.”
“네?”
“여기서부터는 제가 닦을게요.”
“어째서요? 어차피 첫날밤에 다 볼 텐데요?”
첫날밤.
루아는 샤를로즈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달아올랐다.
그야 그는 결혼만 생각하고 있었지, 첫날밤에 대해서 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서였다.
첫날밤.
인간들의 첫날밤은 어땠더라.
악마들끼리의 결혼 첫날밤은 서로의 악의 기운을 나누며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인간들은 다르지 않은가.
루아는 예고 없이 훅 들어오는 샤를로즈의 발언에 그저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 틈을 타 샤를로즈가 닦지 못했던 루아의 몸통을 닦기 시작했다.
“하아, 샤를로즈.”
“이러다가 감기 걸려서 제게 옮기면 얼마나 큰일이게요.”
“그, 그렇군요.”
예민한 곳을 만진 것인지 루아의 미간이 잠시 좁혔다가 펴졌다.
샤를로즈는 아랑곳 말고 루아의 상체 묻어 있는 물기를 대충 닦아 냈다.
샤를로즈는 어떤 한 퀘스트를 성공한 사람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선 땀이 나지도 않은 이마 위를 손등으로 닦아 내는 척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나저나.
‘나도 루아를 껴안는 바람에 드레스가 젖어 버렸네.’
끄응.
샤를로즈는 루아를 보고 싶어 왔다가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
예비용 드레스도 없었고, 또 이 상태로 바깥에 나갔다가는 100% 감기 확정이었다.
“저기, 루아.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말만 하세요. 다 들어줄 테니.”
“제 드레스가 마를 때까지 루아의 옷을 잠깐만 빌려 입어도 될까요?”
루아는 샤를로즈가 수줍게 말하는 모습에 저도 안절부절못했다.
“그, 무슨 옷을 드릴까요?”
“편한 옷 아무거나 주세요.”
뭐, 다 클 것 같지만요.
샤를로즈는 뒷말을 생략했다.
그리고 루아가 하녀장을 불렀다.
“네, 주인님.”
하녀장은 빠른 속도로 응접실을 노크한 다음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까탈스러워 보이지만, 일 처리가 확실해 루아의 마음에 드는 하녀장이었다.
“샤를로즈의 드레스를 말려 줘. 아, 그리고 샤를로즈에게 입힐 내 옷도 좀 주고.”
씻을 건가요?
루아가 묻자, 샤를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씻는 건 생략할게요.”
“뭐, 샤를로즈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샤를로즈를 존중하니까요.”
“고마워요, 루아.”
“그럼 주인님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게 어떠신지요? 드레스룸도 방 옆에 달려 있으니 더 편하실 것 같아서요.”
하녀장의 예리한 말솜씨에 샤를로즈는 루아를 향해 괜찮냐며 물었다.
루아는 괜찮다며 샤를로즈의 어깨를 붙잡고 제 방으로 끌고 갔다.
제 어깨에 얹은 차가운 루아의 두 손은 여전했다.
어쩜 이리도 차가운지.
그의 손은 언제나 차가웠다.
얼음장처럼 꽝꽝 언 것처럼 말이다.
샤를로즈는 어쩌다 보니 이 차가운 손길에 푹 빠졌다.
루아의 두 손이 따뜻하면 이제는 이상할 것 같았다.
차가워야지 루아다웠다.
따뜻하면 루아가 아닌 것만 같아 조금은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 어느덧 루아의 침실 앞에 다다랐다.
하녀장은 다른 하녀들을 불러오겠다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샤를로즈에 말했고, 샤를로즈는 알겠다며 루아와 함께 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루아의 침실 안은 꽤 넓었다.
자신의 방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넓고 침대도 푹신해 보였다.
“루아는 잠 같은 거 필요 없지 않아요?”
“필요 없어요.”
“그런데 침실을 잘 꾸며 놨네요?”
“샤를로즈를 생각해서 꾸며 봤어요. 마음에 드시나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샤를로즈가 마음에 든다니. 기뻐요.”
“루아도 참. 기뻐할 일이 참 많네요.”
샤를로즈는 루아와 대화하는 동안 젖은 드레스가 무겁고 거슬리는지 루아에게 부탁 하나를 더 했다.
“루아, 제 드레스 좀 벗겨 주실래요?”
“…네?”
루아는 순간 제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드레스를 벗겨 달라니.
루아는 샤를로즈의 드레스를 벗길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아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혼자 벗기기에는 무리가 있어서요. 도와주세요.”
“그건 하녀장이-.”
“루아가 벗겨 주면 무슨 기분일까 궁금해서요.”
샤를로즈의 그 호기심 때문에 루아는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
여차여차히 샤를로즈의 드레스를 어떻게든 벗겼다.
드레스 안에 새하얀 슈미즈가 있어 다행히도 알몸은 아니었다.
샤를로즈는 얼른 루아의 옷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껴안았다.
물론 다 감겨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포근했다.
“루아, 우리 결혼하면 이런 일 많을 텐데 괜찮겠어요?”
“……좋아요.”
“의외로 대범하시네요. 루아.”
“결혼하면 이런 일이 많다면 저야 좋죠. 샤를로즈가 제게 의지하는 모습이 정말 좋아 미치겠거든요.”
늘 관심 없고 무뚝뚝한 미인의 얼굴.
자신이 유혹하려고 해도 넘어오지 않는 여자 인간.
어떻게 해서든 무너트리고 싶었지만, 번번이 실패로 넘어가 이제는 자신이 수그리며 들어가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적도 난생처음이었다.
샤를로즈는 루아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이상하게 루아의 품에 안기면 샤를로즈는 기분 좋은 웃음 소리를 내었다.
이제는 일종의 버릇이 되어 버린 듯 싶었다.
루아의 품이 좋아서 그런 듯했다.
곧 하녀장이 노크를 하며 안으로 하녀들을 이끌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가씨, 최대한 작은 사이즈로 주인님의 옷을 가져오기는 했는데 여전히 클지도 모르겠네요. 입혀 드리는 걸 도와드릴게요.”
“그럼 부탁해요.”
샤를로즈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녀들이 부리나케 움직였고, 루아는 저절로 바깥에 내쫓기게 되었다.
샤를로즈가 옷을 다 입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라는 엄청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말을 기가 막히게 잘 들었기에 그녀가 제 옷을 다 입을 때까지 저택 주변을 돌기로 했다.
그러다가 비에 젖어 우울감에 젖어 혼자 궁상을 떠는 바로크엘을 발견했다.
“바로크엘?”
“여자에 미친 새끼.”
바로크엘은 루아를 노려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감히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냐며.
성질을 살짝 내려다가 참았다.
루아가 화났을 때의 모습을 알기 때문이었다.
루아는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 모조리 학살하는 학살형 타입이었다.
바로크엘처럼 악마들을 모아 놀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지고 노는 그런 개구쟁이 타입이 아니었다.
루아는 아주 무서운 악마였다.
바로크엘은 그걸 잘 알고 있어서 가만히 입 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불평, 불만을 제기한다면 제 심장은 아마 파괴될 것이 분명했다.
아아, 인생.
바로크엘은 몸이 흐늘흐늘해지며 모든 것이 하기 싫었다.
제 심장은 루아에게 멋대로 줘 버렸고, 자유도 얻지 못해 주인이 되어 버린 루아의 주변에만 맴돌면 무료함을 홀로 달래야 했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이 망할 루아는 모를 것이다.
“바로크엘, 내 말 좀 들어봐.”
“어엉?”
바로크엘은 루아가 갑자기 수줍게 나오는 태도에 역겨워 구토가 쏠릴 뻔했지만 어떻게든 참아 냈다.
자신의 인내에 대단하다며 속으로 박수까지 쳐 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바로크엘은 물어봐 달라며 계속 눈짓하는 루아의 행동에 어쩔 수 없이 루아의 명령에 따랐다.
루아는 잠시 행복에 젖어 있는 표정을 지으며 샤를로즈가 찾아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샤를로즈가 내게 드디어 의지하는 것 같아. 젖은 내 몸도 수건으로 닦아 주고. 이제야 샤를로즈와 결혼할 사이라는 게 새삼 느껴져.”
“그러니깐 샤를로즈가 처음으로 네게 애정 행각을 했다, 이 말이야?”
“응.”
“그게 그렇게도 자랑할 일인가?”
“너는 몰라. 샤를로즈의 냉정함을. 처음 만났을 때의 샤를로즈는 예쁜 인형 그 자체였어. 감정 따위 깃들어 있지 않은 그런 인간이었다고. 그런데 나 때문에 많이 변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매우.”
루아는 샤를로즈의 이야기만 나오면 혼자 흥분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마도 샤를로즈가 루아를 제대로 봐주지 않아 생긴 습관 같았다.
바로크엘은 엿이나 먹으라며 루아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그런데도 루아는 화를 내지 않고 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루아, 이놈 정말 좋은가 보네.’
보통 같으면 죽기 직전까지 갈굴 텐데.
어색한 루아의 행동에 바로크엘도 모든 것이 어색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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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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