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 시각, 유진은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지금 약혼서를 받고 있을 샤를로즈를 떠올렸다.
“이 망할 것.”
유진은 샤를로즈가 어머니의 유언장을 찢는 만행을 벌인 것도 모자라 그 대악마와 결혼한다고 난리이니 마음이 평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대악마 자식.
인간인 척 연기하는 것도 모자라 영웅 행색까지 하다니.
정말 돌아 버리겠네.
레베크 공작 가문은 본래 악마들을 없애는 가문이었다.
악마들을 가두고 고문하며, 악을 지우는 가문으로 커 온 것이었다.
악마를 멸시해도 모자랄 판국에 제 첫째 여동생은 악마와 친밀감을 쌓다 못해 결혼까지 하려고 들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자신만 아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하지만 이미 황제도 악마의 편을 든 것 같았다.
빌어먹을.
악마를 혐오하는 유진의 편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성녀인 티아 역시 악마에게 우호적인 것 같았다.
게다가 샤를로즈와 대악마와의 결혼을 꺼리는 이유마저도 자신의 옆에 있지 못해서라고 하니.
하아, 돌아 버리겠네.
지금 상황에서 제레미라도 조금 도움이 되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나 원 참.
유진 혼자 끝없는 갈등 속에서 홀로 무거운 싸움을 했다.
악마를 없애고, 세상의 평화를 가져오는 레베크 공작 가문이 이대로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샤를로즈의 결혼을 반대하며 영웅의 정체를 밝혀야 하는 것인가.
참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악마가 인간의 편이 되었다 한들, 그놈들은 인간을 생명체로도 보지 않는 아주 사악한 것들이었다.
유진은 악마의 사악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악마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종족이었다.
아주 사악하고 간사한 종족.
“샤를로즈, 너는 언제까지 무너질 생각인 거지?”
유진은 공허한 눈빛을 허공에 두고선 중얼거렸다.
자신은 가문의 대를 잇기를 원했다.
레베크 가문이 여기서 끊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웅이 되어 버린 대악마를 모함하다가 몰락당한 귀족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황족과 다른 고위 귀족들은 대악마의 편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자신은 끝이라는 걸 깨닫자 유진은 결국 결단을 세우지 못하고 단검을 꺼내 제 심장에 꽂았다.
“쿨럭!”
자신만 사라지면 되는 일 아닌가.
가문을 위해서 평생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샤를로즈로 인해 끝이 났다.
인간을 악마에게서 지켜 주는 레베크 가문은 더는 있어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유진은 죽고 싶었다.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자 그는 샤를로즈처럼 자살 시도를 해 버렸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
마지막으로.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어요.
저는 이제 가문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어요.
무언가의 홀린 듯 유진은 죽음을 선택했다.
유진의 몸은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런데도 아무도 유진을 찾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그 누구도 유진의 업무를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에.
유진은 늘 집무실에 들어가면 자신이 부르기 전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렇기에 누구도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유진을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
“큰일 났습니다, 샤를로즈 아가씨!”
이제 바로크엘을 떠나보내려는데 집사가 성급하게 응접실 문을 벌컥 열고서는 소리쳤다.
샤를로즈는 무슨 일이 있냐며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집사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뭐?”
샤를로즈는 순간 제 귀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주인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집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샤를로즈는 두 손으로 드레스 끝자락을 붙잡고 황급히 집무실이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안 쓰는 근육을 마구 써 대니 몸이 아파 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숨쉬기가 버거웠지만 어떻게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샤를로즈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아악!”
제레미가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죽은 유진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샤를로즈는 물끄러미 죽어 버린 유진을 내려다보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원작 남자 주인공 한 명이 죽어 버렸다.
어째서?
왜?
원작 스토리상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주연, 조연은 없었다.
그저 플레이어들의 선택에 조용히 퇴장하는 것뿐이었지.
모든 캐릭터 중 마지막 엔딩에서 죽는 건 오로지 샤를로즈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엇인가.
유진 레베크.
원작 여자 주인공의 오빠가 죽어 버렸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참 파격적인 전개였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원작 남자 주인공 두 명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루야와 주드엔.’
이 두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샤를로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원작 여자 주인공 앞에도 보이지 않았다.
샤를로즈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어렴풋이 자신이 샤를로즈에 빙의하기 전의 일들을 지금에서야 기억해 냈다.
왜 루야와 주드엔이 나타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
김단이 빙의한 이 피폐 역하렘 게임은 특이하게도 남자 주인공 후보를 두 명 고를 수 있었다.
일러스트로 미리 보기가 가능한 남자 주인공 네 명 중에서 말이다.
김단은 아무런 생각 없이 남자 주인공 후보 두 명을 골랐다.
“어차피 리셋할 수 있으니까, 일단 앞에 이 두 명부터 공략해 보자.”
이때까지만 해도 김단은 이 피폐 역하렘 게임을 리셋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단순하게 맨 앞에 두 명을 남자 주인공 후보로 뽑은 뒤 스토리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김단은 샤를로즈에게로 빙의한 것이고.
‘이런 미친. 이걸 왜 지금 떠올린 거야.’
샤를로즈는 지금에서야 그 현실 세계의 기억이 떠오른 것에 대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니깐, 이 시나리오에서의 남자 주인공은 이미 두 명으로 좁혀져 있는 셈이었고, 자신의 대활약으로 악역 대신 죽어야 할 다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냐는 데까지 생각이 다다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유진 레베크가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유언장 하나 남기지 않고.
레베크 가문의 유언장에는 힘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문을 위해 산 유진 레베크가 그 힘이 깃든 유언장을 쓰지 않고 그냥 죽을 리 없었다.
누군가의 암살로 죽은 걸까?
아니, 그렇게 보이지 않아.
샤를로즈는 멍하니 유진을 바라보다가 그의 심장에 꽂힌 단검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저 단검.
‘내가 내 심장을 찔러 넣었을 때와 같은 단검이네. 유진은 왜 저 단검을 가지고 있었을까?’
샤를로즈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다가 그 단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제레미는 유진의 죽음에 엉엉 울기 바빠 샤를로즈가 유진의 심장에 꽂힌 단검을 빼 가는 걸 보지 못했다.
샤를로즈는 유진의 심장에 꽂힌 단검이 피를 흡수해 그 위로 글씨가 쓰여지는 것이 보였다.
「너 대신 죽은 대용품이야, 어때?」
어린아이가 쓰는 것 같은 글씨체가 샤를로즈의 눈에 보이자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뭐지, 꼭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데.’
“……넌 누구야, 대체. 왜 이런 짓을 꾸민 거야?”
샤를로즈는 조용히 단검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자 단검은 이에 응답했다.
「신이 되기 위한 시험」
……이거 설마.
그레이스는 아니겠지?
샤를로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또다시 단검이 반응했다.
「나의 후계자여, 악역이 되어서 세상을 멸망시키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샤를로즈는 단검이 다시 반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검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단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푸욱!
단검이 빠른 속도로 바닥에 꽂혔다.
샤를로즈는 이를 으득 갈았다.
세상을 멸망시켜?
악역이 되라고?
그레이스, 당신은 대체 무슨 속셈인 거야.
‘이제 나는 평화로운 퇴장을 원하는데. 죽은 신이 왜 나타나는 건데.’
샤를로즈와 단검의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레나가 경악에 물든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자신이 잘못 본 것처럼.
‘그레이스, 아직도 그 마음을 품고 있는 거야?’
레나는 죽은 줄만 알았던 그레이스가 세상에 웃도는 걸 실제로 보자 결국 샤를로즈에게 그레이스에 대한 진짜 모습을 알려 주기로 결심했다.
레나의 목적은 세상의 평화.
그레이스와는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던 흑주술사였다.
레나는 샤를로즈의 손목을 붙잡았다.
“샤를로즈 님, 급한 상황이에요. 일단 제발 방으로 가요. 어서요.”
“…레나, 너는 지금 이 상황이 뭔지 잘 알고 있지?”
“네.”
“왜 알려 주지 않은 거야?”
“그레이스의 환생체인 당신을 보고 나서 그레이스가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진 줄만 알았거든요.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어요. 필요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해서요.”
샤를로즈는 일단 알았다며 레나와 함께 집무실에서 벗어나려는데 제레미가 소리를 질렀다.
“너는! 정말 독하구나, 샤를로즈.”
하필이면 제레미의 눈이 돌아 버렸다.
샤를로즈가 그레이스의 진실을 알아야 할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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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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