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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89/120)

89화

“내 진짜 이름?”

샤를로즈의 물음에 티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가짜라는 고백을 제대로 한 사람도 샤를로즈가 처음, 자신의 진짜 이름을 물어봐 준 것도 샤를로즈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샤를로즈만이 자신의 본 모습을 보기 원했으니까.

“그래, 네 진짜 이름이 뭔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내 진짜 이름은 릴리라고 해.”

“릴리. 그럼 우리 둘만 있을 땐 내가 널 릴리라고 불러 줄게.”

“그러다가 다른 사람한테 내가 가짜라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내가 지어 준 애칭이라고 둘러대면 되지. 무슨 문제라도 생기겠어?”

“그럼 언니만이 나를 릴리라고 불러야 해. 레나, 너는 절대로 나를 릴리라고 부르지 마!”

“알겠어요. 티아.”

“샤를로즈 언니, 꼭 내 진짜 이름을 불러 줘야 해?”

“응. 좋아. 릴리.”

“응, 고마워. 언니.”

티아는, 아니 릴리는 역시 샤를로즈를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는지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이렇게나 감동하게 한 샤를로즈를 어떻게 놓아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릴리, 네가 가고 싶은 데가 설마 우리가 같이 나온 보육원이야?”

“아, 그건 아니야.”

“그럼 어딘데?”

“일단 쇼핑부터 하고 집에 돌아갈 때 즈음에 알려 줄게.”

샤를로즈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릴리에게 자신을 판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 애가 어떤 곳을 갈지 안 갈지는 그 애의 선택에 달렸다.

‘나에겐 선택지가 없지. 오늘 하루는 릴리에게 맞춰야겠네.’

샤를로즈는 마차의 창문을 가리고 있던 분홍색 커튼을 살짝 손으로 치우며 바깥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그래도 바깥에 나오니깐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

계속 방 안에만 박혀 있으려니 조금 죽을 맛이었다.

역시 사람은 바깥 공기를 쐬면서 지내야 한다는 어느 글이 떠올랐다.

‘오늘은 숨 좀 제대로 쉬어 볼까.’

병자들의 섬에서 레베크 공작저로 온 후부터 계속 방 안에만 갇혀 있던 샤를로즈가 기지개를 켰다.

찌뿌둥한 어깨가 조금 결렸다.

“티아, 아니 릴리. 쇼핑할 돈은 가져왔지?”

“물론이지. 나 생각보다 돈을 많이 모아 뒀더라고.”

“얼마나?”

“비밀이야. 따지자면 대략 수도 집 한 채 값 이상은 될 거야. 아마도.”

샤를로즈는 아예 오늘 작정하고 온 릴리를 보자 고개를 살살 내저었다.

오늘 하루를 얼마나 굴리려고 그리 많은 돈을 가져온 걸까.

샤를로즈는 조금 겁이 났다.

아니, 겁이라기보다는 피곤함이 벌써 몰려왔다.

아직 릴리와의 쇼핑을 시작하기도 전에.

왠지 모르게 기가 굉장히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적당히 쇼핑하자. 릴리.”

“생각해 볼게. 내가 알아본 가게만 해도 한 10곳은 넘으니까.”

“살 게 그렇게나 많아? 뭐 살 건데?”

“부티크에 들려서 드레스 몇 벌이랑 보석점에서 최근에 나온 보석들 구경도 하고. 아! 수도에 아주 유명한 디저트 집이 있는데 거기도 가고. 음, 점심도 먹을 겸 레스토랑도 가고. 할 게 많아. 언니.”

“그걸 오늘 하루에 다 끝내자고?”

“응. 그러기 싫으면 나랑 며칠 더 데이트 할까?”

“아냐. 하루 만에 끝내자. 한 번 더 나오기 귀찮을 것 같으니까.”

“응. 언니. 난 언니랑 데이트할 생각에 너무 설레어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아. 언니는?”

“나는 오늘 일정만 들었음에도 벌써 몸이 지친다. 릴리.”

“힘들면 꼭 말해야 해?”

“……응.”

끼이이익-.

마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와, 수도에 도착했나 봐. 언니, 얼른 내리자.”

“응.”

그렇게 지옥 같은 쇼핑이 시작되었다.

***

샤를로즈와 릴리는 일단 부티크부터 들렀다.

레나는 조용히 그 둘의 뒤를 따라 부티크 안으로 들어왔다.

고급스러운 옷을 판매하는 곳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생각보다 좋았다.

미어터질 것 같은 시장바닥 같은 느낌을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했다.

샤를로즈는 그 흔한 로판에서 나오는 드레스를 파는 가게는 처음이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의 옷만 해도 하녀들이 다 챙겨 주기 때문에 직접 옷을 구매하러 돌아다니지 않았다.

게다가 샤를로즈는 하루에 옷을 여러 벌 갈아입는 사치스러운 귀족이 아니었다.

그저 한두 벌 정도만 쟁겨 두고 입는 스타일이었다.

이유는 다시 옷 갈아입기 귀찮았기 때문이었는데.

그에 반면, 릴리는 잠옷 한 벌, 아침에 입을 옷 한 벌, 점심에 입을 옷 한 벌, 저녁에 입을 옷 한 벌.

하루에 총 서너 번은 옷을 갈아입었다.

릴리는 청결에 아주 예민했다.

그렇기에 드레스룸에 옷이 참 많았다.

새 옷도 넘치고 넘쳤지만, 샤를로즈와 수도의 데이트를 하려고 오늘 하루 제대로 사치스럽게 살아보려고 마음먹었다.

“언니, 내가 여기 예약 잡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예약도 있어?”

“이런 유명한 가게들은 다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해. 아니면 못 와. 이런데.”

“그렇구나. 참 너도 부지런하다.”

“여기 예약금도 비싸. 가게 안에 우리밖에 없잖아. 오늘 하루를 샀어. 내가.”

릴리는 얼른 칭찬해 달라며 샤를로즈르 빤히 바라보았다.

샤를로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하루 이 가게를 샀다고?”

“응. 언니랑 오붓하게 데이트하려고. 오늘 하루치 매출을 내가 미리 냈지. 예약금도 3배나 줬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가게야?”

“그럼. 여기 가게에 오려면 기본 1년은 기다려야 해.”

“너 여기 돌아온 지 별로 안 됐잖아. 언제 예약한 거야?”

“언니가 방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내가 오늘만을 위해 모든 것을 세팅했지. 언니는 그저 얌전히 받아먹기만 하면 돼.”

“……지독하다. 릴, 아니 티아.”

“언니가 원하는 드레스를 골라봐. 나는 가게 주인과 이야기 좀 할게. 새로 나온 신상이 있나.”

릴리는 가게 주인을 불렀다.

“주인장, 있나요?”

“레베크의 작은 공녀님께서 오셨군요. 미리 인사하지 못해 죄송해요. 잠깐 일 좀 보느라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네요.”

“아니에요. 오늘 언니에게 어울릴 만한 드레스를 고르러 왔어요.”

“어머나, 레베크의 큰 공녀님께서도 오셨군요.”

샤를로즈는 주인장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세간에 떠도는 자신의 이미지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세상에 악녀라고 손가락질받는 영애가 이렇게 태평하게 수도를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돌 맞는 거 아니야?’

괜한 걱정이 앞섰다.

샤를로즈는 주변에 레나와 릴리 그리고 주인장밖에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면 아마 가게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 샤를로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어색했다.

특히 자신이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래도 제 주변에 릴리와 레나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릴리는 샤를로즈의 어두운 낯빛에 제 언니에게 다가갔다.

“아. 응.”

“새로운 신상이 나왔대. 같이 볼래?”

“어어. 그래.”

샤를로즈는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릴리가 건넨 손을 맞잡았다.

“여기가 이번에 제가 만든 신상품이에요.”

아름다운 드레스들이 많이도 걸려 있었다.

샤를로즈는 드레스의 화려함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왜 이 가게가 인기가 있는 줄 알겠네.’

샤를로즈는 자신이 지금까지 옷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인장의 신상품들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예쁘다.

가지고 싶다.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봄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밭 같기도 했고.

“역시 내 마음에 꼭 드는 것들만 모아 놨네요.”

“작은 공녀님의 조언대로 했을 뿐이에요.”

원래부터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 릴리와 주인장은 서슴없이 대화를 했다.

그 중간에 낀 샤를로즈는 멀뚱히 드레스들을 관찰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릴리와 맞잡은 손이 움직였다.

샤를로즈는 릴리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신상품들을 봐야 했다.

“언니한테 어울릴 만한 드레스가 어디 있으려나.”

릴리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샤를로즈에게 입힐 굉장한 드레스를 신중하게 보고 있었다.

이건 너무 어두운데.

이건 너무 화려해.

저거는 너무 칙칙하고.

예쁜데, 언니에게 어울릴 만한 게 딱히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릴리는 샤를로즈에게 혹여 마음에 드는 것이 있냐고 물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언니, 마음에 드는 드레스 없어? 내 생일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

“다 예쁜데.”

샤를로즈는 이런데 안목이 떨어졌다.

그야 샤를로즈는 제 어머니만 있으면 되는 어머니 바보였고, 딱히 사치를 취미로 부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보통 악역이면 사치까지 부리면서 악행을 즐기면서 살 테지만.

원작 샤를로즈는 달랐다.

제 어머니에 관련된 것만 집착하고 다른 것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짜증 나게 하면 그대로 손이 올라가는 습관이 있었지만.

김단이 샤를로즈의 몸에 빙의한 이후 그 습관도 버리게 되었다.

지금의 샤를로즈는 그야말로 순둥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둥이였다.

그 악명 높던 샤를로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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