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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20)

91화

유진은 요한에게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티아가 늘 데리고 다닌 그 하녀가 흑주술사였다는 것과 티아를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것.

그리고 샤를로즈가 데리고 다니던 티아와 똑 닮은 그 하녀 또한 흑주술사라는 사실을.

유진은 엄청난 이야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래도 샤를로즈가 데려온 그 흑주술사는 얌전해. 샤를로즈 말만 듣던데.”

“하아, 샤를로즈.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 거야.”

유진은 중얼거리며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요한은 크게 걱정하지 말라며 유진을 다독였다.

“그러고 보니 나, 샤를로즈한테 은혜를 갚아야 해.”

“그건 또 무슨 개소리입니까?”

“나를 살려 줬거든.”

“샤를로즈가요? 요한 님을?”

유진은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대마법사 요한이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말은 진실이라는 판단을 섰다.

유진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요한 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인물도 아니시니, 샤를로즈가 정말 요한 님을 살렸습니까?”

“응. 내 저주를 풀어 줬어.”

“어떻게 말입니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폐하한테 듣자 하니 악마와 거래한 힘으로 풀어 줬다고 해.”

“악마, 아. 그러고 보니 대악마 루아는 어디 있습니까? 샤를로즈가 데려오지 않았는데…….”

“병자들의 섬에서 사라졌어.”

“네? 사라졌다니요?”

“갑자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더니 사라졌어.”

“생각해 보니 악마 사냥꾼은……?”

“아, 루아가 계속 데리고 다니는 악마를 말하는 거야?”

“악마가 또 있었습니까?”

“뭐야. 유진.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저는 그저 업무에 치여 사니, 주변을 잘 살피지 못했습니다.”

“네가 말하는 그 악마 사냥꾼. 그 녀석도 악마였더라고.”

“하하, 망할.”

유진은 사기를 당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러다가 정말 세상이 멸망하면 어쩌나 싶었다.

악마들이 인간 세상에 얼굴을 비치고 있다는 건 세상이 종말로 향하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유진, 큰 걱정은 하지 마. 우리가 있으니까.”

“네, 위대하신 분들이 계시니까 큰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는 마탑으로 가 볼게. 샤를로즈도 없다고 하니 나도 일하러 가야지.”

“네, 고생하십시오. 요한 님.”

“너도 고생해. 유진.”

휙.

요한은 가벼운 마법 주문을 중얼거리더니 유진의 눈앞에서 금방 사라졌다.

유진은 요한이 사라짐을 깨닫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샤를로즈, 이 망할 것이 드디어 일을 저질러 버렸다.

유진은 제레미도 저 모양이고, 티아도 샤를로즈에게 푹 빠진 상태라 마음이 심란할 수밖에 없었다.

유진은 이 일이 절대로 바깥에 새어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 얼른 제 친우이자 소문 쪽에 영향력이 큰 에펠즈 길드장에게 편지를 써 내렸다.

그 편지는 극비로 운송되었다.

***

“드디어 끝났다.”

샤를로즈는 부티크에서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릴리는 샤를로즈에게 팔짱을 끼며 헤헤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언니한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

“네가 골라 줬으면 그러겠지.”

“예전 같았으면 무례하다고 내 뺨부터 쳤었을 텐데. 언니도 많이 바뀌었다. 내가 언니한테 필요한 인물이라서 그런가?”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내가 무슨 역할을 해 주길 바라?”

“그냥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 물론 네 삶에 내가 중요하지는 않았으면 해.”

“…난 가장 소중한 가족을 언니라고 생각하는데.”

“피도 섞이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중한 가족이야.”

“언니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언니를 소중한 가족 이상으로 생각해.”

“너 심각한 시스콤이야. 알아?”

“시스콤?”

“너무 언니 바보라고. 언니밖에 모르는 멍청한 여동생.”

“그렇게 불려도 상관없어. 난 언니를 위해서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니까?”

“무슨 죽을 준비까지 해. 그냥 평소대로 해. 네 역할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아이를 낳고 사는 거야.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물론, 나를 위해서.”

샤를로즈는 릴리를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지금 데이트라는 말 같지도 않은 걸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샤를로즈에게 있어 릴리는 그저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줄 중요한 말 같은 존재였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릴리 역시도 샤를로즈를 진정한 가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 가족애가 너무 넘쳐서 오해할 만한 말을 많이 해서 큰일이지만.

샤를로즈는 릴리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원작이나 구경하려고 하는데.

원작 여자 주인공인 릴리, 그러니깐 티아가 남자 주인공들을 친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샤를로즈는 어떻게 하면 남자 주인공들과 티아가 이어질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에서 환호성이 터지는 것이었다.

“와아아아!”

“영웅이다!!”

“여기 봐 주세요! 영웅님!”

영웅?

이건 또 난데없는 스토리 전개네.

샤를로즈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 그 ‘영웅’의 낯짝이나 보려고 까치발을 들다가 사람들에게 치여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릴리는 수많은 인파에 앞으로 넘어지는 샤를로즈를 붙잡지 못했고, 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툭.

샤를로즈는 힘없이 딱딱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정신없어.

샤를로즈가 숙인 고개를 다시 빳빳이 세우려는데 주변에서 큰 난리가 났다.

“저러다가 말에 밟히겠어!”

“큰일이야!”

“꺄아아악!”

괴상한 비명이 주변에서 들려오자 샤를로즈는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정면을 보자, 커다란 흑색의 말이 자신을 덮치려고 했다.

샤를로즈는 얼른 도망가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두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는 건가.

아니지, 어차피 죽어도 살아나니 상관없나.

샤를로즈가 체념이라는 감정을 마주했을 때, 흑색의 말은 운이 좋게도 그녀의 앞에서 멈추었다.

탁.

누군가가 흑색의 말에서 내려왔다.

샤를로즈는 주변의 시끄러움과 혼란함에 제게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흐리게 보일 뿐이었다.

“샤를로즈.”

그때였다. 귀에 익숙하고 정겨운 낮은 음성이 샤를로즈의 귓가를 스쳤다.

아름다운 목소리가 샤를로즈의 흐트러진 정신을 바로 잡아 주었다.

“…루아?”

샤를로즈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강한 햇볕에 잘 보이지 않는 루아의 희미한 얼굴이 제 시야에 잡혔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샤를로즈.”

루아는 넘어진 샤를로즈에게 허리를 굽혀 오른손을 내밀었다.

샤를로즈는 웅성거리는 주변 소리에 얼른 루아의 창백한 손을 맞잡았다.

루아 덕분에 일어났지만, 무릎이 심하게 까진 탓에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샤를로즈, 조심해요.”

비틀거리는 샤를로즈의 허리를 한 팔로 단단히 붙잡은 루아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서는 샤를로즈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샤를로즈랑 결혼하려고 영웅이 되어서 돌아왔어요.”

샤를로즈는 갑작스러운 루아의 스킨십에도 덤덤했다.

아무래도 루아와 동침까지 한 사이니 이런 스킨십 정도는 애교였다.

샤를로즈가 반응이 없자 루아는 서운함을 표출했다.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

“저는 샤를로즈가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세상을 멸망시킬 뻔했어요.”

“…….”

“샤를로즈.”

“저기, 루아. 일단 우리 자리 좀 옮길까? 여기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거북한 샤를로즈가 루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자 루아는 상관없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그 둘은 꽤 오랜만에 재회했다.

***

대륙의 영웅이 되어 나타난 루아에게는 조금 긴 사연이 있었다.

대륙의 영웅이 된 루아는 제국의 공작위를 수여 받게 되어 황궁과 맞먹을 정도로 큰 저택을 가지게 되었다.

루아 페롤로제나.

페롤로제나 저택의 응접실에는 샤를로즈와 루아, 둘 뿐이었다.

샤를로즈가 릴리와 레나를 먼저 레베크 공작저에 보냈기 때문이었다.

[언니, 나와의 데이트는……?]

[미안. 나중에 하자. 지금은 루아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알았어. 대신 자고 오면 안 돼.]

[레나, 얼른 티아를 데리고 가!]

[언니!]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던 릴리를 억지로 보내 놓고, 샤를로즈는 루아를 따라 그가 소유한 저택으로 따라간 상황이었다.

얼마나 웅장한지 레베크 공작 가문의 저택이 간소해 보일 정도였다.

집 구경은 여기서 그만하고.

지금 당장은 루아가 어떻게 제국의 공작이 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하는 게 먼저였다.

샤를로즈는 저를 여유롭게 주시하고 있는 루아를 향해 질문을 했다.

“루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루아는 샤를로즈의 뻔한 질문에 눈매를 초승달처럼 휘었다.

“샤를로즈랑 진짜로 결혼하기 위해서 일 좀 벌였어요.”

“…나랑 결혼을? 우리는 비즈니스라고 했잖아. 루아.”

“그러기에는 제 마음이 이미 샤를로즈에게로 홀라당 다 넘어가 버려서요. 죄송해요, 샤를로즈. 저는 더 이상 샤를로즈의 말만 듣고 사는 충실한 개새끼로는 지내지 못할 것 같아요.”

샤를로즈는 제게 들이대는 루아의 대담함에 할 말을 잃었다.

얌전했던 루아가 변했다.

샤를로즈의 눈꺼풀이 느리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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