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루아는 황궁에 있으면서 해리슨에게 귀족 예법을 받아야 했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식사를 하는 일.
백조처럼 우아하게 걷는 일.
지식을 쌓는 일.
식기를 제대로 사용하는 일.
등등 다양한 예법을 루아는 일주일 채 넘기지 않고 완벽하게 해냈다.
“정말이지, 대단하네. 인간들은 이 예법을 완벽하게 배우려면 보통 10년은 걸리는데.”
“이 하찮은 일에 10년이나 투자한다고? 인간들도 어지간히 심심하나 보네.”
“심심한 게 아니라 이 예법이 어렵다는 거지.”
“나도 옆에서 따라해 봤는데 쉽던데, 해리슨?”
루아의 충실한 수하가 된 바로크엘이 해리슨을 친구처럼 대했다.
그야 그럴 것이 루아가 바로크엘과 해리슨을 소개해 주었다.
[여기는 내 충실한 부하, 바로크엘.]
[악마 아니야?]
[악마 맞아. 너와 전쟁을 벌였던 악마 편의 우두머리였던 놈이지.]
루아의 말에 해리슨은 거북하다는 표현을 했다.
[괜찮아, 이제 인간 세상에서 악마들이 날뛸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해리슨은 뭘 믿고 그러냐며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했다.
[내가 이 녀석의 심장을 가지고 있거든. 게다가 다른 악마들도 내가 인간들 편에 섰다는 걸 대충 알게 되었으니 인간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너무 쉽게 풀리니까 더 무섭네.]
[난 쉽게 풀고 싶어. 샤를로즈와 동등한 위치로, 인간으로 만나고 싶으니까.]
루아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인간이 되기를 원하자 문득 제 자식인 이안이 떠올랐다.
[아버지,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힘들어요.]
[…….]
[제가 고작 여자 인간 하나 때문에 인간이 되고 싶어 미쳐 버렸거든요. 어떻게든 인간이 되고 싶어 악마의 힘을 억누르는 약물이란 약물은 다량으로 섭취했죠. 그래도 이 망할 악마의 힘은 여전히 몸 안에 남아 있더라고요.]
[이안,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악마는 인간이 될 수 없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아도 그녀와 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에 미칠 것 같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절대로 인간을 사랑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안이 병자들의 섬에서 떠나기 전에.
‘이안, 나도 네 처지와 같아졌구나.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미쳤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샤를로즈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루아는 샤를로즈를 위해서 대악마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악마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샤를로즈와 만났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진짜 인간이었다면.
샤를로즈와 오순도순 잘살고 있겠지.
악의 기운 없이는 살지 못하는 몸이 아니라.
루아는 가끔가다 자신이 악마로 태어났음에 화가 나곤 했다.
왜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이런 금지된 사랑에 손을 대게 하는 것인지.
옛날에는 인간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한 인간에게 미쳐 맛이 갔는지.
루아는 자신의 비굴한 처지에 자조에 찬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이 뭐길래.
사랑이라는 감정이 뭐길래.
섬세한 감정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던 루아는 샤를로즈가 알려 준 사랑이라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속앓이를 했다.
사랑이라는 이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샤를로즈가 무척이나 보고 싶을 뿐이었다.
만지지 않아도 괜찮다.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제 눈앞에만 있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루아는 해리슨과의 일정을 함께 마치고 황궁에서 밤을 보냈다.
***
시간은 또 이틀이 흘렀다.
이제 완벽하게 고위 귀족이 된 것 같은 루아를 보며 흡족해하는 해리슨이 루아를 향해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작위를 줘도 되겠어.”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
“영웅에 걸맞게 공작위를 주겠어. 어때?”
“샤를로즈와 대등하거나 높은 작위기만 하면 상관없어.”
“아마 샤를로즈보다 높을지도 모르겠네.”
“귀족 인간답게 살기 위해 살 곳과 재물도 줘.”
“영웅에 걸맞은 보상을 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루아는 드디어 샤를로즈를 만날 생각에 속으로 들떠 있었다.
샤를로즈와의 결혼 계획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으면 샤를로즈를 아내로 맞을 수 있어.
“그럼 작위식은 밤에 신하들을 불러 거행하도록 하지. 그리고 환영식은 내일 성대하게 할 거니까 기대해.”
“몰라, 빨리 끝내 주기나 해.”
“네네, 영웅의 말은 당연히 들어줘야죠.”
해리슨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루아는 화를 내지 않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자신을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니 봐준다는 느낌이었다.
***
밤이 되자, 황좌에 앉아 있는 해리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루아가 작위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인간에게 충성하고 있는 기분이야. 더럽네.’
루아는 속으로 이 치욕스러움을 참아 냈다.
드디어 해리슨이 말을 꺼냈다.
해리슨은–제국의 황제만 가질 수 있는 황족의-검의 손잡이를 잡고서는 루아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두 번 정도 쳤다.
“루아 페롤로제나. 새롭게 생긴 페롤로제나의 가문의 가주로 인정하며, 루아 페롤로제나가 공작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루아는 해리슨의 낮게 깐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
비록 몸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지만.
그래도 인간 행색은 제대로 낼 수 있었다.
그것만이라도 어디인가.
“루아 페롤로제나,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거라.”
“네, 알겠습니다. 폐하.”
루아는 눈치껏 해리슨의 말에 맞받아쳤다.
그렇게 루아는 새로운 성을 얻게 되었다.
페롤로제나.
아주 소중한 가문이었다.
***
루아의 작위식이 끝나고 다음 날 아침.
루아는 화려한 제국의 새하얀 제복을 입은 채 말을 탔다.
영웅의 환대식이 이른 아침에 있을 예정이었기에.
이미 제국의 백성들은 영웅을 환대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다.
영웅의 등장을 위해 백성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영웅, 루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흑색의 말을 타고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행차하는 루아는 저도 모르게 샤를로즈를 찾게 되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금색 눈.
아름다운 외형의 여자.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여자는 없었다.
루아는 속으로 시무룩했다.
아무래도 병자들의 섬에서 나온 이후 샤를로즈와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서로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샤를로즈는 루아를 찾지 않았고, 루아는 샤를로즈와 결혼하기 위해 잠시 몸을 감추었다.
‘이런 멋진 모습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미리 편지로라도 보내 줄 걸 그랬나.’
루아는 내심 우울해했다.
샤를로즈가 자신이 제국의 영웅이 되어 사람들에게 환호 받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렇게 흑색의 말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샤를로즈와 빼닮은 여자가 자신의 말 앞에 뛰어나와 주저앉아 버린 걸 보자 루아가 움직이려는 말을 제지했다.
‘설마, 샤를로즈?’
“저러다가 말에 밟히겠어!”
“큰일이야!”
“꺄아아악!”
괴상한 비명이 주변에서 귀에 거슬리게 들려왔다.
하지만 루아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저 여자가 샤를로즈일까.
아니면 닮은 인간인 걸까.
쿵쾅 뛰는 심장 박동이 온몸에 저릿하게 느껴졌다.
루아는 빠른 속도로 저를 올려 보는 그 여자의 모습을 똑바로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체념을 눈에 담고 있는 그 여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렀다.
“샤를로즈.”
루아는 나지막하게 샤를로즈를 불러 보았다.
속으로만 계속 불러 댔던 그 이름을 오랜만에 입 밖으로 내보냈다.
“…루아?”
역시 샤를로즈가 맞구나.
루아는 벅찬 감정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울면 안 됐다.
자신의 우는 모습은 오로지 샤를로즈에게만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은 오로지 샤를로즈에만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군가가 되었든.
루아는 지금 당장 샤를로즈를 껴안고 싶은 충동에 온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 충동도 억눌렀다.
제 저택에 가면 샤를로즈와 누리지 못한 일들을 다할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그는 그저 허리를 굽혀 샤를로즈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샤를로즈.”
집착이 잔뜩 묻은 목소리.
낮게 깔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
샤를로즈는 루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조금 당황했지만, 얼른 그가 내밀어 준 오른손을 맞잡았다.
루아는 샤를로즈와 맞잡은 손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샤를로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비틀거리며 쓰러지려고 하자 루아가 냉큼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샤를로즈, 조심해요.”
이후 루아는 더 대담한 짓을 벌였다.
샤를로즈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그녀에게 고백한 것이다.
“샤를로즈랑 결혼하려고 영웅이 되어서 돌아왔어요.”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