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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90/120)

90화

벌써 2시간째다.

끝도 없이 나오는 신상 드레스에 샤를로즈는 이미 지친 지 오래였다.

앞으로 갈 가게가 열 곳이 넘는데.

지금 옷 가게 하나에서 시간을 얼마나 허비하는 거야.

샤를로즈는 릴리의 소매를 꾹 잡아당겼다.

릴리는 신상 드레스를 보다가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샤를로즈의 손이 보여 고개를 돌렸다.

“대충 아무거나 고르면 안 돼?”

“대충이라니. 안 돼. 언니.”

“나 이러다가 드레스만 보면 구역질이 나게 생겼어.”

“그럼 언니가 원하는 드레스 딱 세 벌만 골라 봐.”

지금 샤를로즈의 두 눈에는 화려한 드레스가 다 거기서 거기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화려함에 눈이 아플 뿐이었다.

“언니가 원하는 게 없다면 내가 고르는 수밖에 없어.”

릴리는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주변의 신상 드레스를 꼼꼼히 살폈다.

샤를로즈는 릴리의 고집 센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제 옆에 서 있는 레나의 팔을 팔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레나, 네 눈에는 무슨 드레스가 가장 나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음. 지금까지 본 드레스 중에 샤를로즈 님과 어울리지 않은 드레스는 하나도 없었어요.”

레나의 속삭임에 샤를로즈는 미간을 좁혔다.

‘내가 말하는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레나.’

대충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라 달라는 의미로 네 찬스를 쓰려 했는데 꽝이네.

왜 이런 건 눈치가 없는 거야.

레나.

샤를로즈는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똑똑한 레나가 조언을 해 주었다.

“샤를로즈 님의 눈동자와 어울리는 색깔의 드레스를 고르는 건 어떨까요? 하나는 금색으로 하나는 샤를로즈 님의 머리카락 색깔과 어울리는 흑색, 마지막은 티아의 눈동자 색깔과 같은 푸른색 드레스로요.”

“티아는 왜?”

“이 제국은 자신의 눈동자 색깔과 관련된 소품을 간직하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여기더라고요. 책에서 봤어요.”

“레나는 책을 정말 많이 읽는구나. 그런 세세한 것까지 알고.”

“저는 지식을 얻는 걸 좋아하니까요. 그리고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소중한 사람의 눈동자 색깔과 똑같은 옷을 입으면 상대방이 무척 좋아한다고 해요.”

“으음. 그렇구나.”

샤를로즈는 레나의 현명한 충고에 신상 드레스에 한눈을 팔고 있는 릴리의 팔을 툭툭 쳤다.

“티아. 내가 원하는 드레스를 대충 알 것 같아.”

“정말?”

샤를로즈의 말에 릴리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응. 얼추 내가 원하는 색깔의 드레스를 떠올려봤어.”

“무슨 색깔인데, 말 만해.”

“금색 드레스, 흑색 드레스 그리고 네 눈동자 색깔을 닮은 푸른색 드레스.”

“…어?”

“색깔을 이렇게 정했어. 왜,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눈동자 색깔과 같은 색의 드레스는 왜…?”

릴리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샤를로즈에게 물었다.

“널 소중하다고 생각하니까.”

“…정말로? 내가 언니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그럼. 넌 내 소중한 여동생이니까. 서로 많은 비밀을 공유한 사이기도 하고. 그래서 네가 없으면 조금 허전할지도 모르겠네.”

릴리는 무척이나 감동 받은 표정을 하며 샤를로즈의 두 손을 제 두 손으로 포갰다.

“언니. 사랑해.”

“나도.”

막힘없이 대답하는 샤를로즈의 반응에 릴리는 지금 당장 제 언니를 데리고 신전으로 가 혼인 신고부터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성애가 허용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근친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참에 나와 언니를 아예 파양시켜달라고 유진 오라버니한테 말 좀 할까.’

릴리의 머릿속은 이미 샤를로즈와 결혼까지 해 아이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다 못해 더 나아갔다.

“언니, 난 정말로 언니 없으면 못 살아. 내 마음 잘 알겠지?”

“음. 대충은?”

“대충 말고 진지하게.”

“응. 네가 날 엄청나게 집착하는 건 알겠어.”

“그 집착은 언니에 대한 사랑이라는 걸 잊지 마. 응?”

“알았으니까 얼른 드레스를 고르고 다른 가게로 가자. 이러다가 여기서 하루를 보내겠어.”

“응! 언니가 말한 색깔대로 드레스를 내가 한 번 추려 볼게.”

“부탁해.”

“내 생일 파티 날, 언니가 가장 빛나야 하니까. 열심히 골라 볼게!”

“…응.”

대체 왜 네 생일 파티에 다른 사람이 빛나야 하는 거지?

샤를로즈는 릴리의 발언에 조금 당황했지만, 그러려니 넘겼다.

그러는 편이 더 속이 편했으니까.

“언니, 저기 휴게실에서 쉬고 있어. 내가 다 고르면 말할게.”

휴게실이 있었으면 진작 말 좀 해 주지!

샤를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릴 리가 알려 준 방향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휴게실’이라고 쓰여 있는 공간이 샤를로즈의 시야에 보여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가 길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 위에 털썩 앉았다.

레나도 쪼르르 달려와 샤를로즈 옆에 앉았다.

“귀족 영애로서 살아가는 거 힘드네.”

“그래도 다들 귀족이 되길 원하죠. 아무래도 이 세상은 신분이 가장 중요하다 보니까요.”

“현실 세계에서는 스마트폰 덕분에 이 손가락 하나로 쇼핑했는데. 여기는 너무 구시대적이야. 피곤해.”

“음. 그래도 현실 세계보다는 이곳이 더 낫지 않아요? 신이 될 수 있는 기회인데. 신이 되면 얼마나 혜택이 많은데요.”

“무슨 혜택이 있는데?”

“저 말고도 다른 부하들을 만들어서 일을 다 떠넘겨도 되고, 쇼핑 같은 것도 목록을 적어서 시켜도 되고. 신이란 자리는 생각보다 편하답니다. 샤를로즈 님.”

“그거 그냥 남 부려 먹는 거잖아.”

“신보다 위에 있는 자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남을 부려 먹는 것도 당연한 신의 권리에요.”

“일단은 내가 신이 되어야 하잖아.”

“이대로만 잘 유지하면 빠른 시일 내에 신이 되실 거예요. 참고 기다려 봐요.”

레나와 간단한 대화를 하며 샤를로즈는 피로감을 없앴다.

그나저나 신이 되면 무엇을 하면 좋으려나.

샤를로즈는 처음으로 퇴장을 제외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샤를로즈와 티아가 사라지니 레베크 공작저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유진 레베크는 티아가 샤를로즈와 함께 쇼핑에 나가는 걸 허락하고 혼자 업무를 보고 있었다.

이 넓은 집무실에 혼자 쓰려니 조금은 어색했다.

보통은 저기 소파에 드러누운 제레미가 있어야 했지만, 그는 지금 심리 치료를 받고 있었다.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었다.

결국 제레미의 방도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웬만해서는 들어가지 말라고 사용인들한테 일러두었다.

하아.

유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일단 자신의 업무를 보려고 했다가 오늘따라 일이 잘 잡히지 않아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러다가 제 눈앞에 아지랑이가 보이더니 갑자기 요한이 나타났다.

유진은 요한의 등장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위대한 대마법사님께서 저희 가문에는 무슨 볼일로 오셨습니까?”

요한은 제 앞에 고개를 숙이는 유진에게 예의는 그만 갖추라며 손짓했다.

유진은 요한의 말대로 숙였던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샤를로즈를 보려고 왔는데. 샤를로즈는 잘 있나?”

“그것이, 지금 티아와 함께 수도에 나갔습니다.”

“티아와 함께? 무슨 일로?”

“제가 보내드린 티아의 축하 파티 초대장을 보셨는지요?”

“아, 봤지.”

“그것과 관련되어 살 것이 있다고 샤를로즈를 끌고 나갔습니다.”

“하필이면 오늘 수도라니.”

“수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게 말이야. 폐하가 아끼는 애완동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수도에서 날뛴다는 소문을 들었거든. 나는 폐하의 명령에 겸사겸사 샤를로즈도 볼 겸 나온 거야.”

“아, 폐하의 애완동물이라면 어떤……?”

“그 새까만 고양이 있잖아. 폐하의 얼굴을 맨날 할퀴던 그것.”

“아. 예전에 폐하께서 안고 있었던 그 고양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그 고양이가 기어코 황궁을 탈출했더라고. 우리가 티아를 찾는 동안 말이지.”

요한은 한숨을 폭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다 제 불찰입니다. 요한 님.”

“나는 네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만.”

“제 남동생 녀석이 황궁을 제대로 지켰어야 했는데. 망가져 있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됐어. 듣자 하니 다 샤를로즈 때문에 미친 거라며.”

“……네.”

“후우, 샤를로즈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혹시 병자들의 섬에서 샤를로즈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니 유진은 병자들의 섬에서 샤를로즈와 티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기야 티아도 말이 없고, 샤를로즈 또한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유진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샤를로즈와 동행했던 요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유진은 혹여 요한이 제 부탁에 기분이 나빠할까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요한은 흔쾌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샤를로즈 덕분에 아주 진귀한 구경을 많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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