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20)

105화

샤를로즈는 제레미를 향해 슬픈 어조로 대답했다.

“제레미 오라버니, 저는 여기에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으니 먼저 가 볼게요. 집사, 유진 오라버니의 장례 준비를 부탁해.”

“…네, 샤를로즈 아가씨.”

현시점, 유진이 죽은 레베크 공작저의 실세는 샤를로즈였다.

제레미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기에 패스.

티아는 샤를로즈밖에 몰랐기에 패스.

유진은 죽었기에 패스.

결국 남는 건 한 사람이었다.

샤를로즈 레베크.

그 악녀가 기어코 레베크 공작 가문의 실세로 군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제레미는 조용히 떠나가는 샤를로즈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이를 갈았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여자를 발견했다.

<안녕?>

“……누구?”

<내 이름은 그레이스. 죽은 신이지.>

샤를로즈와 외형이 닮은 여자가 제게 자신을 죽은 신이라고 스스로 소개했다.

그레이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았다.

아, 그래.

샤를로즈의 입에서 들어 본 적이 있던 것 같았다.

“당신이 왜……?”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물으려는데 그레이스가 먼저 제이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네 몸에 있으면서 샤를로즈에 대한 원망을 많이 들었어. 너도 샤를로즈가 싫지?>

“내… 몸에?”

제레미는 지금까지 샤를로즈에게 느꼈던 이상한 감정들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질감이 느껴졌던 그 감정들은 자신의 감정들이 아니었다.

그레이스의 감정이었다.

제레미는 하하, 웃으며 자신에게만 보이는 듯한 그레이스를 노려보았다.

“원하는 게 뭐지?”

<네 몸.>

“……내 몸? 어째서?”

<샤를로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자, 지금 당장 샤를로즈를 무너트리고 싶은 존재니까. 안 그래? 유진도 샤를로즈가 죽인 거와 다름없고, 레베크 가문이 망해 가는 것도 샤를로즈 때문이지. 내 말 틀려?>

그레이스의 말이 모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샤를로즈가 우리 가문에 들어온 후부터 행복한 날들이 없었어.

<그럼 내게 네 몸을 줘. 그럼 내가 대신 복수를 해 줄게. 악녀인 샤를로즈에게.>

“……좋아.”

제레미는 결국 그레이스의 꾀임에 홀라당 넘어갔고, 그녀에게 제 몸을 빌려주게 되었다.

바보처럼.

영혼의 조각으로 이 세상에 돌아다녔던 그레이스는 오랜만에 인간의 몸에 들어오니 기분이 좋았다.

“으음. 이제 어떻게 샤를로즈를 망가트릴까.”

제레미는, 아니 그레이스는 제레미의 모습으로 악마처럼 웃었다.

***

샤를로즈는 레나와 함께 제방으로 들어왔다.

샤를로즈는 눈물 연기를 집어 던지고 레나에게 앙칼지게 물었다.

“그레이스는 죽은 게 아니었어?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레나, 설명해!”

레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콱 막힌 말문을 열었다.

“저도 그레이스가 아예 사라진 줄 알았어요. 그저 시나리오라는 신의 후계자로서 깨야 하는 시험만 남기고 본체도 사라진 줄 알았다고요.”

레나는 자신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듯 답했다.

“그나저나 티아, 아니 릴리는?”

유진이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왜 집무실 안에는 원작 여자 주인공이 없었던 거지?

성녀인 그녀만 있었더라면 유진은 살 수 있었을 텐데.

샤를로즈의 머릿속이 꽤 복잡해졌다.

“아마도 그레이스의 더러운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좀 말해 봐.”

“그레이스는 성녀를 무척이나 싫어해요.”

“성녀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왜 원작 여자 주인공을 성녀로 만든 거야?”

“싫어하니까요. 그레이스의 성격은 정말 이상했거든요. 선과 악에 평등해야 할 신이, 세상을 평화를 지켜야 할 그 신이 세상이 멸망하는 걸 보고 싶다며 악의 편에 들고 몇천 년 전 성녀에게 죽은 거예요.”

“뭐야, 이야기가 다르잖아?”

“사실을 이야기해 봤자 샤를로즈 님에게 도움이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분명히 그레이스는 성녀의 힘으로 사라졌어요. 악의 기운을 너무 많이 먹은 덕분이죠.”

그런데.

레나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어요. 자꾸 성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해 죽는 사례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이 이야기, 왠지 모르게 익숙한데?

‘죽은 어머니의 이야기와 똑같잖아.’

샤를로즈는 레나의 충격적인 발언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저 뒤통수가 얼얼할 뿐이었다.

“그럼 이 모든 짓이.”

“그레이스가 한 짓이죠.”

“어머니가 자살한 것도?”

“아마도 그레이스 때문인 것 같네요. 샤를로즈 님.”

“하아. 그레이스는 원래 어떤 신이었지? 자세히 설명해 봐. 레나.”

레나는 지금 여유로울 시간이 없다고 판단해 샤를로즈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를 해 줬다.

“그레이스는 본래 성녀와 악마 사이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신이에요.”

“……그럼 인간이었다는 거야?”

“네. 신은 본래 인간에서부터 시작되어 신이 준 시험에 통과하면 그다음 신이 되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 되는 방법이에요. 이해가 가시나요?”

“그래서 나보고 그레이스의 시나리오를 깨라는 것도 죽은 신이 준 시험이었기 때문이라는 거네?”

“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샤를로즈 님이 신이 될 수 있는 시험을 완전히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레이스가 이 세상에 아예 남아 있지 않다는 전제 조건에서요.”

“그래서?”

“그레이스는 선과 악의 평등을 지키지 못하는 아주 못된 신이었어요. 툭하면 인간 세상이나 마계에 멸망을 가져와 세상에 분란을 만드는 골칫덩어리였어요.”

“그야말로 악동이었네?”

“그렇죠. 그러다가 그레이스의 숨겨진 악이 폭주하게 된 거예요. 선은 사라지고 오로지 악만이 그레이스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어요.”

“그래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한 거구나.”

“그레이스는 죽기 전까지도 세상에 멸망을 가져올 거라며 기대하라는 유언을 남긴 채 사라졌어요.”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네. 돌아오지 않아서 저는 당연히 소멸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저도 몰랐어요, 샤를로즈 님.”

“그러면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레나?”

레나는 눈을 번뜩였다.

“그레이스를 소멸시키는 방법이 있긴 해요. 이 세상 어딘가 떠도는 그레이스의 악의 심장을 없애 버리면 그레이스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소멸될 거예요.”

“레나, 그레이스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네?”

샤를로즈는 레나가 조금 의심이 갔다.

이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서 여태 왜 말을 아꼈을까.

“왜 지금까지 그레이스의 비밀을 말해 주지 않았던 거야? 내 충신이라며. 레나.”

샤를로즈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살기에 기가 죽었다.

자신이 잘못했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의심을 받고 있는 이 상황이 자신이 초래한 결과라는 것도.

“죄송해요. 샤를로즈 님. 저는 그레이스가 살아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어요. 염치없지만, 믿어 주세요.”

“그럼 악의 심장이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데?”

“그레이스가 죽은 후 계속 감시했었어요. 악의 심장을 만질 수 있는 건 오로지 신 또는 신의 후계자뿐이에요. 저 같은 미천한 보좌관은 만질 수 없는 위험한 물건이에요. 그래서 보기만 했어요.”

“그 악의 심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보고 그레이스가 사라졌다는 확신을 어떻게 했지?”

“그 악의 심장을 가지러 온 존재가 그레이스가 죽은 후, 나타나지 않았거든요. 지금까지도요.”

샤를로즈는 레나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만약에 그레이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 악의 심장을 이용해 다시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했겠지.

레나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악의 심장을 없애러 모험이라도 떠나자고?”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샤를로즈 님.”

레나는 그레이스가 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다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레나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원망과 행복이 가득 찬 이 세상을.

레나는 사랑했다.

그것도 굉장히.

그래서 무릎을 꿇고 샤를로즈에게 빌고 또 빌었다.

“샤를로즈 님이 원하시는 결혼을 하시고 없애도 되니까…… 제발 세상을 지켜 주세요. 샤를로즈 님.”

샤를로즈는 제 밑에서 빌고 또 비는 레나의 기죽은 모습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쨌거나 레나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보좌관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은 적 없었다.

‘뭐든지 다 나를 위해서 행동했지.’

그걸 알기에 샤를로즈는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레나의 이런 약한 모습에.

레나의 큰 눈망울에 투명한 눈물이 맺혀 뚝뚝 떨어졌다.

“제발요……. 저는 이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어요. 샤를로즈 님.”

“만약에 내가 세상을 지킨다고 쳐. 넌 내게 진정으로 뭘 줄 거지?”

레나는 샤를로즈의 물음에 갑자기 바로크엘이 떠올랐다.

바로크엘은 루아에게 자신의 생을 마음대로 이용하라며 심장을 내어 줬다.

‘그럼 나도.’

레나는 흑주술사들의 강력한 힘이 담긴 혼을 샤를로즈에게 건네주었다.

“죽은 흑주술사들의 힘이에요. 저희 흑주술사들은 차기 신 후보인 샤를로즈 님을 전적으로 도울 거예요. 평생.”

레나의 충성스러운 발언은 충분히 샤를로즈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