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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3/120)

103화

바로크엘은 샤를로즈가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다.

“정말 나를 알아? 루아가 나에 대해서 말해 줬어?”

“네. 말해 줬어요. 인간과 악마와의 전쟁에서 악마 편이었다고 들었는데.”

샤를로즈의 말에 바로크엘은 자신에 대해서 더 들은 것이 없냐며 칭얼거렸다.

“음. 루아의 충실한 수하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루아가 걱정하더군요. 바로크엘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골치 아픈 악마라며 말이죠.”

“그렇게 골치 아픈 악마도 아니야. 어차피 나는 루아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내 심장을 줬거든.”

“아, 제가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루아가 당신의 심장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루아가 제대로 말을 해 주지 않아서요.”

샤를로즈는 악마들끼리 심장을 주는 행위가 꽤 독특하고 흥미롭다고 생각해 늘 물어보고 싶었지만, 루아는 그냥 좋은 것이라며 대답을 피하기 급급했다.

그럴수록 샤를로즈의 호기심이 더 커지는 걸 루아는 모르고 있었나 보다.

샤를로즈는 금괴같이 아름답게 빛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바로크엘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로크엘은 샤를로즈의 미인계에 훅 넘어가 악마들 사이에서도 금기라고 불리는 심장을 바치는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다.

“샤를로즈, 이건 악마들 사이에서도 직접 발설해서는 안 되는 내용인데, 뭐 인간계니까 상관없겠지.”

“그런데 제게 말해도 돼요?”

“어차피 넌 루아의 소유에 들어갈 거니, 상관없지 않나.”

“소유라면, 저와 루아와의 결혼을 말하는 건가요?”

“응. 악마들은 인간을 가질 때 보통 ‘소유’라는 단어를 써. 악마에게 있어서 인간은 장난감 정도의 존재거든. 아, 그렇다고 샤를로즈가 장난감이라는 말은 아니야.”

샤를로즈는 멸시와 폭언을 꽤 많이 들었던지라 바로크엘의 ‘장난감’이라는 발언은 그녀에게 미세한 상처조차 남기지 못했다.

샤를로즈는 그 심장을 바치는 의미가 뭐냐고 다시금 물었다.

그리고 곧 바로크엘의 두 입술이 열리고야 말았다.

“악마끼리 심장을 교환하는 일은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걸 뜻해. 나 같은 경우는 조금 달라. 루아에게 내 심장을 일방적으로 줬으니까. 이건 무슨 의미냐, 내 목숨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는 소리지.”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다라면,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요?”

“샤를로즈 님,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요. 바로크엘이라는 저 악마의 생명을 루아가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될 것 같아요.”

뜸을 들이는 바로크엘이 답답했던지 레나가 그 대신 짧고 간결하게 샤를로즈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바로크엘은 자신의 자리를 왠지 모르게 빼앗긴 기분에 레나를 슬쩍 노려보았다.

“너구나. 흑주술사가. 루아한테서 네 이야기를 들었어.”

“제 이야기를 들으셨다니, 반갑네요. 흑주술사지만, 샤를로즈 님의 충신인 레나라고 해요. 자주 만날 것 같은데 잘 지내 봐요. 같은 충신으로서.”

레나가 원피스 끝자락을 두 손으로 잡아 부채 모양으로 길게 늘어트리며 고개를 숙여 품위 있게 인사했다.

바로크엘은 흑주술사를 난생처음 봐 신기하기도 했지만, 불쾌함이 먼저 몰려와 레나의 인사를 무시했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인사는 됐어.”

“인간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우아한 인사는 기본이에요. 바로크엘.”

“언제 봤다고 내 이름을 입에 담는 거지, 흑주술사?”

“흑주술사가 아니라 레나라고 해요. 그리고 저를 계속 아니꼽게 보시면 샤를로즈 님이 화를 내실 수도 있어요. 저는 샤를로즈 님의 충실한 부하이자 샤를로즈 님의 유일한 보좌관이거든요.”

빠르게 쏟아져 내리는 레나의 말에 바로크엘은 할 말을 잃었다.

샤를로즈의 유일한 보좌관?

샤를로즈는 그냥 평범한 고위 귀족 영애라고 들었는데.

무슨 직업이라도 있나?

바로크엘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생겼다.

‘뭐지? 꼭 나와 루아가 모르는 일을 샤를로즈가 벌이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크엘은 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너무나도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질문을 했다.

“너, 샤를로즈랑 뭘 하는데 보좌까지 해?”

“아, 루아가 말해 주지 않았나요? 저희는 아주 중요한 일을 진행 중이라고요.”

“그런 명령 받지 못했는데. 뭔데?”

바로크엘은 은근슬쩍 레나를 떠봤다.

레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바로크엘에게 대답해 주었다.

그 중요한 일이 뭔지를.

“샤를로즈 님은 신이 될 고귀한 분이에요. 저는 신의 보좌관으로서 샤를로즈 님의 옆에 있는 거고요. 이해가 조금 되시나요?”

“……신이라고? 저 인간, 아니 샤를로즈가?”

바로크엘은 ‘신’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기에 레나의 말을 개소리로 받아들였지만, 샤를로즈의 표정을 보아하니 저 흑주술사가 거짓부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진짜, 신이라고?

아니, 신이 될 인간이라고?

인간계에는 신전이라는 게 있었다.

성녀라는 것도.

성녀는 신성한 여자를 앉혀다 놓고 세상을 지키는 의무를 하는 인간이라고 익히 들었다.

그 성녀는 신의 말을 듣고 행동한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아주 옛날에.

지금은 성녀가 사라졌다나 뭐라나.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난리가 났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다.

어차피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저 흑주술사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도 신전과 관련이 있게 된다.

신전은 신을 따르는 무리들이었으니까.

그것도 아예 신에게 미친 것처럼.

근데 그 신이 샤를로즈라면?

그 신과 루아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자신의 위치는?

당연히 신과 관련된 자로서 찍히겠지.

그럼 성스러운 신전에 발을 들여야 하고.

바로크엘은 어두컴컴한 미래에 웃음기를 쫙 뺐다.

“정말로 샤를로즈가 신이 될 자라고? 거짓이 아니라? 아니, 샤를로즈가 직접 말해 봐. 지금 나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하거든.”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의 행동을 미리 짐작했다.

한낱 인간이 신이 될 거라는 걸 악마든 인간이든 누가 믿겠느냐만.

이게 진실이었다.

“바로크엘, 루아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나 보네요. 저는 신의 후계자예요. 천 년 전에 죽은 신의 환생체죠.”

“……정말로?”

“네. 이 세상은 천 년 전에 죽은 그레이스라는 신에 의해 연극이 벌어지고 있어요. 아주 거지 같은 연극이죠.”

“연극?”

“사실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믿기 어렵겠지만, 알아서 받아들이길 바라요. 루아도 이미 이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요.”

“누가 내 뒤통수를 크게 때린 기분이 드는군. 더 말해 봐. 샤를로즈.”

“저는 퇴장을 원했어요. 그래서 죽음을 선택했고, 그 결과 저는 망할 어머니의 유언장이라는 것 때문에 다시 몇 번 되살아났어요. 그렇게 피폐하게 살다가 도망간 제 여동생, 그러니깐 이 연극의 여자 주인공을 찾으러 나섰었죠.”

“여자 주인공?”

“티아라고. 이번 대의 성녀예요.”

“…….”

바로크엘은 생각보다 큰 스케일에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그러다가 흑주술사라는 종족을 만났고, 이안 아시죠? 루아의 반쪽.”

“아, 이안은 잘 알지. 루아가 아끼는 친자식.”

“이안이 신을 만났더라고요.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안이? 사랑을 했다고?”

바로크엘은 여기서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냐며 화들짝 놀랐다.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의 웅장한 리액션에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세상에서 퇴장을 하려다가 레나에게 설득당해 다른 방향으로 퇴장하려고 해요. 신이 되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거죠. 그런데 신의 역할이 뭔지 아세요?”

바로크엘은 신의 존재 자체를 몰랐기에 샤를로즈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선과 악의 평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게 있어서 선은 제 여동생인 성녀 한 명과 악은 제 남편이 될 대악마 루아가 있죠. 저는 그 둘을 사이에 끼어 선과 악을 평등하게 유지할 생각이에요.”

“음, 생각보다 복잡하네. 그 둘을 가져서 어떻게 평등하게 할 건데? 공평한 싸움이라도 시키게?”

“아뇨. 그러기에는 제가 귀찮아지거든요.”

“그럼 어떻게 선과 악을 평등하게 만들려고? 갑자기 궁금해지네.”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냥 둘을 친구로 만들 생각이에요. 친구끼리는 평등하잖아요.”

“되게 단순한 방법이네. 나 같으면 평생 선과 악을 싸우게 해 평등하게 만들 텐데. 그게 더 편하잖아.”

“싸우는 것도 이제 질리고, 저도 행복하고 싶거든요. 악녀로서 퇴장할 때도 되지 않나 싶어서요.”

“으음. 네 고통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도 널 도와줄게. 나도 따지고 보면 악이니까.”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의 반응에 사뭇 놀랐다.

이렇게 착하고 순수한 악마는 처음 보네.

“그럼 우리 친구부터 할래요, 바로크엘? 어차피 자주 볼 것 같은데. 그리고 루아의 이야기도 좀 많이 들려주세요. 루아가 본인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하긴 그 녀석은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과묵한 녀석이긴 하지. 소꿉친구인 내가 다 이야기해 줄게. 그 녀석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샤를로즈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로크엘이 해 주는 루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까르르 좋아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런 정도의 행복은 악역도 누려도 되지 않을까.

그런 씁쓸한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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