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럼 그레이스는 네 구원자고, 네 인생의 희망이겠네?”
“그랬었죠.”
레나를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순간 여태껏 감시자의 눈을 사용하느라 집중하고 있던 정신이 살짝 흐트러졌다.
“그럼 세상이 잔혹하다는 건 부모에게 팔려 가는 바람에 강제로 흑주술사가 되어 세상이 싫다는 말이었어?”
“뭐,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겠네요.”
레나는 흑주술사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잠시 떠올렸다.
[레나, 이 천박한 것이! 어디서 실험 시간을 빼먹으려고 그래?!]
늘 제게 폭언을 퍼붓는 자신의 어머니와.
[넌 흑주술사로서 재능이 있어. 그러니 죽을 만큼 아픈 실험을 참도록.]
자신의 감정과 고통은 상관없다는 듯 모든 건 알아서 해결하라는 망할 아버지.
그리고 제게 집착하는 언니까지.
개 같은 집안이었다.
레나는 매일 밤, 잠에 들거나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살기가 점점 싫어졌다.
그러다가 레나는 흑주술사들 사이에서 전례 없는 일을 터트렸다.
그건 바로 흑주술사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신과의 만남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레이스가 레나를 첫 번째 신의 보좌관으로 간택했다.
흑주술사들은 레나를 신의 보좌관으로서 존경했고, 또 제2의 레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흑주술사들은 무리한 실험을 이어감으로써 신에게 간택 받기 위해서 하나둘씩 죽어 가고 있었다.
레나는 신의 곁에서 그 비참한 모습들을 지켜보고만 하고 있었다.
레나는 제발 저를 이은 보좌관이 더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했다.
흑주술사의 희생자는 저로 충분했으면 좋았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한계가 없었다.
한 번, 신에게 간택 당하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점점 욕심이라는 것이 흑주술사들의 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레나, 너는 이 세상이 좋아?]
레나는 신의 보좌관으로서 열심히 서류 정리를 하다가 말고 갑작스러운 그레이스의 물음에 설렁설렁 대답했다.
[별로요.]
[왜?]
[저는 이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아요. 지금도 죽고 싶은 생각뿐이에요. 신님.]
[신님이 뭐야, 그레이스라고 가볍게 불러.]
[신님에게도 이름이 있나요?]
[나도 인간이었던 몸이었으니까. 당연히 이름이 존재하지.]
[인간이라고요? 신님이?]
[나는 성녀와 악마의 혼혈이야. 보다시피 이것 봐 봐. 심장도 두 개야. 세상은 선과 악이 있어야지 돌아가. 그래서 내 심장도 두 개야. 선의 심장과 악의 심장.]
레나는 서류에 집중하던 걸 멈추고 신비로운 광경에 입이 절로 열렸다.
그레이스의 두 손에 새하얀 심장과 새까만 심장이 둥둥 떠다녔기 때문이었다.
[레나, 나는 세상이 원망스러워. 그래서 그런지 악의 심장이 내 몸을 지배하려고 해.]
[그럼… 악의 심장을 없애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선만 남잖아.]
[선만 남으면 그레이스는 어떻게 되는데요?]
[소멸하지.]
[영원히요?]
[나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어. 신도 갑작스럽게 된 거라.]
[어떻게 해서 인간이 신이 된 건가요?]
[음. 성녀와 악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각성을 하게 되는데 그 각성이 신의 각성이면 저절로 신이 되어 하늘에 있는 작은 신들이 마중 나와. 만약에 각성에 실패한다면 죽어.]
[그럼 그레이스는 각성에 성공한 거네요?]
[이것도 일종의 신의 시험이야.]
[신의 시험이요?]
[내 전대의 신이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의미지. 신이 되려면 신의 시험이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날 각성으로 시험한 거야. 신의 시험은 신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
[그러면 그레이스는 다음 신에게 어떤 시험을 내걸고 싶으신가요?]
그레이스는 레나의 물음에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내가 만든 시나리오를 깨 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나를 죽이거나!]
[시나리오요?]
생소한 단어에 레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레이스는 그 시나리오에 대해 레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예쁜 성녀의 사랑 이야기를 도와주면 그 시나리오, 아니 연극은 끝! 신의 시험은 끝나는 거지.]
[너무 쉬운 거 아니에요?]
[음, 그런가. 나는 동화책 같은 연극을 신의 시험으로 내보내고 싶어. 재밌잖아. 재미도 있고 예쁜 애들도 구경하고.]
[별난 분이시네요. 그레이스는.]
[음, 여자 주인공의 외형은 레나와 똑같이 설정 해야겠다. 아, 악역도 있어야 재밌겠지? 그럼 악역은 나와 비슷하게 설정할까.]
[아직 다음 대 신이 나오려면 멀었어요. 그레이스. 그러니깐 일이나 하세요!]
레나는 끊임없는 일에 투정을 부리며 그레이스와 하하 호호하며 지냈었다.
먼 과거에서 현실로 다시 넘어온 레나가 어두운 낯빛을 깨끗하게 지우며 샤를로즈에게 힘겹게 말을 걸었다.
“그레이스를… 꼭 죽여 주세요.”
레나는 그리움에 잠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샤를로즈에게 애원하듯 부탁했다.
“제발, 저의 그레이스를 죽여 주세요. 샤를로즈 님.”
샤를로즈는 흐느끼는 레나를 등으로 느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응, 네 부탁대로 그레이스를 죽여 줄게. 어떻게 죽여 줄까?”
“다시는 살아날 수 없게.”
“꼭 그렇게 죽여 줄게.”
감사해요.
샤를로즈 님.
레나는 엉엉 울며 그레이스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날려보냈다.
잔혹한 세상을 찬란하게 볼 수 있게 만든 장본인.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장본인.
그레이스.
그녀를 이제는 놓아 줄 때가 되었다.
진정으로.
레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다시 감시자의 눈으로 세상을 감시했다.
사라진 악의 심장을 찾기 위해서.
“레나, 행복은 먼 곳에 있지 않아.”
샤를로즈는 레나에게 그리 말한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보고 싶어진 루아에게로 가기 위해 치장을 준비했다.
‘보고 싶어, 루아.’
무슨 까닭일까.
루아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루아가 그레이스처럼 사라지면 어쩌나 싶어서.
루아가 결혼하기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괜한 생각이었지만.
모든 게 불안한 지금.
샤를로즈는 루아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지금 당장.
***
루아는 바로크엘과 연무장에서 대련을 하고 있었다.
요즘 통 몸 쓰는 일도 하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고, 결혼 전까지 샤를로즈를 마음대로 만나지 못해 짜증도 났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바로크엘을 불러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보는 눈들이 있기에 루아와 바로크엘 둘 다 오로지 진검으로만 몸을 풀었다.
바로크엘은 몸이 유연했다. 루아의 파격적인 검 속도에 몸을 연체동물처럼 움직여 겨우 피했다.
“스트레스 쌓인 걸 내게 풀지 말라고!”
바로크엘은 연속으로 들어오는 날카로운 검날에 기겁했다.
그러면서 이미 대련에 진심인 루아의 두 눈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주인을 둬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지.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기운이 빠져 왔다.
하지만 여기서 항복 선언을 외친다면 루아가 자신을 얼마나 더 굴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죽일 거야.
분명히.
바로크엘은 루아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허점을 발견해 그곳에 제 검을 쑤셔 넣으려는데.
“주인님! 샤를로즈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집사의 우렁찬 목소리에 루아는 바로크엘의 검을 한 손으로 부러트려 버렸다.
“어? 뭐야?!”
바로크엘은 대련 후 처음으로 한 공격이 허무하게 끝이 나자 허탈함이 몰려왔다.
루아는 집사의 말에 검을 바로크엘에게 안겨 주고 빠르게 저택 안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운이 나쁘게도 비가 울창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비를 한 몸에 맞은 루아는 집사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몸을 대충 닦았다.
“샤를로즈는 어디 있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님, 일단 목욕부터-.”
“아니, 샤를로즈를 먼저 볼 거다.”
“그러다가 감기라도 드시면 큰일입니다!”
“괜찮아.”
집사는 못 말리는 제 주인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결국 비를 쫄딱 맞은 주인을 그 상태로 손님이 계신 응접실로 보내줘야 했다.
***
샤를로즈는 편지 하나 없이 멋대로 루아를 찾아와 그가 불편해할까 봐 불안했다.
집사가 내준 홍차를 조용히 마시며 루아를 기다렸다.
‘나의 구원자. 내 세상을 깨트린 소중한 존재.’
루아.
샤를로즈는 레나의 구원자 이야기를 듣자니 루아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자신의 구원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구원자는 지금 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구원자는 지금.
쾅!
응접실 문이 열렸다.
샤를로즈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늘에 쏟아지는 비 때문에 쫄딱 젖은 채로 저를 반기는 루아를 발견 할 수 있었다.
“샤를로즈!”
“루아, 꼴이 그게 뭐예요. 비는 왜 다 맞았어요?”
루아는 샤를로즈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철벅, 철벅 다가와 허리를 최대한 굽혀 그녀를 껴안았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샤를로즈.”
아아, 자신의 구원자는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과 마음이었다.
샤를로즈는 루아의 젖은 품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것도 꽤 나쁘지 않은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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