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북쪽 성문이 뚫렸다.
성문이 뚫렸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크엘은 당황스러움에 두 눈을 토끼처럼 뜨고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배치한 수많은 악마들을 죽이는 인간이 있다고?
악마를 죽이는 인간은 태어나서 살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동족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악마의 피 냄새에 바로크엘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성을 찾아온 미친놈의 낯짝을 직접 보러 갔다.
이러다가 자신이 곱게 쌓은 성이 쓰러지면 큰일 나니까.
그렇게 죽은 악마들의 피 냄새가 진득하게 나는 곳으로 간 바로크엘은 산처럼 쌓인 시체들을 보며 한숨부터 쉬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악마들을 저렇게 죽이냐며.
“오랜만이야, 바로크엘.”
바로크엘은 곧이어 낮고 매혹적인 음성이 귓가에 느릿하게 들려오자 살짝 숙인 고개를 번쩍 들었다.
“…루아? 너 루아야? 봉인은?”
“바로크엘, 내가 봉인에 풀려난 지 몇 달 됐는데 모르고 있었어? 조금 서운하네.”
“어떻게 그 봉인을 푼 거야.”
루아는 흥분하는 바로크엘을 향해 비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인간이 날 봉인에서 풀어 줬어.”
“인간이 너를 봉인해서 풀어 줘? 그 인간 미쳤대? 아니, 네 그 봉인을 풀 능력이 있는 인간이 있긴 해?”
“나도 놀랐어.”
“아아, 조금 더 일찍이 네가 봉인에 풀렸다는 걸 알았으면 같이 인간을 지배하는 거였는데. 안 그래, 루아?”
바로크엘은 능청스럽게 루아의 어깨에 오른팔을 두르며 말했다.
루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입가 띤 미소를 잃지 않았다.
“글쎄. 인간을 지배해 봤자 무슨 쾌락이 있다고 이런 헛짓거리를 하는 걸까, 바로크엘?”
“인간들의 비명을 들을 때마다 내 심장이 뛰어. 오래 살다 보니 이상한 취미가 들었나 봐. 어쩌면 정신이 맛 간 걸지도?”
“나도 꽤 오래 산 입장이지만, 너처럼 아예 미치지는 않았어. 바로크엘.”
“아, 그래? 어떻게 하면 예전과도 같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비법이라도 있어?”
“비법이라….”
루아는 제 날카로운 턱선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고민하는 척 하늘색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바로크엘은 루아의 느린 반응에 안달이라도 났는지 미간을 좁히며 루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 얼른. 비법이 뭐냐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 그게 비법인 것 같다.”
“루아,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아서 그런데 다시 말해줄래?”
“나 여자 인간과 결혼하고 싶어졌어.”
“오, 내가 미친 건 미친 게 아니었구나. 네가 더 미쳐 있었군. 겉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속이 문드러졌구나. 루아.”
바로크엘은 루아가 불쌍하다는 양 바라보았다.
루아는 바로크엘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 달고 말했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기도 해. 인간을 혐오하던 내가 인간과 결혼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돌아 버릴 지경까지 왔으니까.”
“오, 이를 어쩌면 좋지. 인간에게 빠진 악마들의 최후를 떠올려 봐. 그게 해결책이 될 수도 있어.”
“하기야 악마와 인간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지.”
“그래, 루아. 잘 생각해 봐. 네 인생을 다 바쳐서 그 인간에게 투자했는데 그 인간이 죽는다? 그럼 네 사랑도 다 죽는 거라고. 그럼 남은 생은 어떻게 살려고? 그러다가 자결한 악마들이 한둘이야? 정말 생각 잘해. 루아. 네 친우로서 말하는 거니까.”
“그럼 나도 네 친우로서 말 좀 해 보자.”
“그래, 난 네 말이면 뭐든 들어줄 생각이 있다고. 네가 그냥 친우야? 내 각별한 친우지. 물론, 예전에야 내가 널 죽이려고 했었지만 그건 다 과거고 현재를 생각하면 너만 한 친우는 없더라고.”
“그래? 내 말이면 뭐든 들어줄 거야?”
“인간과 결혼하라는 말만 빼고는. 다.”
“인간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 전쟁, 져 주면 안 돼?”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인간과의 전쟁에서 져 줘. 아니면 내가 네 편에 선 악마들과 너를 죽일지도 모르니까.”
루아의 살벌한 발언에 바로크엘은 농담이 심하다며 꺄르르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루아의 웃던 낯짝이 싸늘하게 굳었다.
“농담 아니야. 바로크엘. 나 진심이야.”
“어떻게 악마가 인간에게 져. 그런 역사는 지금까지 없었어. 루아, 너 왜 그래. 그 인간과 결혼 하려고 지금 이 짓을 벌이는 거야?”
“바로크엘, 넌 예전부터 눈치가 참 빨랐어.”
“정말로 이 전쟁에서 이겨서 그 인간 황제에게 승리를 안겨 주려고? 그럼 넌 인간인 척 영웅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오,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여전히 머리는 잘 굴리네.”
“루아!”
“넌 지금까지 내게 이긴 전적이 없지. 삶이 지루하다면 지금 말해. 지금 당장 죽여 주게.”
루아의 하늘색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었다.
바로크엘은 루아가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얼른 루아의 넓은 어깨에 두른 제 오른팔을 풀었다.
“정말 나와 적이 되겠다는 거야? 악마들이 지금 얼마나 남았다고 생각해? 생각보다 별로 남지 않았어. 이제부터는 서로를 챙길 시기야. 루아!”
“이걸 어쩌나. 나는 동족보다는 내 연인을 더 챙기고 싶은데. 옛날부터 우리 의견이 맞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 지금도 이러네.”
“루아, 장난하지 말고.”
“장난 아닌데. 내가 장난 같은 걸 할 악마로 보여?”
“……아니.”
“그래서 빨리 정해. 내 수하가 될래? 아니면 죽을래?”
“너무 극단적이잖아.”
바로크엘은 지금 루아에게 덤비지 못했다.
옛날보다 더 강력해진 악의 기운 때문이었다.
루아에게서 느껴지는 엄청난 악의 기운은 이미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직 싸우지도 않았음에도.
“얼른 결정해. 전쟁이 코앞이잖아.”
“……네 악의 기운을 각성하게 한 자가 누구야?”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지셨을까? 우리 친우께서.”
“원래 이 정도로 악의 기운을 가지진 않았잖아. 너, 나랑 비등한 수준이었다고!”
“내가 고운 연인을 얻어서. 다 연인 덕분이지.”
“네가 결혼하겠다던 그 여자 인간 말하는 거야?”
“글쎄.”
“……내가 만약에 이 전쟁을 포기하고 네 수하가 된다면 그 여자 인간 만나게 해 줘.”
“네가 요구하지 않아도 만나게 될 거야. 왜냐면, 우린 결혼할 거니까. 네가 내 충실한 수하가 되면 당연히 주인님의 부인은 만나야 도리지.”
“하아, 진짜. 루아 이 또라이 새끼.”
“바로크엘, 너도 잘 알잖아. 내 성격 그렇게 좋지 않은 거.”
“그 여자 인간도 알아? 네 성격 파탄 난 거?”
“알아도 뭐 타격은 없어. 서로 성격이 비슷하거든.”
“하, 정말이지. 루아.”
“그래서 죽을래, 살래?”
바로크엘은 이미 싸우기도 전에 자신이 진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려고 하자 자존심이 꽤 상했다.
생각해 보면, 그 여자 인간 때문에 진 거 아니야.
그 인간 하나 때문에 싸움도 하지 못하고.
다, 루아가 말한 인간 때문에!
바로크엘은 인간 하나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말리는 것에 화가 났다.
그런데도 그 화를 삭여야 했다.
루아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것 같았으니까.
옛정이고 뭐고 간에 그 연인이라는 인간을 위해서는 뭐든 해 줄 기세였다.
정말이지 악마들은 정이 없어서 탈이야.
바로크엘은 혀를 끌끌 차다가 결국 루아가 건넨 선택지를 골랐다.
“살래. 네 충실한 수하가 되어 살게. 됐어?”
“좋아. 그러면 너도 이제부터 인간인 척 행세해야 해.”
“……너만 인간인 척 행세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영웅의 충실한 부하가 악마면 곤란하지. 이왕 연기할 거 끝까지 하자고. 그게 서로에게 편하니까. 그리고 인간 행세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다른 악마들은 인간 행색하며 지내는 거 최악이라던데. 인간들도 못 잡아먹고 착한 이미지를 심어 줘야 한다며 뭐 어쩌고 했었는데.”
“우리 샤를로즈 옆에 있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냥 닥치고 일이나 하면 돼. 바로크엘.”
“…우리 샤를로즈?”
“아, 내가 내 연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않았구나. 샤를로즈 레베크. 내 연인의 이름이야. 곧 내 부인이 될 인간이지. 네 주인님의 부인이 될 인간이니 잘 기억해 둬.”
“잠깐만, 루아. 레베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가문인데.”
바로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베크 가문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하찮아 보여 루아가 그 바로크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나, 봉인했던 가문이잖아. 멍청아.”
“아. 그랬었지. 응? 잠깐만. 네 연인이 그러면 네 원수 아니야?”
“맞는데.”
“그런데도 결혼을 하시겠다?”
“원수이자 나를 구원한 유일한 인물이지.”
이건 또 무슨 개소리라는 듯 바로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루아가 샤를로즈와의 첫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차분히 해 주었다.
죽은 악마의 시체를 의자 삼아 앉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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