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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20)

101화

마차 안은 삭막했다.

루아는 샤를로즈의 손을 맞잡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피곤한 건지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루아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아요. 샤를로즈.”

“어째서요?”

“샤를로즈가 제게 손을 두 번이나 내밀어 줬잖아요.”

“그건 저도 루아를 원했으니까요.”

샤를로즈의 훅 들어오는 멘트에 루아는 잠시 어질어질했다.

‘침착해.’

루아는 샤를로즈의 페이스에 곧이곧대로 따라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샤를로즈와 대화를 하다 보면 주도권을 빼앗기는 경우가 흔했다.

다른 이들과는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오로지 샤를로즈만이 자신을 망가트렸다.

루아는 그 망가짐이 너무 좋았다.

미치도록.

“오랜만에 키스해도 돼요?”

“악의 기운이 필요해요?”

샤를로즈의 물음에 루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맺은 계약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샤를로즈와의 스킨십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예감이 물씬 들었기 때문이었다.

샤를로즈는 과감하게 루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곧 깊은 키스로 이어졌다.

루아는 샤를로즈가 주는 악의 기운과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묘한 희열감을 느꼈다.

그녀의 허리를 두 팔에 휘감았다. 그리고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게 하였다.

샤를로즈는 몸에 힘이 없어 루아의 움직임대로 따라 주었다.

생각보다 단단한 루아의 허벅지 위에 두 다리를 조금 벌린 채 앉아 있는 자세가 편했다.

샤를로즈는 루아와의 긴 키스 끝에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루아 특유의 시원한 향기가 샤를로즈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힘차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여기가 마치 네 안식처라는 듯.

샤를로즈는 몸에서 악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샤를로즈, 괜찮아요?”

루아가 처음 보는 샤를로즈의 약한 모습에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무리하지 마세요. 제가 괜한 부탁을 했나 봐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루아는 샤를로즈를 껴안으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런 깊은 스킨십을 꽤 오랫동안 참아 왔더니 절제를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루아의 반성에 샤를로즈는 괜찮다며 오른팔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샤를로즈!”

“네?”

“더 쓰다듬어 주세요.”

루아의 잔망스러운 애교에 샤를로즈는 그의 푹신한 머리카락을 천천히 만져 댔다.

‘부드럽다. 꼭 강아지 털을 만지는 것 같아.’

샤를로즈 역시 루아의 머리카락이 기분이 좋은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추지 못했다.

루아는 이번에는 얼굴이 아닌 두 귀를 붉힌 채 샤를로즈의 손놀림을 받아 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레베크 공작저에 도착했다는 마부의 말이 들려왔다.

***

레베크 공작저 앞에 선 붉은 장미가 박힌 마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야 그럴 것이 붉은 장미는 이번에 제국을 위해 악마들을 무찌른 영웅의 가문.

사람들은 문양만으로 페롤로제나 가문의 마차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이미 황궁에서 온 대륙에 영웅의 가문이 어떤 상징을 사용하는지, 누구인지를 대대적으로 홍보했기 때문이었다.

그 영웅의 가문 마차가 레베크 공작저 앞에 서니 사람들은 더욱더 수군거렸다.

“영웅이 다 죽어 가는 레베크 공작저에는 무슨 일이래요?”

“그러게 말이에요. 레베크 공작저와 영웅이 연이 있나 봐요.”

그렇게 사람들이 마차 주변에 한두 명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두 남녀에 경악했다.

영웅, 루아의 에스코트를 받는, 세간의 악녀라고 소문이 자자한 샤를로즈 레베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입을 떡 벌린 채 그 둘을 황당하게 바라보다가 얼른 흩어졌다.

그리고 소문은 빠르게 제국 전체에 퍼져 나갔다.

샤를로즈 레베크와 영웅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

샤를로즈가 레베크 공작저로 돌아온 지 이틀쯤 되었을까.

샤를로즈와 영웅의 스캔들로 온 제국이 들썩였다.

샤를로즈는 아침 식사부터 떫은 표정으로 제 기분이 나쁘다는 걸 대놓고 표현하는 릴리를 빤히 응시했다.

“티아,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인가 보네?”

“언니, 너무 해. 루아와 결혼한다면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청혼만 받았을 뿐이야.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어.”

“서운해. 진짜.”

“미안해, 티아.”

릴리는 서운해하는 티를 팍팍 냈다.

유진은 이제 샤를로즈가 지겨운 모양인지 이 스캔들을 가지고 무어라 언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샤를로즈를 결혼시켜 레베크 공작저를 떠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기에 그저 조용히 식사를 할 뿐이었다.

“유진 오라버니는 아무렇지도 않아? 샤를로즈 언니가 결혼한다는데?”

“결혼을 말릴 생각은 없어.”

유진의 뜻밖의 대답에 샤를로즈는 슬쩍 그를 흘겨보았다.

우아한 식사 태도와 매너.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냉철함.

거지 같은 제 첫째 오라비의 모습도 이제 보지 않을 거라 생각을 하니 샤를로즈의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자유에 억압받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유진이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 들러. 어머니의 유언은 지켜야 하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래.

샤를로즈는 싸늘한 눈빛을 유진에게 던지며 대답했다.

“그냥 이 유언장을 유진 오라버니가 관리하는 게 어떠하신가요? 그러는 편이 제게도 훨씬 편해서요.”

“네가 없으면 유언장의 효력이 없어. 그냥 종이 쪼가리지.”

“그럼 그냥 이 유언장 찢어 버리는 게 어떨까요?”

“안 돼. 레베크 가문의 능력을 버릴 순 없어.”

“어차피 이 능력, 제게만 효력이 있는 거잖아요. 제가 죽으면 살리는 것밖에 없는데. 그냥 찢어요. 저도 이런 거 필요 없거든요.”

“죽은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다. 샤를로즈.”

“이제 저도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려고요.”

샤를로즈는 냅킨으로 입을 꾹꾹 눌러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먹었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올라가 볼게요.”

“언니, 잠깐만 나도 다 먹었어!”

“샤를로즈. 내가 식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가려는 거지?”

유진은 귀족 예법에 굉장히 예민했다.

그렇기에 윗사람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먼저 일어나는 샤를로즈를 꾸짖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샤를로즈가 품 안에서 제 죽은 어머니의 유언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세로로 쫙쫙 찢었다.

참고로 이 유언장은 효력을 받은 자만 유언장을 찢을 수 있었다.

그리고 찢어진 유언장은 효력을 잃게 되고.

이 사실을 병자들의 섬에 갔다오고 난 후에 제레미와의 비밀 대화에서 듣게 되었다.

그리고 참다못해 지금 그 망할 유언장을 찢었다.

더는 죽은 어미의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아서.

이제는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샤를로즈가 찢은 유언장이 허공에 나팔거리며 바닥에 마구잡이로 흩어졌다.

유진은 샤를로즈의 미친 행동에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그녀의 씁쓸한 얼굴에 입술을 달싹였다.

가끔 샤를로즈의 씁쓸한 얼굴을 볼 때면, 왠지 모를 죄악감에 숨통이 조이곤 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죽은 어머니가 떠올라서 그런 것 같았다.

죽은 어머니는 샤를로즈를 굉장히 아꼈으니까.

유진이 샤를로즈를 버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죽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죽은 어머니가 아끼는 인형이라서, 죽은 어머니가 버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니까.

그래서 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저도 모르게 계속 신경을 쓰면서 알게 모르게 미운 정이 쌓였나 보다.

샤를로즈의 버르장머리 없는 모습을 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유진은 샤를로즈의 뒷모습에 허탈한 감정이 앞섰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의 유언장이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죽은 어머니는 샤를로즈를 죽어서까지 지켜 줬고.

제레미는 샤를로즈를 위해 미쳤고.

티아는 샤를로즈에게 집착하기 바빴다.

‘나는?’

유진은 순간 외로움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거.

이거 참 괴롭네.

“언니, 같이 가!”

티아는 유진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지 식사를 마치고 다다다 뛰어갔다.

식당에 혼자 남게 된 유진은 제 얼굴에 두 손을 묻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리 쉬었다.

자신의 주변에 진정한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

한편, 루아는 샤를로즈에게 보낼 약혼서를 손에 들고서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한심한 루아의 모습에 바로크엘이 한소리 했다.

“루아, 그냥 보내라고! 답답해 미치겠네. 너희 둘 결혼 한다며?”

“당연하지.”

루아는 바로크엘에게 약혼서를 건네면서 진지한 어투로 대답했다.

바로크엘은 1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받은 약혼서에 한탄했다.

어쩌다가 루아가 저렇게 변했을까.

바로크엘은 약혼서를 받아들고선 이제 루아의 수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레베크 공작저로 가려는데.

루아가 바로크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바로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용건이 있냐며 물어봤다.

“악마의 눈으로 지켜볼 테니 샤를로즈에게 들이대지 마. 알겠어?”

살벌한 루아의 눈빛에 바로크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랑에 미친 놈.

바로크엘은 루아를 그렇게 지칭하며 레베크 공작저로 향하기 위해 악마의 능력 중 하나인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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