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레베크 공작저 정문에 도착한 바로크엘은 페롤로제나에서 왔다는 증표인 붉은 장미가 돋보이는 증서를 레베크 공작 가문의 집사에게 보여 주었다.
“신분을 확인했습니다. 페롤로제나에서 무슨 연유로 레베크 공작저까지 오셨습니까?”
바로크엘은 페롤로제나의 증서를 품 안에 넣고선 집사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샤를로즈 레베크… 님에게 약혼서를 전달하라는 주인님의 명령이 있으셨다.”
그냥 샤를로즈 레베크라고 지칭하기에는 뭔가 조금 이상하기에 님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아무래도 인간의 신분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는 샤를로즈보다 낮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베크 공작 가문의 집사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택 안으로 안내해 주겠다며 바로크엘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아무래도 페롤로제나를 무시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속으로 판단을 내린 듯했다.
레베크 공작 가문의 집사는 유진에게 페롤로제나에서 온 자들은 모조리 무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집사는 주인의 명령을 받들지 못했다.
원래는 무시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페롤로제나의 입지가 레베크보다 커진 탓에 명대로 무시했다가는 제 주인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지 몰랐으니까.
비록 명령 불복종이었지만.
유진은 이미 다 알았을 것이다.
여기 있는 레베크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페롤로제나에서 온 자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설령 유진이 무시하라고 명령을 해도,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아마도 유진은 샤를로즈의 행패에 화가 나서 욱하는 바람에 이런 허무맹랑한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유진도 잘 알았다.
지금 페롤로제나를 무시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애들처럼 유치한 장난을 또 치시는 군. 레베크 공작 가문의 집사는 제 주인인 유진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가끔 유진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릴 때가 있었다.
그건 샤를로즈 아가씨와 관련된 명령들이었다.
이유야 물론, 샤를로즈 아가씨가 주인님께 무슨 만행을 저질러서였다.
레베크 공작 가문에서 몸을 담근 지만 벌써 자그마치 20년.
지금 레베크 공작 가문의 일원들이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집사는 그들의 심리를, 아니 특히 유진의 심리는 제일 잘 알았다.
유진은 장차 레베크 공작 가문의 대를 이를 소공작이었으니까.
집사는 더욱이 유진을 소중히 대했다.
대놓고 다른 분들과 차별은 하지 않았지만, 유진을 관찰하고 지켜보는 시간이 좀 더 길었다.
어떤 일에 화가 나고, 어떤 일에 슬퍼하고,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에 대해서.
20년을 관찰한 결과.
집사는 깨달았다.
주인님은 티아 아가씨보다 샤를로즈 아가씨의 행동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나 일 처리가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그런데 주인님은 아직 그걸 모르는 상태인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집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응접실 앞에 바로크엘을 세워 두고 말을 건넸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곧 샤를로즈 아가씨를 모셔 오겠습니다.”
이 제국에서는 귀족 간 약혼서를 주고받는 방식이 조금 독특했는데.
약혼을 원하는 가문이 약혼을 하고 싶은 그 가문에 충실한 수하를 보내 직접 약혼서를 건네주고 약혼서를 받은 자에게 승낙을 얻어 와야 했다.
약혼을 원하는 본인은 가지 못했다.
제국인들은 그 약혼서에 모든 진심과 사랑이 담겨 있다고 믿었으니까.
지금 루아는 인간의 법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인 샤를로즈와 함께 살기 위해서라면.
이딴 귀찮은 법도도 지키면서 살 생각이었다.
아주 모범적이게.
바로크엘은 레베크 공작저에 오기 전 루아에게 실컷 잔소리를 듣고 온 상황이라 얌전히 굴었다.
[레베크 공작저에 가서 쥐 죽은 듯 얌전히 있어. 샤를로즈를 보고 난리 치지 말고. 다른 인간들을 봐도 흥미롭게 쳐다보지 말고.]
[알았어, 벌써 그 잔소리만 하루 째야. 이 망할 놈아!]
바로크엘은 루아의 심한 잔소리에 이미 질린 상태였다.
그렇기에 루아의 명령을 잘 들을 생각이었다.
정말로.
집사가 안내해 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바로크엘은 넓은 응접실을 살펴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그럼 얼른 샤를로즈 아가씨를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샤를로즈와 아예 약속을 잡고 온 것이 아니라 그녀 역시 시간이 필요했다.
애초에 약혼서가 올 거란 사실은 샤를로즈뿐만 아니라, 레베크 공작저 전체가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 약혼서의 전달이 언제 될지 정확히 몰랐을 뿐이지.
집사는 응접실에 페롤로제나에서 온 손님을 두고 얼른 샤를로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이런 약혼이나 결혼에 관한 건 집사가 제 발로 뛰는 편이었다.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어느새 샤를로즈의 방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똑똑똑-.
“샤를로즈 아가씨, 페롤로제나에서 약혼서가 도착했습니다.”
곧 샤를로즈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알았어.”
***
샤를로즈는 이미 치장 준비가 다 끝난 상태였다.
뭐, 치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화려한 걸 선호하지 않는 샤를로즈는 평소 맨얼굴에 적당히 붉은 립스틱을 바르는 것을 좋아했고, 움직이기 편한 드레스나 원피스를 자주 입었다.
액세서리 같은 건 레나가 골라 주는 걸 사용했고, 구두도 걷거나 뛰기 편한 걸로 주로 신는 편이었다.
머리에도 변화를 주기 싫어서 그래도 두는 경우가 많아, 대충 엉킨 부분만 황금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빗으로 빗었다.
그렇게 치장은 끝.
아주 간소하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녀장에게서 페롤로제나의 약혼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치장을 시작했으니 한 10분 정도 걸렸으려나.
샤를로즈는 이렇게 대충 꾸며도 참 어여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만 예쁘네.’
정말 원작에 충실한 설정이었다.
세계관 최고 미인 악녀, 샤를로즈 레베크.
얼굴만 예쁜 인형.
얼굴만 예쁜 악녀.
샤를로즈는 이제 그 수식어를 떼고 싶었지만, 원작 시나리오 때문에 꾹 참고 있었다.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려면 자신은 악녀 역할을 자처해야 했다.
그런데 그 악녀 역할이 지금 굉장히 꼬여 버렸다.
원작 여자 주인공을 시기하며 질투를 해야 하는데 지금 샤를로즈는 원작 여자 주인공에게 되려 집착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 않나.
게다가 두 명의 남자 주인공들과는 좋지 않은 사이를 풀었다.
아니, 생명의 은인이 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저질러 놓은 일들이 샤를로즈의 작은 머릿속 안에 빠르게 지나갔다.
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비록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샤를로즈는 이제 더는 원작에 개입해 무언갈 바꾸고 싶지 않았다.
퇴장을 원했던 샤를로즈는 루아와 퇴장을 할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원작에서의 샤를로즈는 원래 이 시기부터 딱 2년 뒤, 가출한 여자 주인공이 돌아온 후 남자 주인공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렇지만, 원작이 많이 바뀌어 샤를로즈는 죽어도 살아날 수 있는 몸이 되었고 원작보다 일찍 가출한 여자 주인공도 찾았다.
그럼 이제 뭐가 남았냐.
원작에서의 죽음을, 퇴장으로 바꿀 시기가 왔다.
죽음이 곧 퇴장.
퇴장이 곧 죽음.
현대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샤를로즈는 마음을 확 바꿨다.
원작에 더는 휘말리지 않고 구경하다가 시나리오를 완료하기를.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장애물은 일찍이 없어져 줘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이 레베크 공작저에 돌아온 후부터.
레나와 많은 대화를 한 후부터.
하지만 갈 곳이 없어서 계속 그 퇴장의 시기를 정하지 못했지만, 드디어 갈 곳이 생겼다.
자신의 진정한 편이 생겼다.
이제 끝이다.
샤를로즈는 방에서 나오면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집사, 가지.”
집사는 샤를로즈의 생전 처음 보는 밝은 미소에 어리둥절했다.
“집사?”
샤를로즈가 자신을 보고 넋을 놓고 있는 집사를 불렀다.
집사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네, 샤를로즈 아가씨. 응접실로 가시죠.”
“응. 레나, 너도 가자.”
“네, 샤를로즈 아가씨.”
샤를로즈는 레나를 꼭 제 옆에 두고 다녔다.
마치 정부처럼 말이다.
그래서 레베크 공작저의 사용인들은 사라진 샤를로즈를 찾을 때 레나를 찾곤 했다.
둘은 늘 붙어 다녔으니까.
집사는 이제 저 하녀와 아가씨의 이상한 관계를 보는 것도 익숙한지 토 하나 달지 않고 샤를로즈와 레나를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
노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바로크엘이 그리 궁금해했던 샤를로즈가 등장했다.
“이분이 샤를로즈 아가씨입니다. 그럼 말씀 나누시길 바랍니다.”
집사는 약혼서에 관련하여 끼어들 자격이 없었기에 무슨 일이 생기면 종을 울려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응접실을 떠났다.
쾅!
문이 닫히자 묘한 정적이 오갔다.
샤를로즈와 바로크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에게서 루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루아의 향기가 나네요. 당신이 바로크엘이라는 악마인가요?”
“날 알고 있어?”
바로크엘은 샤를로즈를 보자마자 루아의 잔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인간 귀족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샤를로즈는 바로크엘의 무례한 행동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 그의 앞 소파에 우아하게 앉았다.
“루아에게 어렴풋이 들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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