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루아.”
샤를로즈의 날카로운 음성에 루아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루아가 제국의 영웅이 되기 며칠 전이었다.
병자들의 섬을 떠나던 날. 샤를로즈가 먼저 레베크 공작저로 떠나고 나머지 인간들도 떠나 혼자 남겨지게 된 루아는 홀로 곰곰이 생각했다.
샤를로즈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들이 많아졌다.
어떻게 해야지만 샤를로즈를 홀로 독차지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루아는 인간 행세를 하기로 했다.
샤를로즈를 얻기 위해서, 아니 샤를로즈의 배우자가 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려면 신분이 필요했다.
샤를로즈와 걸맞은 아주 높은 신분이.
그리고 권력이.
루아는 홀로 병자들의 섬을 거닐다가 보초병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악마와의 전쟁이 벌어진다며.”
“…악마? 그 사람도 잡아먹는다던 미친 악마?”
“그래. 우연히 동료들의 편지에서 봤어. 아마 조만간이라던데.”
“악마들은 다 죽은 거 아니었어?”
“아니었대. 몰래 인간들 틈에 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히익! 그럼 악마가 여기에도 숨어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듣기로는 북쪽 땅의 절반을 지배했다고 하던데? 남쪽의 외딴 섬인 우리와는 완전히 반대잖아.”
“하기야 이런 병자들이 잔뜩 있는 섬에 악마가 오고 싶겠어?”
“우리는 그냥 조용히 병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보초나 서면 돼.”
“또, 다른 소식 없어?”
“딱히. 지금 악마와 인간의 전쟁으로 주변이 다 난리니, 이거보다 더 핫한 소식은 없을걸.”
루아는 보초병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선 소리소문없이 병자들의 섬을 떠났다.
그러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북쪽 땅을 먹은 새끼가 누군지.
누구길래 자신의 봉인이 풀어졌음에도 난리를 치는 것인지.
괜스레 궁금해졌다.
그리고 인간과 악마와의 전쟁은 절대적으로 인간이 지게 되어 있다.
애초에 종족 자체가 다르니 이길 수가 없었다.
악마의 강력한 힘과 능력은 한낱 인간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범위였으니까.
루아는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이 전쟁에서 인간 편을 든다면, 내게 떨어지는 건 뭘까.’
순간 루아의 회색빛 도는 하늘색 눈동자가 번뜩 떠졌다.
‘뭐긴 인간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웅 대접이겠지.’
루아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잠시 어렸다.
일단은 샤를로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제국의 황제란 놈을 만나 봐야겠어.
루아는 악마의 힘으로 해리슨의 침소로 곧바로 이동했다.
***
피곤함에 절어 잠 좀 자려고 푹신한 침대에 누운 해리슨은 갑작스러운 인기척과 어두운 인영에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누구야!”
“인간 황제, 나 좀 도와줘야겠어.”
“…샤를로즈가 데리고 다니던 악마 새끼 아니야?”
“그거 들었나? 북쪽 악마 새끼들이 제국을 지배하려는 이야기.”
“하아, 들었어.”
“그거, 내가 도와주지.”
“…같은 동족을 치겠다고? 악마 새끼들은 동료애도 없어?”
“우리들은 개인주의라서.”
“하! 내가 네 도움을 덥석 받을 것 같아?”
“넌 자신 있나 봐? 악마들 상대로 이기는 거.”
“당연하지. 요한도 있고, 다른 놈들도 실력이 출중해. 그리고 악마 사냥꾼들도 있고. 악마 정도는 다 죽일 수 있어. 아니, 지배할 수 있지.”
루아는 해리슨의 우스꽝스러운 소리에 비웃음이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하게 말해, 나는 선대 레베크 공작에게 죽지 않았어. 봉인 당했지. 그리고 악마 사냥꾼이라는 것이 생겼더군. 악마를 죽여 주는 일종의 직업이라나. 그것도 실상은 달라. 그 희귀한 악마 사냥꾼은 다 악마들이야. 인간들이 속고 있는 거야.”
“……뭐?”
“잘 모르는 눈치인데. 악마들은 지루할 때 자신의 종족을 종종 죽이곤 해. 악마들의 피를 보면 쾌락을 느낄 수 있거든.”
“미친 새끼들.”
“그래서.”
루아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해리슨의 침대로 다가와 침대 위에 두 손을 짚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이 내가 도와주겠다고. 친히.”
해리슨은 평소 조용했던 루아의 돌아 버린 모습에 등골이 서늘했다.
이게 진정한 대악마의 모습인가.
샤를로즈는 과연 저 새끼의 진정한 모습을 알까.
해리슨은 온갖 생각이 다 들면서도 샤를로즈가 떠올랐다.
망할.
미운 정이 가장 무서운 거라고 들었는데.
하아.
진짜 미운 정이 들어 버렸다.
게다가 샤를로즈가 애착 인형처럼 데리고 다니는 루아를 보니 자연스레 그녀 얼굴이 계속 자신의 머릿속에 맴돌아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해리슨은 일부러 루아의 진짜 악마 같은 얼굴에서 눈을 뗐다.
“네가 공짜로 인간들을 도와줄 리 없고, 원하는 것이 있는가 본데? 뭐야.”
“역시 인간의 황제는 다른가. 눈치가 빠르네.”
루아는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매혹적이게 접으며 말을 덧붙였다.
“인간 행색 좀 하게 샤를로즈와 비슷하거나 높은 지위와 재력을 원해.”
“너, 샤를로즈에 아예 미쳤구나.”
“아, 그리고 넌 샤를로즈와의 약혼을 깨 줬으면 해. 섬에 들어가기 전에 약혼 어쩌고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럴 거야. 어차피 샤를로즈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냥 약혼은 미끼였어. 그리고 약혼 취소는 시간이 조금 걸려. 그러니깐 그동안 좀 참아. 어차피 샤를로즈랑 개인적으로 만날 생각 없으니까. 미쳤다고 네게 미움 살 일 만들게?”
“말을 아주 잘 들어서 좋네.”
“대악마님이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데 들어야죠.”
해리슨은 반쯤은 해탈한 심정으로 한숨을 토해 내듯 말했다.
털썩.
루아는 해리슨의 옆에 앉았다.
“뭐야, 왜 앉아. 이제 볼일 끝난 거 아니야?”
“전쟁의 기본은 계획이야. 멍청한 황제야.”
“…….”
지금껏 해리슨은 계획 없이 전쟁을 다녔기에 계획을 짜는 전쟁에는 어리숙했다.
자신을 힘으로 이기는 적국은 이제까지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루아의 계획이라는 단어가 참 낯설었다.
“대충 말해 봐. 넌 무슨 계획을 생각하고 있는지.”
“북쪽을 지배하는 악마의 대가리가 누군지, 그걸 알면 꽤 빠르게 족칠 수 있거든.”
“듣자 하니 금발이 살짝 섞인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자라고 하더군. 아름답다고. 그런데 성격은 짐승처럼 포악하다고 신하들에게 들었어.”
“혹시 목 뒤에 용 그림이 새겨져 있지 않아?”
루아는 해리슨의 설명에 대충 누군지 가늠이 되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아! 맞아. 그 악마를 봤다던 백성의 말과 네 말이 일치 해. 목 뒤에 용 그림이 새겨져 있다고 하더군. 새까만 용 그림.”
“누군지 알겠다.”
루아의 싸늘한 하늘색 눈동자가 무섭게 가라앉았다.
바로 악마 순위에서 제 바로 밑의 순위인 제2위 바로크엘이라는 놈이었다.
그놈은 외모는 인간들이 지어낸 동화책에서 나오는 왕자님 같은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 성격은 괴팍하고 잔인했다.
그리고 지배성이 강했다.
게다가 악마 주제에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악마들과 무리를 만들어 다니는 걸 좋아했다.
루아도 혀를 끌끌 차는,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게다가 루아의 엄청난 힘을 존경하면서도 루아가 죽길 바라는 이상한 관념에 사로잡힌 놈이라, 루아 역시 바로크엘과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바로크엘의 소식은 다른 악마들에게서 듣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 삭막한 관계였는데.
전쟁터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거, 정말 운명일지도.
루아는 제 웃는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해리슨은 루아의 꺼림직한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체 계획이 뭐냐며 다시 되물었다.
그러자 루아가 자신이 다 알아서 하겠다며 넌 편히 쉬면서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만 남긴 채 귀신처럼 사라졌다.
루아 때문에 잠이 다 깨 버린 해리슨은 정돈된 제 머리를 두 손으로 마구 헝클리며 짜증을 냈다.
“샤를로즈나 샤를로즈가 데리고 다니는 저놈이나 사람 열받게 하는 데 도가 텄네. 제기랄! 계획을 말해 줄거면 제대로 알려 주고 가던가!”
해리슨은 포효와 같은 외침을 방 안에서 외치며 두 눈을 꽉 감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오지 않는 잠에 밤새 잠자리를 뒤척였다.
***
해리슨이 말해 준 정보로 루아는 무작정 북쪽으로 향했다.
루아는 추운 걸 싫어했다.
추우면 외로움과 허전함이 크게 다가왔기에.
그 어둡고 춥던 지하실에서 자신에게 온기를 채워 준 것도 다 샤를로즈였다.
‘여기가 아닌 샤를로즈의 옆으로 돌아갔어야 했나.’
루아는 잠시 나약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아냐, 이건 다 샤를로즈와의 노후를 위해서야.’
루아는 이를 악물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북쪽으로 계속해서 전진했다.
제게 덤벼드는 악마들을 가볍게 죽이면서.
그렇게 루아는 북쪽 성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냐!”
“내가 누굴까?”
북쪽 성문을 지키고 있던 여러 명의 악마가 루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루아의 목소리에 악마의 권능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루아는 제 앞에 수그러지는 하급 악마들을 시시하게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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