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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95/120)

95화

“그래서 전쟁이 지금 시작 한다고?”

해리슨은 정신을 차린 뒤, 시중들을 불러 제복으로 갈아입으며 루아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 미지근한 반응은 뭐야.”

“어서 옷이나 갈아입고 다 돌려보내. 이래서는 제대로 내 할 말을 할 수가 없잖아.”

루아는 네 명의 시중들을 힐끗 보며 해리슨을 향해 작게 말했다.

해리슨은 알았다며 대충 자신이 옷을 갈아입겠다고 시중들에게 전한 뒤, 그들을 방 밖으로 쫓아냈다.

쾅!

방문이 닫히자 루아는 갑갑한 숨을 내쉬었다.

“대충 입지. 어차피 이기는 게임인데.”

“그래도 명색의 황제인데, 발가벗고 다닐 수는 없잖아?”

“말장난은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래. 본론이 대체 뭐야.”

“어차피 악마들은 인간들을 죽이지 못할 거야. 내가 그리 명령했으니까. 만약에라도 그걸 어기면 내가 직접 그 악마들을 죽일 거야. 네 편의 인간들을 한 명도 죽지 않도록 하겠다.”

“그게 가능한 계획이야? 악마가 일부로 인간에게 전쟁에서 져 줘? 하!”

“타협을 봤으니까. 그 녀석 다혈질이라서 성질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꽤 믿을 만한 녀석이야. 성질만 건들지 않는다면.”

“다혈질이라. 까다로운 악마네.”

“그러다가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난 네 목숨도 보장 못 해. 그다음부터는 바로크엘을 죽이는 데 힘을 써야 하거든.”

“대책이 없는 계획이네. 루아.”

“대책이 없다니, 이 정도면 인간들을 위해 많이 신경을 써 준 건데.”

“하기야 네 녀석이 인간의 편에 선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야 해야 하나.”

“그것도 좋은 태도지. 난 인간이 정말 싫었는데 샤를로즈 덕분에 인간에 대한 인식이 꽤 바뀌었거든. 나름대로 좋은 쪽으로.”

“그것도 샤를로즈 한정 아니야?”

“맞아.”

당당하게 대답하는 루아에 해리슨은 혀를 끌끌 찼다.

‘저 녀석의 뇌는 샤를로즈밖에 들어 있지 않은 건가.’

해리슨은 악마와의 전쟁에서 진짜로 이길 수 있을까 잠시 의문이 들었다.

저 녀석, 루아도 악마였다.

인간들을 희롱하는 아주 못된 종족.

악마들은 인간들에게 거짓말로 희망을 심어 준 뒤 점점 미쳐 가는 모습을 좋아했다.

혹시 루아도 자신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버리려는 속셈이 아닌지,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너, 눈빛이 나를 의심하는 눈빛인데. 날 믿지 못해?”

“솔직하게 말해서 갑자기 튀어나온 널 어떻게 신뢰해. 물론, 샤를로즈와 계약한 자라서 그나마 조금 믿고 있는 거지.”

“내가 악마라서 믿음이 없나. 아니면 악녀인 샤를로즈의 편이라서 믿음이 없는 건가.”

“여기서 샤를로즈 얘기는 왜 나와.”

“솔직하게 말해 나는 샤를로즈 옆에서 너희의 만행을 다 봤으니까. 너희도 샤를로즈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요한과 나는 다른 애들과는 달라. 샤를로즈에게 악한 감정은 이제 다 사라졌어. 그러니깐 내가 너를 방에 들인 거지.”

“그런데 왜 의심 섞인 눈빛을 내게 보내는 걸까.”

“악마이란 놈들은 속이 새까매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해리슨은 옷 단장을 깔끔하게 마친 뒤, 루아를 향해 말했다.

루아는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해리슨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루아가 짚은 어깨에 작은 고통이 느껴졌다.

“윽, 아파.”

“내 속내를 잘 모르겠다고? 그럼 잘 들어. 나는 오로지 샤를로즈와 결혼하기 위해 이 전쟁에 뛰어드는 거야. 이 전쟁에서 영웅이 되어 신분 상승을 하고 인간 행색을 하며 살 거야. 알아들었어?”

“알아들었으니깐 좀 떨어져!”

“말이 좀 통해서 참 다행이네.”

콰콰쾅!

루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서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황실 제2 기사단장이 서둘러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악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루아는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악마들의 특유의 향으로 알고 있었지만, 해리슨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미리 알려 주면 너무 재미없기도 했고, 이미 루아의 머릿속엔 인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악마들이 제국에 쳐들어와 난장판을 만든 뒤 자신이 영웅처럼 무찌르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렇기에 미리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해리슨에게 일러 주지 않았다.

주인공은 언제나 늦게 등장하는 법.

루아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달고선 서둘러 움직이는 해리슨의 뒤를 아주 조용히 쫓았다.

***

해리슨은 황궁이 악마들로 인해 난장판이 된 걸 보며 루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설명해 보라고 눈짓을 했다.

루아는 여기까지는 자신이 알 수 없었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 괘씸한 악마 놈.’

해리슨은 역시 악마란 종족은 믿지 말아야 했었나, 괜스레 후회하기 시작했다.

믿지 말았어야 했나.

“폐하! 부상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곧 들려오는 황실 제2 기사단장의 뜻밖의 말에 해리슨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이렇게 난장판인데 부상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해리슨은 슬쩍 제 옆에서 주변을 구경하고 있는 루아를 노려보았다.

“뭐야, 이것도 다 네 계획에 들어가 있는 거였어? 부상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어.”

“방금 전에 내가 말했잖아. 인간들은 한 명도 죽지 않을 거라고. 이건 아마도 전쟁 선포를 하러 온 거 같은데.”

루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악마들이 남긴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바로크엘이, 아니 전쟁을 치를 악마들이 있는 위치를 금방 알아챘다.

악마들의 특유의 향기가 지독하게 풍기는 곳.

그곳이 바로 악마와 인간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루아는 해리슨을 향해 손짓했다.

해리슨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얼른 루아가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

“왜. 무슨 일인데.”

“전쟁이 벌어지는 위치를 찾았어. 얼른 그곳으로 가지.”

“우리 제국에서 전쟁이 나는 거 아니었어?”

“눈치가 있다면 바로크엘, 그 녀석이 그럴 리 없겠지.”

“악마들은 참 별나다니까.”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내 계획에 맞춰 줘. 인간 황제.”

“인간 황제 말고 해리슨이라고 가볍게 불려. 왠지 인간 황제라고 불리니 기분이 나쁘네.”

“싫은데.”

“하아, 고집불통이야.”

“전쟁에서 지고 싶지 않으면 네가 이끄는 제국군들을 이끌고 황폐의 도시, 알로프로 와.”

“알로프?!”

해리슨은 ‘알로프’라는 도시에 매우 놀란 기색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알로프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다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산지옥이라고도 불렸다.

게다가 대륙의 중간에 있어 알로프는 무역의 지름길 역할을 했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이 산지옥에 직접 발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빙빙 돌아갔지.

“어차피 내가 있어서 거기서 죽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인간 황제.”

“그래도 알로프는-.”

“이대로 포기하면 넌 악마에게 지게 돼. 그러면 이 세상은 악마의 지배로 인해 움직이겠지. 그 꼴을 보고 싶어?”

“……그건 아닌데.”

알로프는 단박에 가겠다고 하기엔 두려움을 자아내는 곳이다.

해리슨은 딱 한 번 알로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황태자였을 때, 뭣도 모르고 무서운 도시라고 들어 혼자 들어갔다가 죽기 직전에 겨우 살아남아 돌아왔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해리슨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알로프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자 호흡이 가빠졌다.

공황이 올 것 같았다.

시야가 조금 흐릿해지면서 호흡이 이유 없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아, 하아.”

“인간 황제. 왜 그래?”

“무서워서.”

해리슨은 알로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루아에게 사실대로 털어놨다.

루아는 해리슨의 공황에 빠진 모습을 잠시 보더니 해리슨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럼 내가 환각을 걸어 주지.”

“……환각?”

“그래. 네가 예전에 본 그 알로프는 없을 거야. 대신에 네가 원하는 전쟁터의 장면이 아른거릴 거야.”

“알로프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뭐든 좋아.”

지금 전쟁이 터졌는데 그곳에 가지 못한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제국 황제의 수치였다.

해리슨은 루아에게 매달려 부탁했다.

루아는 걱정하지 말라며 해리슨을 다독이며 환각을 걸었다.

악마의 능력 중 하나인 ‘환각’을.

악마의 환각은 뒷세계에서 파는 환각을 펼치는 약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뒷세계.

흔히들 어둠의 세계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파는 약 장사꾼들이 만든 환각 약은 잠시 환각을 보여 주며 쾌락을 느끼게 해 주는 반면에.

악마의 환각은 진짜 세상을 보여 주었다.

환각 약에서 잠깐 보여 주는 그런 가짜 세상이 아닌 진짜인 것 같은 세상을.

그리고 모든 감각또한 환각 속에서 진짜처럼 변했다.

환각 약은 감각까지는 환각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악마의 환각은 모든 감각을 진짜로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악마의 환각은 악마가 직접 환각을 끊어 줘야지 그때야 비로소 환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러니깐 즉, 해리슨의 환각을 루아가 끊기 전까지는 해리슨은 평생 환각을 가진 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악마의 능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해리슨은 이 공황에서 탈출하고자 뭣도 모르고 루아의 달콤한 속삭임에 홀라당 넘어간 것이다.

미련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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