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20)

94화

바로크엘은 루아의 이야기가 퍽 궁금했는지 멀뚱히 서서 루아의 이야기에 경청할 준비를 했다.

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 그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를 읊어 줄 생각이었다.

하긴, 악마들은 대화를 나누는 장소를 딱히 가리지는 않았으니.

바로크엘도 루아와 대화를 나누는 꼴을 보아하니 전쟁터 같은 지금 이러한 순간에서 대화하는 것이 꽤 익숙해 보였다.

“뭔데, 말해 봐.”

다른 악마들보다 호기심이 배는 많은 바로크엘이 루아를 향해 칭얼거리며 말을 꺼냈다.

루아는 숨을 한 번 내뱉고, 샤를로즈와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샤를로즈 레베크와의 첫 만남은 지하실이었어. 초대 레베크 공작이 나를 봉인해 가둔 그 지하실.”

“그 샤를로즈라는 인간은 어쩌다가 악마가 봉인된 지하실로 오게 된 거야. 가문에서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샤를로즈 레베크. 꽤 유명한 악녀더군. 샤를로즈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인간들이 왜 그녀를 싫어하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정도지.”

“대악마인 네가 이해 갈 정도면 얼마나 인간이 악한 거야.”

“가끔 샤를로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소름이 돋더라고.”

“루아, 네가 소름 돋는 인간이 있다니. 내가 더 소름 돋는다.”

바로크엘은 대체 샤를로즈라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미친 듯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악마 루아가 저렇게 인간에게 꼼짝없이 당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

게다가 그 악의 기운.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악의 기운이 아니야.

‘설마 인간이 아닌가?’

가끔 인간이 아닌 척 살아가는 종족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자면, 흑주술사라든가.

악마를 지독하게도 따라 하는 이상한 종족.

인간보다는 강하지만 악마보다는 약한 종족들.

뭐, 지금은 씨가 말렸다고 들었는데.

제대로 본 적이 있어야지.

바로크엘은 오랜 삶을 살면서 그 흔했다는 흑주술사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악마가 아닌 종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다. 나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최근에 들어서였다.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간단했다.

인간들이 죽으면서 지르는 그 비명에 쾌락이라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그 쾌락을.

지금에서야 맛보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고문하고 지배하는 것에 쾌락을 일찍 알게 된 악마들은 오히려 지금은 인간들을 괴롭히지 않고 있었고, 그들과 반대로 그 쾌락을 늦게 알게 된 악마들이 지금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쾌락을 뒤늦게 알게 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로크엘이었다.

원래 바로크엘은 루아밖에 모르던 루아 바보였다.

어떻게든 루아를 이겨 대악마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쌓던 놈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타락했는지.

루아는 바로크엘의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잠시 비교해보다가 고개를 살살 저었다.

비교할 가치도 없는 새끼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바로크엘은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 나간 건 똑같았다.

그 죽이는 대상이 바뀐 것뿐이지.

쯧.

루아는 바로크엘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못 이기는 척 다음 말을 마저 했다.

“샤를로즈와의 짧은 감금 생활이 꽤 괜찮았었는데. 우리 세계에 아무도 발을 들이지 못한 그 기분이 너무 좋았어. 이젠 봉인이 풀려버린 탓에 그 좋은 기분은 더는 느끼지 못하지만.”

바로크엘은 루아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왼쪽으로 뚝 기울였다.

“그냥 그 샤를로즈라는 인간을 네가 감금하면 되잖아. 그럼 그 인간은 너만 보겠지.”

“이미 상상으로는 몇백 번은 감금을 시도했지. 하지만 샤를로즈가 싫다는 건 나도 싫어.”

“언제부터 우리 루아가 인간의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사랑하는 자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이 감정 때문에 나도 점점 변하고 있더라고. 신기해.”

“사랑이라는 거 재밌어?”

바로크엘은 사랑을 해 보지 못했다.

악마들은 인간이 쉽게 느끼는 감정을 이해를 못 했으니 당연했다.

루아는 바로크엘의 질문에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재밌기보다는 설레. 뛰지도 않았던 심장이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뛰고 남몰래 귀가 붉어지는 게 느껴져. 행복이 멀지 않구나, 이런 걸 느껴.”

“나도 사랑이란 걸 해 볼까.”

“별로 너한테는 추천하지 않아.”

“왜?”

“너, 또라이잖아.”

루아의 비꼬는 말투에 바로크엘은 저도 모르게 욱해 소리쳤다.

“너도 만만치 않거든!”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고. 이제 내 충실한 수하가 될 준비가 끝났으려나?”

“어.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했어. 대신에 꼭 그 샤를로즈라는 인간이랑 자주 보게 해 줘.”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자주 볼 테니 그만 징징거려. 방금 전에는 인간의 비명에 쾌락을 느낀다면서.”

“조금 전에 그 쾌락도 샤를로즈에 대한 흥미로 사라져 버렸어. 그냥 샤를로즈가 어떤 애인지 궁금할 뿐이야.”

“미친놈.”

“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니거든?”

“대신, 샤를로즈 주변에만 맴돌아. 샤를로즈가 먼저 말 걸기 전까지는 웬만해서는 말 시키지 말고. 알겠어?”

“엑, 왜?”

“샤를로즈가 너보다 위니까.”

“하아. 내가 인간에게 밀리는 날이 올 줄이야. 젠장.”

바로크엘은 제 신세를 한탄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루아는 바로크엘에게 전쟁을 어떻게 져 줄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바로크엘. 전쟁은 네가 먼저 시작해.”

“어? 전쟁을 해도 돼?”

“대신 일부로 져야 해.”

“으으음. 내가 일부로 져야 한다니. 이런 날이 오다니. 젠장.”

“그냥 네 부하 격인 악마들에게 명령해. 인간들에게 죽어 주는 척 연기 하라고.”

“아아. 다들 나를 뭘로 볼까. 나 같은 주군을 혐오하겠지.”

“네가 언제부터 이미지를 챙겼다고 그래. 바로크엘.”

루아는 심드렁하게 바로크엘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를 남겼다.

그러나 그 위로의 말은 바로크엘에게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넌 정말 남의 마음을 모른다. 루아.”

“아무튼 간, 전쟁 때 보자고. 아, 거기서 전쟁터에서는 아는 척하지 말고.”

“그런 건 나도 아니깐 일일이 말해 주지 마.”

“혹시 모르잖아. 네 다혈질 성격 때문에 내 계획이 틀어지면 굉장히 큰일 나니까.”

“그럼 네가 내 본 성격이 나오지 않게 전쟁터에서 주의를 주든가.”

“내가 왜? 그냥 널 죽이면 되는데.”

루아의 섬뜩한 말에 바로크엘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정말 정신 나간 놈.’

짙은 회색빛과 하늘색이 섞인 눈동자는 짙은 갈증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맛이 간 루아의 두 눈을 본 바로크엘은 일단 후퇴를 했다.

여기서 더 대화해 봤자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게 없다고 판단했다.

“됐어, 가 봐. 전쟁을 당장 시작할 테니까.”

일 처리가 빠른 바로크엘의 행동에 루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잘 부탁해, 바로크엘.”

“어어.”

이번에는 몸으로 직접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정말로 패배했다고 생각한 바로크엘은 힘없이 돌아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바로크엘이 점점 멀어지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루아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 인간 황제에게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서.

***

해리슨은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깨야 했다.

그건 바로 루아 때문이었는데.

“…좀 자자.”

수면이 필요 없는 악마는 해리슨이 잠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에 그저 해맑게 웃을 뿐이다.

해리슨은 루아의 웃는 낯짝에 문득 샤를로즈가 떠올랐다.

‘샤를로즈가 나를 괴롭히라고 시켜서 온 건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자주 자신을 볼 리 없었다.

루아는 해리슨의 침대에 걸터앉아 제 할 말을 하기 바빴다.

“곧 악마와 인간과의 전쟁이 시작될 거야.”

“……?”

해리슨은 루아의 말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북쪽을 지배하고 있던 악마 놈의 정체를 알아냈고 타협을 보고 오는 길이야.”

“설마 네가 아는 녀석이냐?”

“응. 나보다 한 순위 낮은 악마. 바로크엘.”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그야 그렇겠지. 바로크엘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나를 어떻게 죽일까 고민만 하던 놈이었으니까.”

“그런 놈이 왜 갑자기 인간과의 전쟁을 선포한 거냐. 하아.”

“악마들의 유흥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삶이 긴 악마들에게 있어 인간들은 장난감에 불과하니까.”

“…너, 설마 샤를로즈도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있냐?”

해리슨은 설마 하는 마음에 루아에게 스리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을 들은 루아의 동공이 가로로 퍼졌다.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 샤를로즈를 장난감으로 생각하겠어. 샤를로즈는 내 연인이야.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들이 쓸모없는 장난감들이지.”

섬뜩하다.

해리슨은 루아에게서 처음으로 섬뜩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렇게까지 무서운 애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알고 보니 샤를로즈보다 이 새끼가 더 무서운 것 같다.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