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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96/120)

96화

루아는 해리슨의 환각 상태를 풀어 주지 않은 채 휘청거리는 해리슨을 보필하며 알로프로 향하는 게이트로 향했다.

대마법사 요한이 직접 만든 게이트였다.

루아는 예전에 전쟁 목적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샤를로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제국에는 요한 덕분에 신비한 것들이 많아. 물론, 그 용도는 다 폐하를 위한 것들이지만.]

[그렇군요.]

[요한이 폐하에게 하는 것을 보면 나도 나만의 것을 가지고 싶긴 해. 혼자는 무서우니까.]

[제가 있잖아요. 샤를로즈.]

그 당시, 루아는 진심을 다해 고백하듯 말했지만 샤를로즈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렇지. 내 곁에는 루아가 있지. 그런데 우리 계약이 끝나면 이 관계도 끝이잖아. 위태로워, 참.]

그녀의 말에 루아는 언제 계약이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물론, 샤를로즈에게 처음 다가갔을 땐 흥미였지만 지금은 완전한 사랑이었다.

어느 순간 자신은 오로지 샤를로즈만 보고 있었고, 샤를로즈의 말만 듣고 있었다.

바보같이 말이다.

샤를로즈를 정말로 잃기 싫은 루아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완벽한 인간이 되기로 제대로 마음먹었다.

샤를로즈와의 결혼과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인간과 악마들이 절대로 존재하지 않기를.

그렇게 바라고 있었다.

루아는 넋을 놓고 있는 해리슨과 해리슨이 이끄는 제국군들을 힐끗 바라보며 조용히 흥얼거렸다.

이 귀찮은 전쟁이 끝나고 영웅이 된다면, 샤를로즈의 옆에 영원히 붙어 있을 수 있었다.

루아는 짙은 욕망을 가까스로 숨긴 채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황폐의 도시, 알로프에 이미 도착해 가짜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는 중급 악마들은 제 주군이던 바로크엘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바로크엘 님, 어째서 인간과의 전쟁에서 져 줘야 합니까? 억울합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인간 따위에게 지고 싶지 않습니다!”

손톱을 잘근 깨물던 바로크엘은 중급 악마들에게 대충 대답했다.

“대악마의 지시야. 내가 대악마를 어떻게 이겨. 내가 죽으면 너희도 개죽음이야. 알잖아, 그 녀석 성격.”

“정말 대악마 님이 인간 편에 붙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바로크엘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설렁설렁 답했다.

그럼에도 중급 악마들은 대악마의 성격을 잘 아니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대악마, 루아 님의 성격상 그분 앞길을 막고 있는 장애물들은 모두 다 없애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미친 성격이었으니까.

최상급 악마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악마 루아의 평은 좋지 않았다.

물론 중급~하급 악마들은 소문으로 익히 들었기에 루아의 명령이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최상급 악마들조차 두려움에 떠는 대악마였었으니까.

“너희도 무섭지? 나도 무섭다. 루아는.”

제2위 악마인 바로크엘 조차 저렇게 말하니 다른 악마들은 더욱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정말 인간에게 져 주는 연기만 한다면 무사히 끝날 수 있는 것 맞나?

라는 의구심이 마음속 깊은 곳부터 피어올랐다.

한 명이 불안해하니 또 옆에 있는 놈이 불안해했다.

삽시간에 바로크엘을 제외한 모든 악마들이 불안으로 떨기 시작했다.

술렁이는 악마들이 거슬린 바로크엘은 미간을 좁히며 박수를 쳤다.

짝짝!

“집중! 너희가 인간 새끼들도 아니고 악마 새끼들이 왜 이렇게 불안해해. 우리는 그냥 죽는 시늉만 하면 돼. 그러면 전쟁이 끝나. 쉽잖아?”

“쉬운 건 알지만… 혹시나 대악마 님의 심기를 거슬리면 어쩌나 싶어서요.”

한 악마의 발언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대악마, 루아는 갑자기 제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약속과 다르게 주변 악마들을 죽이는 악취미가 있다고 들어서였다.

그래서일까.

중~하급 악마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루아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루아가 얌전히 죽는 척 연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냥 그렇게만 해. 그 녀석, 나랑 한 약속은 잘 지키는 편이었으니까.”

“그럼 약속이 뒤틀릴 수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건 뭐 어쩌겠어. 너희들과 나의 운명이지.”

오, 악마의 신이시여.

악마들은 없는 신을 찾아가며 속으로 쓸데없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관들이 보면 비웃음을 살 일을 말이다.

“너희들만 불안한 게 아니라 나도 불안해. 나는 너희들보다 더 남은 인생이 망했거든.”

죽는 인생보다 더 망한 거라면 고문이라도 당하는 건가…?

악마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주군, 바로크엘이 갑자기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불쌍한 주군.

대악마에게 제대로 찍혔군요.

다들 같은 생각에 바로크엘을 차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동정이라는 눈빛으로 바로크엘을 보다가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물씬 들었기에.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란색 게이트가 생기며 황폐의 도시, 알로프로 들어오는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

해리슨은 갑자기 눈이 부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너무 따뜻해서.

그저 본능에 맡겨 발걸음을 천천히 떼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옆에서 들려오는 낮고 듣기 좋은 음성이 해리슨의 불안감을 아예 없애 주었다.

그 덕분에 해리슨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했다.

그간 피곤했던 것이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평생 알 수 없는 이곳에 남고 싶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와 평생을 보내고 싶었다.

평생.

하지만 그 꿈같은 주변이 보이는 것도 잠시.

피비린내가 해리슨의 코끝을 스쳤다.

해리슨의 눈앞에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며 곧 죽을상을 한 요한이 보였다.

“요, 요한?”

왜 요한이.

해리슨의 눈동자가 스르륵 내려갔다.

그러자 보이는 건.

자신의 검이었다.

“폐하……. 티아와 잘 살아. 나는 끝인가 봐.”

“요한? 요한?”

해리슨은 조금 전 느꼈던 편안한 감정이 모두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에게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그 절망은 해리슨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으아아악!”

해리슨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부짖었다.

이곳이 환각 속이라는 것을, 악마에게 정신을 팔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해리슨은 그저 요한의 시체를 붙잡고 울부짖기 바빴다.

“아아아악!”

한편, 환각이 아닌 현실에서 해리슨이 갑자기 크게 허공에 외쳤다.

그러자 제국군들이 얼른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줄 알고 빠르게 흩어져 악마들에게 달려들었다.

***

챙, 챙!

“살려 줘…….”

“죽었다…….”

“나는 죽었다…….”

악마들은 인간들 앞에서 열심히 죽는 시늉을 하며 연기하고 있었다.

루아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인간들은 죽는 시늉을 내는 악마들을 그냥 밟고 지나갔다.

진짜 죽은 줄 알고.

루아는 샤를로즈를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은 참 멍청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런 연기가 통하다니. 정말 샤를로즈를 제외한 인간들은 수준이 한참이나 낮군.’

답답한 마음에 어설픈 연기를 보여준 악마들을 직접 찾아간 루아는 죽은 척 연기하며 땅바닥에 누워 있는 그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연기야?”

흡!

바로크엘 편에 선 악마들이, 인간들에게 죽은 척 연기를 하고 있던 악마들이 루아의 살벌한 목소리에 숨을 쉬던 것을 멈추었다.

대악마 루아의 중압감과 살기에.

루아를 처음 보는 대다수의 악마들은 질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들어 올려 루아를 올려다보았다.

땅바닥에는 반듯이 누운 채로 말이다.

루아는 한쪽 입가를 비틀리게 웃으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오래 살았으니, 진짜 죽고 싶어진 건가? 아니면 바로크엘이 제대로 전달을 못 한 건가?”

“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원래는 죽어야 할, 악마 녀석이 저도 모르게 루아의 분위기에 이끌려 대답을 해 버렸다.

루아는 제게 말대답을 한 악마 녀석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죽은 녀석이 왜 말을 하지? 아, 진짜 죽지 않아서?”

루아는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악마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붙잡았다.

루아에게 잡힌 악마는 몸을 파르르 떨며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악마들 사이에서 내 평가가 좋았던가?”

“사, 살려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인심이 좋은 악마가 아니라서. 세헤라자아처럼 인자한 악마가 아니야.”

“살려 주신다면 제 목숨을 바치겠…….”

“네 하찮은 목숨 따위 필요 없다.”

루아는 악마의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악!”

악마는 마지막 몸부림 끝에 루아의 힘에 억눌려 죽어 버렸다.

진짜 시체가 되어 버린 악마를 무심하게 보던 루아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맑게 웃었다.

“또, 이렇게 죽을 새끼 있어?”

없습니다. 예.

죽은 척 연기하는 악마들은 속으로 대답하고선 실감나게 시체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진짜 죽는 건 싫었기 때문에.

루아는 그제야 맛깔나게 시체 연기를 하는 악마들이 그제야 마음에 들었다.

다시 흥얼거리며 앞서 나가는 해리슨의 뒤를 천천히 밟았다.

자신이 직접 내린 환각에 고통스러워하는 해리슨을 느긋하게 보기 위해서.

루아는 키득거렸다.

악마들은 보통 인간들에게 좋은 환각을 보여 주지 않았다.

보여 줘도 잠깐이었다.

미련하게도 이 도시가 무서워서 악마의, 그것도 대악마의 환각을 믿은, 바보 같은 해리슨을 보며 루아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기에 샤를로즈한테 더 잘하지 그랬어.

샤를로즈에게 못되게 한 벌도 그 환각에 포함되어 있는데.

어리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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