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바로크엘은 루아에게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설렁설렁 저었다.
“아무튼 간, 이 인간 황제의 환각을 풀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큰 작위와 영웅 취급을 받으려면.”
“아무래도 그렇지.”
해리슨의 상태가 계속해서 휙휙 변하니 더는 루아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지루하기도 했고.
그래서 환각을 풀어 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다들 왜 죽어.”
해리슨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와는 사뭇 다른 서글픔이었다.
마치 제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한 명씩 잃어 너무 슬프다는 듯.
“날 두고 죽지 마……. 제발, 살아 줘…….”
고통의 환각에 지친 해리슨은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다가 루아의 바지를 붙잡았다.
그리고 매달렸다.
제발 살아 달라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모두 다 자신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며.
해리슨은 얼떨결에 루아에게 용서를 구하게 되었다.
루아는 해리슨의 급격하게 어두워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고통의 환각을 풀어 주었다.
악마의 환각을 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다.
환각에 걸린 자와의 적당한 스킨십.
루아는 해리슨과 포옹을 할 생각에 벌써부터 짜증이 솟구쳤지만, 해리슨을 악마의 환각에서부터 구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해리슨을 껴안았다.
그걸 보고 있던 바로크엘이 호들갑을 떨었다.
“와아, 루아. 너도 참 비위 좋다. 여자 인간이든 남자 인간이든 다 포용하려는 네 마음, 대단한 것 같아.”
“닥쳐, 바로크엘.”
바로크엘은 루아의 험한 말에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바로크엘은 종종 루아를 놀리는 것이 재밌었다.
그 천하의 대악마가 자신의 장난에 화가 나는 것 자체에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크큭, 루아 네 꼬락서니가 너무 웃겨.”
“닥치라고 했어. 바로크엘.”
루아는 제 품에 안겨 있는 해리슨을 거칠게 놓아주며 해리슨을 침대에 눕혔다.
“내가 아는 루아가 인간을 침대에 눕히는 매너까지 있었다니…. 이것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바로크엘, 네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줘?”
“아이고, 알았어. 그만 놀리면 될 거 아니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네 심장을 멈추게 해 주지.”
섬뜩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루아에 바로크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 이상 더 입을 놀렸다가는 정말로 제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에 루아의 말대로 입 닥치고 있었다.
루아는 저를 성가시게 하는 바로크엘에게서 시선을 돌려 침대에 누워 있는 해리슨에게 눈길을 주었다.
어두웠던 낯빛은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고, 하염없이 울었던 두 눈은 이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루아는 해리슨이 자신의 환각에서 아예 벗어났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해리슨을 강제로 깨웠다.
악마의 능력 중 하나인 정신을 놓은 사람을 깨우는 능력을 사용했다.
그걸 사용하니, 해리슨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하아.”
해리슨은 짧은 탄식과 함께 두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파악하려는 듯했다.
해리슨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운 다음 아려 오는 두통에 아악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아파, 아파! 머리가….”
해리슨은 머리가 아프다고 계속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루아가 한 마디 던졌다.
“환각이란 그렇지. 환각을 빠져들 때는 괜찮지만 끝날 때의 후유증은 꽤 크다고.”
해리슨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귀를 쫑긋 세워 루아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이 망할 환각에 빠트린 장본인!
“네놈 때문에 무슨 고생을 했는지 알아?”
해리슨은 억울함에 루아에게 되려 소리쳤다.
루아는 능청스럽게 그 억울함을 되받아쳤다.
“네가 환각을 걸어달라고 했고, 나는 네 말을 들었을 뿐이야. 대체 뭐가 문제지?”
루아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 없었다.
황폐의 도시, 알로프에 트라우마가 있어 들어가지도 못하는 나약한 황제를 알로프에 들어가게 해 줬더니만 오히려 환각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냐며 큰소리 뻥뻥 쳐 대니 루아는 마음이 살짝 불편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화를 내기에는, 멍청한 인간 황제와는 말다툼할 가치조차 없었다.
“문제는…… 그러니까.”
해리슨은 환각에 걸리기 전 루아에게 매달려 제발 환각을 걸어 달라던 자신이 떠올랐다.
해리슨은 말을 하다가 뚝 멈춰 버렸다.
“딱히 환각에 대해서 더 할 말이 없으면 본론으로 넘어갔으면 하는데.”
“그, 전쟁은 어떻게 됐지?”
“성공적으로 잘 마쳤지.”
“성공적으로 잘 마쳤다고? 인간이 악마를 이긴 거야?”
“그래.”
“그나저나 네 옆에 있는 놈은 누구?”
“아, 이 녀석이 북쪽을 지배했던 악마 놈.”
“……?”
순간 해리슨의 머리 회전이 멈추었다.
인간과 악마의 전쟁을 일으킨 주원인이 왜 여기 있을까? 라는 생각이 해리슨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루아는 해리슨의 얼이 나간 표정에 바로크엘이 왜 여기 있는지 적당히 설명해 주었다.
“전쟁 직전에 바로크엘과 협력을 맺었어. 그리고 난 영웅이 되기 위해서 바로크엘과 인간 황제, 너를 이용했지.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야. 인간들은 날 영웅 취급을 하더군. 악마를 이긴 ‘인간’이라며.”
“실상은 악마를 이긴 악마잖아.”
“그러니깐 해리슨, 너만 입 닥치고 얌전히 황제 자리에 앉아 있으면 돼. 이번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줬으니 부와 권력은 제국에서 제일 가게끔 챙겨 줬으면 하는데.”
“……또라이 새끼.”
해리슨은 진짜 인간인 척 살아 갈 거냐며 루아에게 계속 물어봤지만, 루아는 계속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아, 알았어. 제국의 최고 고위 귀족인 공작자리를 내어 주지. 네 영토와 성도. 돈도 끝내주게 많이 퍼 담아 네 성 창고에 쌓아 주지. 이 정도면 됐나?”
“아니. 다들 나를 보며 우러러봐야 해. 내게 적대시하는 새끼들은 없어야 해. 그 정도의 권력 정도는 만들 수 있지, 해리슨?”
해리슨은 루아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빈정이 상해 저도 모르게 알겠다고 화를 내며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럼 서둘러 내게 작위를 내렸으면 하는데.”
“거참, 일에 순서라는 게 있어. 루아.”
“순서고 뭐고 간에 나는 얼른 샤를로즈가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얼른 작위를 받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그건 안 돼.”
해리슨은 뜻밖에도 루아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어째서?”
인간 세상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루아가 해리슨에게 물었다.
해리슨은 질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답했다.
“당연히 제국의 영웅이 되어 작위를 받았으니 화려한 등장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더 휘감아야지.”
“고작 그거 때문에 샤를로즈와의 만남을 더 늦추자고?”
“고작이라니. 너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 건 줄 알아? 인간 사회에서는 명예는 곧 권력이 돼. 레베크 공작 봐 봐. 제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샤를로즈를 감금하고 망가트리려고 했잖아.”
루아는 해리슨이 꺼낸 샤를로즈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그깟 가문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그 외로운 애를 방치해 뒀단 말인가.
루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려고 했지만, 샤를로즈를 위해 침착함을 유지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의 계획을 제 손으로 망치기 싫었다.
“그러면 며칠 동안 이 망할 황궁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데?”
해리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한 일주일 정도.”
“고작 등장만 하는데?”
“너 인간 귀족의 예법도 잘 모르잖아. 이참에 내 옆에서 배워.”
“……진짜 인간들은 참 귀찮게 사는군.”
루아는 질색인 듯 혀를 끌끌 차며 해리슨의 시선을 스르륵 피했다.
“샤를로즈와 비슷하거나 그 높은 위치에 있고 싶다며. 그러면 예법은 기본이지. 어차피 악마들은 습득력이 무척 빠르다고 했지?”
“그렇긴 한데, 내가 과연 인간의 문화를 잘 받아들일지가 문제야.”
“인간인 척 행세할 거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인간이 돼.”
진짜 인간이 되라고?
루아는 해리슨의 발언에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해리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샤를로즈 옆에 살 거면 인간이 되어야 하잖아. 그러면 평생 인간인 척 살아야 하고. 그럴 바에는 완벽한 인간이 되는 편도 나쁘지 않아?”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루아는 해리슨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샤를로즈의 옆에 있으려면 인간이 되어야지.
그녀와 걸맞은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비록 뼛속까지는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나저나 샤를로즈에게 다시 돌아갔을 때, 더는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어쩌나 싶었다.
샤를로즈는 자신의 애정 표현에도 성에 차지 않은 듯 계속 행동해 왔으니까.
계속 스킨십을 해도.
계속 아양을 부려도.
계속 사랑을 고백해도.
샤를로즈는 늘 웃음으로 답해 줄 뿐이었다.
진정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즉, 샤를로즈는 자신을 크게 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다가 샤를로즈에게 외면당하는 상상까지 해 버렸다.
루아는 두 손이 벌벌 떨렸다.
샤를로즈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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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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