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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20)

107화

루아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 샤를로즈에게 말을 건넸다.

“샤를로즈, 괜찮아요?”

“루아, 와 줬군요.”

샤를로즈는 제 오라버니의 장례식에 와 줘서 고맙다며 어설프게 웃었다.

여기는 체통을 지켜야 하는 자리였으므로.

바로크엘도 이번에는 루아의 보좌관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는지 샤를로즈를 보자마자 반가움 대신 딱딱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샤를로즈 아가씨를 뵙습니다.”

“거창한 인사는 됐어요. 바로크엘.”

“네. 샤를로즈 아가씨.”

“언니, 루아 옆에 있는 분은 누구야?”

샤를로즈는 제 옆에 릴리가 있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하도 주변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경황이 없었다.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뒤늦게 릴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루아의 보좌관이신 바로크엘이라고 하는 분이셔. 처음 뵙지? 나도 어제 처음 봐.”

“아아, 그렇구나. 안녕하세요, 저는 티아 레베크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바로크엘은 릴리를 보자마자 성스러운 기운을 느꼈다.

‘설마 성녀?’

그러고 보니 샤를로즈의 여동생이 성녀라고 했었다.

그러면 샤를로즈를 언니라고 부르는 저 여자 인간이 바로 이번 대 성녀인가 보군.

호오, 성녀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신기하네.

성스러운 기운에 제 몸에 남아 있는 악의 기운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소멸당할지도.

바로크엘은 속으로 킥킥대며 자신이 성녀로 인하여 소멸당하는 상상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 여유는 곧 루아로 인하여 끝났지만.

“바로크엘, 나는 샤를로즈를 돌봐야 하니, 너는 레베크 공작저 주변을 감시 좀 하고 있어.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연락하고.”

“알았습니다. 주인님.”

바로크엘은 루아의 눈치 없는 행동에 혀를 날름 내밀고는 홱 몸을 돌려 넓디넓은 레베크 공작저 주변을 뱅뱅 돌아야 했다.

바로크엘은 인간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주변을 돌면서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인간들과 인맥도 쌓았다.

참 재주 있는 사교 능력이었다.

루아는 자신과 샤를로즈 사이를 방해하는 존재 하나를 떠나보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샤를로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샤를로즈는 루아의 물음에 꽤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게 말이죠. 여기서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자리를 옮겨야 하는데-.”

“샤를로즈.”

그 순간이었다.

제레미가 인기척도 없이 샤를로즈의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순간 샤를로즈는 놀라 뒤로 자빠질 뻔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제레미가 저리 차분히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분명 미쳐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제레미는 샤를로즈의 상상보다 얌전했다.

꼭 많은 것을 잃은 사람처럼.

“장례식장은 내가 지키고 있을게.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고 있어.”

루아는 오랜만에 제레미를 봐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제레미 공자. 절 기억하시나요?”

“누구더라?”

루아는 자신을 기억해 내지 못하는 제레미를 잠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샤를로즈의 옆에서 쥐 죽은 듯 조용히 있긴 했지만, 분명히 자주 얼굴을 마주쳤을 텐데.

자신을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제레미에 대한 의심을 품은 루아가 경계를 갖추고 대답했다.

“샤를로즈와 약혼서를 나눈 사이예요. 루아 페롤로제나라고 해요.”

“아아, 샤를로즈의 약혼자분이시구나. 반가워요.”

샤를로즈는 또한 제레미의 어색한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제레미 오라버니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아닌데.

루아만 보면 발작을 일으켰는데.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하는 게 이상해.

샤를로즈 역시 제레미에 대한 의구심이 늘어갔다.

“제레미 오라버니, 괜찮아요?”

샤를로즈는 제레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제레미는 괜찮으니 얼른 쉬고 오라며 제 여동생들을 저택 안으로 억지로 집어넣었다.

샤를로즈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제레미 오라버니는 미쳐 있었다.

정신을 놓았으니 루아를 기억을 못 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루아와 릴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나까지 모두 데리고 제 방으로 데려갔다.

방문이 닫히자 샤를로즈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

“루아, 릴리. 잘 들어. 비상이야. 무서운 일이 터졌어.”

샤를로즈의 말 한마디에 루아와 릴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샤를로즈가 저렇게 반응하는 것일까.

샤를로즈의 방 안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그 살벌한 분위기를 깬 건 다름 아닌 레나였다.

레나는 미친 듯이 뛰는 불규칙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샤를로즈를 대신해 이 비상사태에 대해서 설명에 나섰다.

“그레이스가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해요.”

루아는 그레이스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레이스는 죽었다면서요?”

“그게, 죽은 줄만 알았던 그레이스가 세상을 떠돌고 있더라고요. 레베크 공작을 죽인 것도 그레이스예요.”

릴리는 레나의 충격적인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레이스가 왜 유진 오라버니를 죽여? 어째서?”

릴리의 질문은 샤를로즈가 대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샤를로즈가 알고 있었으니까.

“신이 되기 위한 시험으로 유진 오라버니가 희생된 거야. 나 때문에 유진 오라버니가 죽은 거야.”

아주 조금의 죄책감이 서려 있는 샤를로즈의 목소리에 릴리는 어깨가 축 늘어졌다.

사실 릴리는 제 오라버니들이 탐탁지 않았었다.

그야 샤를로즈 언니를 괴롭혔으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막상 샤를로즈 언니 때문에 유진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이런 이상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왜 그랬냐며, 언니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게 운명이구나 싶었다.

언니가 신이 되기 위해서 제 첫째 오라비가 희생되었다는 것에 매우 안타까웠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더 나아가 심오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샤를로즈는 릴리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자 달래 줘야 하나 걱정을 했다.

“릴리, 괜찮아?”

“응. 괜찮아. 오빠는 죗값을 치른 거야. 언니를 괴롭힌 죗값을. 난 그렇게 생각해. 이건 다 언니를 위한 거니까. 나도 언니를 위해 희생할 수 있으면 희생할 자신 있어.”

샤를로즈는 새삼 릴리가 자신에게 정말 진심이었구나 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럴 필요 없어. 선과 악이 평등하게 존재해야지 세상에 평화가 찾아와. 루아와 릴리가 죽어 버리면 세상은 멸망해. 내 말 맞지, 레나?”

레나는 잘 이해하고 있다며 샤를로즈의 말에 제 말을 덧붙였다.

“샤를로즈 님의 말대로 선과 악의 최고이신 두 분은 절대로 죽으시면 안 돼요.”

루아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며 레나에게 묻자, 그녀가 차분히 답했다.

“그레이스가 이 세상에 악의 심장을 부서트려야 해요. 그러려면 선과 악의 힘과 샤를로즈 님이 필요해요.”

루아는 장례식이 끝나면 빨리 결혼하고 싶었는데 일이 굉장히 꼬이게 되었다며 속으로 한탄했다.

세상이 멸망하면 샤를로즈와 함께 결혼 생활도 제대로 보내지도 못할 테니 일단 세상을 구해야 하는구나.

루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샤를로즈와의 결혼을 남몰래 계속 꿈꿔 왔던 루아는 샤를로즈를 가지기 위해 또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감을 감출 수 없었다.

루아의 낯빛이 썩 좋지 않은 걸 빠르게 눈치챈 샤를로즈가 그를 향해 말을 툭 하고 내뱉었다.

“루아, 결혼 때문에 걱정이에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럼 우리 결혼하고 모험을 떠날래요?”

샤를로즈의 제안에 루아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정말요? 그래도 돼요?”

“약속은 지켜야죠. 일단 혼인 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세상의 멸망을 막고 하는 게 어때요? 서류상 부부도 부부잖아요.”

“좋아요, 정말 좋아요!”

루아는 보기 드물게 기뻐하다 못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드디어 샤를로즈가 자신의 품에 직접 다가오려고 하는 것이 눈에 보여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그럼 장례식이 끝나는 동시에 황궁 행정과에 혼인 신고서를 승인받고 모험을 떠나요. 레나, 그래도 되지?”

레나는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지만, 제 주인의 행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좋아요. 대신 빠르게 처리해야 해요. 그레이스의 악의 심장을 찾으려면 꽤 긴 모험이 될 것 같으니까요.”

샤를로즈가 레나를 향해 악의 심장을 감시하고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레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말이죠. 악의 심장이 사라졌어요. 얼마 전에 살짝 악의 심장이 잘 있나 감시의 눈으로 봤는데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더라고요.”

샤를로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정말로 악의 심장을 찾기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를 모험에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야?”

샤를로즈는 설마 하는 눈빛을 레나에게 보냈다.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제 감시의 눈과 그레이스가 죽기 전 몰래 가져온 선의 심장을 이용하면 빠르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레나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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