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인간과 악마와의 전쟁은 루아의 생각보다 순조롭게 끝나는 듯 보였다.
루아는 해리슨의 뒤를 바짝 붙으며 자신이 준 환각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해리슨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주변을 살폈다.
그 주변엔 바로크엘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눈짓으로 자신이 언제쯤 항복을 외쳐야 하냐고 묻고 있었다.
그 눈짓을 금방 알아차린 루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대기하라며.
바로크엘은 자신이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제 등 뒤에서 갑자기 찔러오는 검에 화들짝 놀랐다.
푸욱!
깊숙이도 찔러오는 검에 바로크엘은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냈다.
감히 자신의 연기를 막는 놈이 누구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폐, 폐하께 다가가지 마! 이 악마야!”
“하!”
바로 해리슨의 두 번째 기사, 황실 제2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해리슨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다.
제1 기사단장이 되고 싶었지만, 기사단장 대회에서 제레미 레베크 공자에게 패배했다.
결국 자리를 내주고 자신은 2인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자신이 목숨까지 바치고자 한 주군이 가까이 있었으니까.
악마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은 용기를 낼 것이다.
폐하에게 상처 하나 남기지 않을 것이다.
황실 제2 기사단장은 마음을 꽉 다잡으며 으아아악!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리고 바로크엘의 등에 박은 검을 뽑았다.
바로크엘은 제 등을 쥐어 싸매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가렵네. 아 참, 차라리 여기서 연기를 시작할까. 그러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바로크엘은 슬쩍 루아의 눈치를 보았다.
루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인간 황제로 보이는 놈의 등을 살짝 밀쳤다.
그러자 그놈, 아니 해리슨이 발작하듯 큰 검을 막 휘두르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휘익, 휘익!
칼을 휘두르면서 나오는 바람 소리가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퍼졌다.
해리슨의 두 눈은 이미 환각에 눈이 멀어 새까맣게 변한 지 오래였다.
“죽어, 죽으라고! 망할!”
제2 기사단장은 처음 보는 제 주군의 모습에 놀라 당황했다.
“폐하? 무리하지 마시옵소서!”
“죽으라고!!”
좌절에 억누른 외침이 전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루아는 그제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발버둥 쳐.
발버둥 치다가 좌절하고 또 발버둥 치다가 좌절해.
‘그게 네게 준 작은 벌이야. 해리슨.’
샤를로즈를 싫어한 죄라고 받아.
그 죗값치고는 싼 편이니까.
루아는 계속해서 허공에 큰 검을 휘두르는 해리슨의 뒷모습을 보며 여유롭게 감상에 나섰다.
그러다가 해리슨 주변에 있는 바로크엘을 발견했다.
-바로크엘, 이제 저 인간 황제에게 항복을 선언해.
루아는 최상급 악마들만이 할 수 있다는 텔레파시를 사용했다.
루아의 명령을 받은 바로크엘이 토를 달았다.
-나 지금 다쳤는데, 괜찮냐고 안 물어봐? 이제 네 충실한 수하가 될 몸인데.
-어차피 그거 가지고 죽지도 않잖아. 얼른, 시간 없어.
-루아, 너무 차갑다. 나 상처받아.
-쓸데없는 말 그만 지껄이고 이제 항복 선언을 해.
-알았어, 알았다고!
바로크엘은 루아에게 이미 크게 질린 것인지 바로 연기에 들어갔다.
제 혀를 콱 깨문 다음, 제국의 황제, 해리슨에게 공격을 일부러 받았다.
솨아아악!
검이 바로크엘의 몸을 사선으로 그었다.
그리고 바로크엘의 입과 몸이 피로 물들였다.
바로크엘은 곧바로 주저앉으며 헐떡이는 연기에 들어갔다.
“허억, 허억! 인간 주제에 이렇게 셀 줄이야.”
“죽으라고! 죽어!”
이미 고통의 환각 때문에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해리슨에게 바로크엘의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바로크엘은 그러든 말든 계속해서 오글거리는 대사들을 읊었다.
“그래도 네 옆에 있는 놈은 다르겠지!”
바로크엘은 루아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루아에게 덤볐다.
물론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루아는 바로크엘이 제게로 빠르게 다가오는 걸 확인하고 바로 제압했다.
루아의 단단한 오른손이 바로크엘의 목을 잡고 있었다.
“커헉!”
바로크엘은 숨통이 조여듦과 동시에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미친 새끼!’
진짜 죽이려고 작정했네!
‘물론 나도 진심으로 대했지만.’
세진 루아와 한번 제대로 대련을 해 보고 싶어서 덤벼든 거긴 한데.
보통 강해진 정도가 아닌데?
엄청난 악의 기운이 바로크엘의 몸 안으로 들어가 치명타를 날렸다.
“쿨럭!”
바로크엘은 루아의 조용한 공격을 맞고만 있어야 했다.
이 엄청난 악의 기운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다.
“하, 항복!”
“잘 안 들리는데.”
“항복!”
바로크엘은 없던 힘을 쥐어짜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인간들이 환호성을 내뱉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간과 악마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그것도 정체 모를 영웅으로 인하여.
주변의 환호성에 루아는 바로크엘을 놔주었다.
“제발 네 충실한 부하가 되게 해 줘. 너처럼 강한 인간은 처음이니까. 계약을 맺어도 좋아.”
바로크엘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자 인간들의 환호성은 점점 커져 갔다.
바로크엘은 이 엿 같은 기분을 얼른 날리고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몸이 인간들한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여 주다니. 악마의 수치야.’
하지만 바로크엘은 이 수치를 감당해야 했다.
그야 샤를로즈라는 인간을 보고 싶었으니까.
루아에게 개죽음당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
차라리 루아의 부하로 들어가서 남은 인생을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인간들의 삶도 구경하고.
루아, 이 새끼 결혼하는 것도 구경하고.
뭐, 괜찮겠지.
바로크엘은 다른 악마들보다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수치심을 느끼다가도 금방 긍정적인 회로를 돌려 나름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그려 갔다.
“나를 부하로 삼아 다오. 인간이여.”
바로크엘은 루아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아는 제게 넙죽 엎드린 바로크엘에게 말을 꺼냈다.
“좋아. 너는 이제부터 내 부하야, 그전에 인간들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해.”
“맹세하지. 이제부터 악마들은 인간들은 괴롭히지 않을 거다. 악마의 맹세를 하도록 하지.”
바로크엘은 주변의 눈이 많으니 화려하게 일을 벌였다.
악마의 맹세.
즉, 자신의 심장을 루아에게 바치는 행동까지 벌인 것이다.
그럼 오로지 루아의 명령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크엘은 바로 목숨을 잃게 된다.
인간들은 바로크엘이 제 심장을 꺼내 루아에게 건네주는 장면을 보고는 기적이라며 난리 법석을 떨었다.
그렇게 루아는 영웅이 되었고, 해리슨 역시 제국을 위해 몸을 바친 희생의 황제가 되었다.
***
아직 작위를 받진 않았지만, 임시로 황궁에 머물게 되었다.
해리슨의 명령 덕분이었다.
자신의 환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해리슨을 제 맛대로 조종할 수 있었던 루아는 해리슨의 환각을 산뜻하게 바꿨다.
해리슨은 티아가 황궁에서 자신과 머물고 싶다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
“당장 황궁에 머물게 해라.”
루아는 해리슨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자신은 황궁에, 그것도 해리슨과 같은 궁에 머물게 되었다.
루아는 한참 동안 해리슨을 제멋대로 이용하다가 이제는 귀찮아진 것인지 그 환각을 깼다.
화려한 붉은 달이 뜨던 어느 밤.
황궁이 깊은 고요에 빠지던 날이었다.
루아는 해리슨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
루아의 옆에는 바로크엘이 함께였다.
그야 제 심장을 준 자였기에 언제나 옆에 있어야 제 마음이 편했다.
루아도 바로크엘이 옆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았기에 황궁에 들어와서도 가만히 두었다.
“그러니깐 지금까지 이 인간 황제는 네 환각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던 거야? 어쩐지 눈빛이 어둡더니만.”
“너는 눈치챌 줄 알았지.”
“내가 네 환각을 어떻게 눈치채. 네 전문인데.”
“가끔 눈치챌 때도 있잖아.”
“그건 네가 허술하게 환각을 펼칠 때 말하는 거고. 지금은 완벽한 환각인데? 이건 나도 못 할 것 같다.”
바로크엘은 루아의 능력에 두 번 감탄했다.
악의 기운도 강해진 것도, 환각이 이렇게 완벽한 것도.
다 그 샤를로즈 레베크 라는 인간 때문인 건가.
점점 갈수록 궁금하단 말이지.
그 인간이.
바로크엘은 루아가 그렇게 빠진 인간이자, 루아를 이렇게까지 강하게 만든 장본인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죽더라도 그 인간을 보고 죽어야겠다는 욕망이 생겼다.
바로크엘은 황궁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해서 루아에게 샤를로즈를 보러 가자고 하루에 몇 번이나 말했지만 루아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한 수백 번 거절 당했나.
바로크엘은 그래도 샤를로즈와의 만남을 포기하지 못했다.
수천 번 거절당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만 볼 수 있다면.
바로크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샤를로즈와의 첫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던 바로크엘에게 루아가 한 소리 했다.
“또 샤를로즈 생각하는 거냐, 바로크엘.”
“당연하지. 나 너무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어떤 애야? 응? 성격이나 외형! 이런 것 정도는 말해 줘도 되잖아.”
“내가 왜?”
“……그거야 네 미래 부인이 될 자니까?”
“싫어.”
“그냥 정보를 알려 달라는 건데 왜 싫어?”
루아는 바로크엘을 마치 연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며 작게 읊조렸다.
“다른 새끼가 샤를로즈에 대해 관심 갖는 것 자체가 질투 나 미칠 것 같으니까.”
바로크엘은 루아가 진정으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저번까지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진짜다.
자신을 죽이겠다는 저 눈빛.
샤를로즈라는 이름을 한 번만 더 입에 담으면 죽이겠다는 저 혐오스러운 눈빛.
분명 저건 미친 게 틀림없다.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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