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바로크엘은 저택에 죽은 자가 나타나자마자 약혼서를 샤를로즈에게 빠르게 건네주고 도망치듯 레베크 공작저에서 나왔다.
왠지 모르겠지만, 레베크 공작 가문의 일원이 죽으니 역한 기분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인간 시체를 아무리 봐도 아무렇지 않았던 바로크엘이 이런 반응을 내보이는 건 분명히 무언가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크엘은 악마의 능력을 사용해 루아가 있는 페롤로제나로 빠르게 향했다.
루아가 있는 집무실 안으로 엄청난 속도로 도착한 바로크엘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레베크 공작저에-.”
“레베크 공작이 죽었다고?”
루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크엘은 어떻게 알았냐며 물었다.
그러자 루아는 악마의 눈은 장식이냐며 바로크엘을 꾸짖었다.
“아, 그렇지. 네겐 악마의 눈이 있었지.”
“너와 샤를로즈와의 살가운 분위기도 다 보고 있었어.”
루아의 눈빛이 돌연 차갑게 변했다.
바로크엘은 루아의 압박감과 살기에 어설프게 웃었다.
“약혼서를 건네주려는데 딱딱하게 나오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분위기 전환 좀 했을 뿐이야.”
“말 하나는 잘하네. 바로크엘. 그래서 내 약혼서를 본 샤를로즈의 반응은 어땠지?”
“당연히 좋아했지. 네가 악마의 눈으로 봤다면 내게 왜 물어보는 거야.”
바로크엘은 투덜거리며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다가 레베크 공작의 죽음에 대한 꺼림직한 기분이 들었다고 루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루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로크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세세히 말해 주었다.
“아니, 샤를로즈와 열심히 열띤 대화를 하던 중에 집사라는 놈이 들어와서 우리 대화를 방해했어. 그, 뭐냐 주인님이 죽었다는 거야.”
“계속 말해.”
“샤를로즈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하며 헐레벌떡 뛰어갔어. 설마 그전까지만 악마의 눈을 사용하고 레베크 공작이 죽은 후에는 완전히 악마의 눈을 사용하지 않았어?”
“내 악마의 눈은 반쪽이잖아. 하나는 이안이 가져가서 한계가 있어. 나는 그저 네가 샤를로즈에 들이댈까 봐 감시하려고 악마의 눈을 킨 거고.”
“대단한 새끼. 아무튼 간. 나도 샤를로즈의 뒤를 조용히 밟았어. 그리고 역한 기분이 들었어. 속이 울렁거리면서 정신이 아찔해지더라.”
“고작 인간의 시체를 보고서?”
“고작 인간의 시체를 봤으면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겠지.”
“그럼 대충 뭐 때문인지 짐작해 봤어?”
“샤를로즈가 그 죽은 인간 가슴에 꽂힌 단검을 가져오더니 혼자 중얼거리더라고. 슬쩍 보려고 했다가 악취 때문에 더는 못 있겠다 싶어서 도망 왔지. 이렇게.”
“정말이지. 너는 쓸모 없네.”
“아니, 루아. 너도 그 자리에 있어 봐. 악마들이 맡기 힘든 그런 향이었다니까!”
“하아, 그나저나 샤를로즈는 괜찮으려나. 그래도 제 가족이 죽었는데.”
“샤를로즈 멘탈이 엄청나게 강하더라. 제 죽은 오라비를 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샤를로즈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아 맞아, 루아. 왜 샤를로즈의 비밀을 다 이야기해 주지 않은 거야.”
“샤를로즈의 이야기는 샤를로즈에게 들었으면 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하면 조금 그렇잖아.”
루아는 여유롭게 홍차를 마시며 인간인 척 연기했다.
바로크엘은 루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독한 새끼.’
바로크엘의 잿빛 눈동자가 루아를 향하다가 루아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루아가 홍차가 든 찻잔을 살짝 들더니 한 잔 마시겠냐고 권했다.
바로크엘은 인간의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꽤 정중하게 거절했다.
바로크엘은 지금 홍차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샤를로즈와의 결혼이 더 미뤄질 수 있다며 갑자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루아는 잠시 무언가 생각을 하더니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장례식과 결혼식을 같이 하는 건 어떠려나.”
“루아, 내가 너를 아무리 오래 봤다고 하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례와 인간이 축복받아야 할 결혼을 같이한다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한 번에 빨리빨리 처리하면 좋잖아. 나도 샤를로즈도.”
“루아, 너는 인간 세계에서 최고의 영웅이야. 이렇게 막 나가면 안 된다?”
바로크엘은 갑자기 발작하는 루아를 달래 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다가 샤를로즈가 싫어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아는 샤를로즈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인간이야.”
“샤를로즈와 너는 주변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주변에는 너희에게 매우 관심이 쏠려 있어. 그러니깐 좀 생각 있게 행동해 줘.”
바로크엘은 자신의 주군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루아, 이 새끼.
원래는 똑똑하고 차분하고 공과 사를 구별 잘 하는 놈이었는데.
인간 여자와 사랑을 한 번 빠지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바로크엘은 앞으로의 고생길이 훤히 열린 것 같은 기분에 우울감에 젖었다.
결국은 루아는 바로크엘의 말대로 샤를로즈가 먼저 청혼을 말하지 않는 한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바로크엘이 샤를로즈에게 약혼서를 건네준 지 이틀 정도 지났을 때, 레베크 공작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편지가 왔다.
루아와 바로크엘은 새까만 정장을 입고 가문 마차를 이용해 레베크 공작저로 향했다.
***
새까만 정장을 입은 샤를로즈와 제레미 그리고 릴리는 낯빛이 어두웠다.
어느 한 묘비 앞에 공손히 두 손을 맞잡으며 넋을 놓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지금 이 순간이 딱히 슬프지 않았다.
그저 예정에도 없는 원작 여자 주인공의 첫째 오빠가 자살을 하는 바람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언니.”
릴리는 샤를로즈의 옆에 딱 달라붙어 샤를로즈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샤를로즈는 릴리에게 눈길을 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불렀냐는 듯이.
“유진 오라버니, 언니가 죽인 거 아니지?”
릴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해 버렸다.
샤를로즈는 릴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유진 오라버니는 자살했어.”
“하지만 유진 오라버니가 죽을 때 쓴 단검이 언니 거라면서.”
“릴리, 여기서 날 의심해 봤자 돌아오는 건 없어. 게다가 난 그 시간에 약혼서를 받고 있었고. 그때 넌 뭐 하고 있었는데 유진 오라버니가 죽었는데도 집무실에 오지도 않았어?”
“잠들었어.”
“…잠이 들어?”
“어느 여자가 나를 재웠어. 그래서 잠이 들었어. 언니가 날 깨워 주지 않았더라면 평생 잠에서 못 헤어나왔을지도 몰라.”
샤를로즈는 릴리가 말하는 그 여자를 지레짐작했다.
왠지 모르게 촉이 갔다.
바로 ‘그레이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신이지만 죽어 세상에 떠도는 미친 신.
샤를로즈는 릴리가 자신에게 이런 의심스러운 질문이나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죄다 그레이스가 한 짓이라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레이스, 내가 널 꼭 소멸시킬 거야.
샤를로즈는 이를 으득 갈며 보이지 않는 그레이스를 속으로 욕했다.
하지만 샤를로즈는 몰랐다.
이미 자신의 주변에 그레이스가 있다는 것을.
샤를로즈의 반응에 살며시 웃고 있다는 것을.
제레미의 몸을 사용하고 있는 그레이스는 샤를로즈와 그 주번에 분열이 일어났으면 좋겠는지 계속 귀를 쫑긋 세우며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형이 죽어 슬픈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내가 그레이스라는 걸 모르겠지. 멍청하게.’
제레미, 아니 그레이스는 제레미의 행색을 꽤 그럴싸하게 했다.
게다가 샤를로즈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면 바로 제레미 모드로 몰입했다.
“제레미 오라버니, 방에 들어가서 좀 쉬세요. 그러다가 오라버니마저도 쓰러져요.”
아무것도 모르는 샤를로즈의 어투에 그레이스는 속으로 비웃었다.
멍청아, 네가 찾는 그레이스는 여기 있단다.
제레미는 비웃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슬픈 생각을 하며 우울한 낯빛을 유지했다.
제레미는 목놓아 울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샤를로즈. 형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어.”
샤를로즈가 저를 쳐다보는 눈빛에는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그레이스는 샤를로즈의 눈빛에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끼곤 한쪽 눈썹을 움직였다.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거야.
짜증 나게.
그레이스는 샤를로즈의 뒷모습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응시하다가 주변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다시 눈물을 내보였다.
***
루아와 바로크엘이 레베크 공작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바로크엘이 먼저 내려 루아를 에스코트했다.
바로크엘은 루아를 진짜 주인님으로 대할 생각이었다.
그게 자신과 루아와의 약속이었으니까.
루아는 새까만 정장을 입고 있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저 멀리 있는 샤를로즈를 발견하자 저도 모르게 반가움에 입술이 실룩거리며 올라가려고 했다.
루아는 여기는 체통을 지켜야 하는 자리라고 계속 스스로 세뇌했다.
그리고 굳은 얼굴을 겨우 완성한 뒤 샤를로즈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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