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유진 레베크 공작의 죽음은 제국에서 큰 이슈가 되었고, 해리슨과 요한은 장례식 마지막 날에 찾아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티아에게는 안타깝게 되었다며,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해리슨은 제레미에게 가문을 위해 살라며 황실 제1기사단장 직위를 해제했다.
제레미는 해리슨의 명령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계속 그 자리를 비워두는 것은 폐하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며 오히려 감사하다는 뜻을 표했다.
해리슨은 제레미가 이렇게 얌전하고 차분한 기사였나, 이질감이 느꼈다.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던 놈이었는데.
형이 죽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기라도 한 모양인가?
해리슨은 제레미의 변화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요한 역시 제레미보다는 티아에 관심이 많았기에 제레미의 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들 제레미의 몸에 ‘그레이스’가 스며들었다는 걸 모른 채 유진 레베크의 장례식을 끝냈다.
그러고 3일이 지났다.
제레미는 오늘도 저택에서 머무르며 샤를로즈를 감시했다.
샤를로즈는 장례식 이후로 계속 보이는 제레미가 신경 쓰였지만 불편함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정신이 망가졌으면 이리도 얌전히 있을까.
그저 불쌍할 따름이었다.
뭔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간, 제레미를 보고 있자니 조금 짠했다.
그래서 샤를로즈는 제레미를 볼 때마다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오늘도 제 뒤를 밟는 제레미를 바라보는 샤를로즈의 눈빛에는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제레미 오라버니. 왜 자꾸 숨어서 저를 보세요? 제가 아직도 무서운가요?”
제레미는 샤를로즈가 무섭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심리 치료를 받는 동안.
유진 오라버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야 제레미가 심리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제레미 오라버니의 심리 치료서에는 죄다 샤를로즈가 무섭다, 자신의 꿈에 샤를로즈가 나와 바깥에 나가기가 무섭다 등.
죄다 자신이 무섭다는 내용뿐이었다. 그것이 불쾌하긴 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샤를로즈 나름대로 말이다.
“그냥.”
“이리 와서 가까이서 저를 보세요. 왜 이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세요?”
“우리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잖아.”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죠. 과거는 과거일 뿐. 그리고 제가 잘못했다고 사과도 여러 번 했잖아요. 아직도 저를 용서하지 않으신 건가요?”
“그냥.”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하네.
샤를로즈는 제레미를 보며 속으로 답답해했다.
종종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나, 제레미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할 때면.
샤를로즈의 인내심이 폭발하곤 했다.
그래도 제레미 앞에서는 자제하는 편이었다.
속으로 혼자 끙끙 앓아서 문제였지만.
샤를로즈는 속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제레미를 향해 밝게 웃어 주었다.
“아 참, 오라버니. 저 결혼해요.”
“……결혼?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어보는 제레미를 보며 샤를로즈는 순간 당황했다.
왜라니.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겨서요. 제가 결혼하려면 제레미 오라버니의 동의도 필요해요. 동의해 주실 거죠?”
“결혼은 어떻게 하는 건데?”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하는 제레미에 샤를로즈는 이걸 어쩌나 싶었다.
갑자기 정신연령이 어려지기라도 한 건가?
유진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니고서야 왜 이렇게 순진하게 물어보는 걸까.
‘혹시 내게 한번 엿 먹어 보라고 시위라도 하는 건가?’
뭐, 일리가 있긴 하네.
제레미 오라버니는 샤를로즈를 호감이 아닌 비호감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샤를로즈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제레미의 동의가 필요했다.
결혼하기 위한 첫 번째 난관은 오라버니의 동의였다.
외동이라면, 부모님의 동의만 있으면 됐지만 형제가 있다면 말이 달랐다.
형제들의 그것도 남자 형제 한 명, 여자 형제 한 명의 동의가 꼭 필요했다.
물론,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난관은 여동생의 동의였는데 생각보다 그 난관을 쉽게 통과해서 이 첫 번째 난관만 통과한다면 루아와의 결혼을 치를 수 있었다.
샤를로즈는 제레미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음이 맞으면 하는 게 결혼이죠. 단순하게 생각하면 돼요.”
“음, 그렇구나.”
제레미는 ‘결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또 이 이상한 이질감.’
샤를로즈는 제레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이질감을 느꼈다.
꺼림직하면서도 반가운 이 느낌.
불편해.
샤를로즈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제레미의 행동에 하나씩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제레미가 이상하면서도 이상하지가 않아. 이 기분 뭐지.’
꼭 누가 제레미의 몸에 빙의한 것 같아.
‘그냥 내 착각인 걸까.’
샤를로즈는 평소 현실 세계에서 감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다.
지금 그 감이 발동한 것 같은데.
단순한 착각인가.
심리적으로 망가진 제레미를 테스트하기에는 너무 양심이 찔려 할 수 없었기에 일단은 그냥 찝찝한 상태로 넘어가기로 했다.
그저 손뼉을 짝짝 치며 제레미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니깐 제레미 오라버니, 제 결혼서에 도장을 찍어 줘야 해요?”
“도장이 뭐야? 그거 찍으면 어떻게 되는데?”
궁금한 게 많은 어린아이처럼 계속 물어보는 제레미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하던 그때.
동화책이 떠올랐다.
“제레미 오라버니, 제가 선물 하나 드릴까요?”
“선물? 뭔데?”
제레미는 선물이라는 미끼를 단숨에 물었고, 샤를로즈는 음침하게 웃었다.
당장 시중을 시켜 제레미에게 질문 쇄도를 받지 않기 위해 동화책 여러 권을 사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여러 명의 시중이 샤를로즈의 명령에 따라 책을 사 날랐고, 그 결과 제레미의 방에 동화책이 한아름 쌓였다.
“와아, 책이다.”
“제레미 오라버니. 이 책 읽으면서 정신 좀 차려 주세요. 꼭이에요?”
“으음.”
제레미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동화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샤를로즈는 어느 순간 동화책에 빠져드는 제레미의 모습에 얼른 그의 방에서 나왔다.
후우. 피곤하다.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네.’
샤를로즈는 쌓여가는 피로에 얼른 방으로 들어가 쉬고 싶었다.
하지만 제 방에 들어가서도 샤를로즈는 쉴 틈이 없었다.
바로 그레이스가 이 세상 어딘가에 남긴 악의 심장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레나는 감시자의 눈을 활용해 온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방문을 조용히 닫은 뒤 레나의 옆에 털썩 앉았다.
“심장의 위치는 대충 찾아봤어?”
“찾고 있기는 한데……. 아직 세상의 반도 못 봤어요.”
“어느 정도 봤는데?”
“지금 딱 사 분의 일 정도 봤네요.”
“아직도?”
“아무래도 흑주술사가 저 밖에 남지 않아서…… 이 감시자의 눈을 활용하려면 흑주술사여야만 하거든요. 아시잖아요, 신의 보좌관이 흑주술사라는 걸요. 하지만 지금은 흑주술사는 멸종했죠.”
유일하게 남은 흑주술사가 바로 저고요.
샤를로즈는 레나의 마지막 말에 기운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진 것 같아 샤를로즈는 피곤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만 끝내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레이스의 악의 심장까지 없애야할 줄이야.
꼭 RPG게임의 초보자에게 최종 보스를 죽이고 보상을 받으라는 일 같이 느껴졌다.
샤를로즈는 저처럼 피곤함에 절어 있는 레나를 힐끗 바라봤다.
“레나, 피곤하면 한숨 자. 깨워 줄게.”
“아니에요. 저희 흑주술사는 잠을 안 자도 돼요. 그저 피곤함만 느낄 뿐이에요.”
“그래도, 괜찮겠어?”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얼른 그레이스를 소멸시켜야 해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요.”
“레나는 정말로 세상을 좋아하나 보네.”
샤를로즈는 레나의 등에 기대며 물었다.
레나는 감시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해요. 한때는 잔혹한 세상이었지만, 지금은 지키고 싶은 세상이에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어?”
샤를로즈는 문득 궁금해졌다.
레나의 개인적인 일이.
레나가 바라보는 이 세상이.
“그럼 재미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실래요?”
“들을래.”
“저는 본래 흑주술사가 아니었어요. 흑주술사들은 인간들의 탐욕으로 만든 실험체예요. 제 부모라는 사람은 흑주술사 가문에 저를 팔았어요. 제가 5살 때요.”
“흑주술사가 실험체라니.”
“흑주술사들은 신을 모시기 위해 인조적으로 만든 종족이에요. 그래서 소수 종족이라고도 불리죠. 흑주술사로 다시 태어난 인간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럼 네 언니도?”
“아, 제 언니도 흑주술사 실험에 저보다 더 빨리 통과한 실험체일 뿐이에요. 딱히 감정이 없거든요, 저희 자매는요. 아, 언니는 제게 꽤 집착했지만요.”
“맞아. 네 언니는 널 많이 아끼던데. 넌 그러지 않네?”
“저는 흑주술사로서 사는 세상이 싫었어요. 제 가족을 원망했죠. 거기에 언니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그렇구나. 너도 꽤 힘들었겠네.”
“제가 17살 때, 잔혹한 이 세상에서 저는 제 구원자인 그레이스를 처음 만나게 되었어요.”
레나는 갑자기 말을 하다가 말았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그리움에 젖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순수했던 그레이스에 대한 그리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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