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샤를로즈 님, 엔딩에 관한 기억이 날 것 같아요.”
레나의 말에 샤를로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얼른 말해 보라며 재촉했다.
레나는 두 눈을 위로 올려 곰곰이 생각하다가 살짝 열린 입술을 움직였다.
“그레이스는 책을 읽어도 해피 엔딩 위주로 읽었어요. 동화책도 해피 엔딩 아니면 읽지 않았어요. 그러니깐 그레이스가 원하는 시나리오의 엔딩은 해피 엔딩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해피 엔딩이라면, 여주와 남주가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말하는 거야?”
“아뇨. 여주가 다 밟아 누르는 결말을 좋아했어요.”
“그게 해피 엔딩…?”
“그레이스의 취향이니 뭐,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겠죠?”
“티아. 네 역할이 제대로 정해졌어.”
“나보고 지금 주변 남자들을 다 밟아 버리라고 부탁하려는 거야? 맨입으로?”
“그러니까 같이 쇼핑하러 가자. 응?”
샤를로즈가 살갑게 나오자 티아는 꿍한 기분을 금방 풀었다.
‘하긴, 내가 언니를 어떻게 이겨 먹어. 절대 못 이기지.’
“알았어. 그런데 밟는다는 게 정확하게 무슨 뜻이야?”
“네가 정점에 오르라는 거지.”
“정점이라면…….”
“네 남자들을 지그시 밟고 올라가 신하처럼 그들을 부려 먹는 거지.”
“내가 과연 그런 걸 할 수 있을까, 언니?”
“괜찮아. 티아. 넌 소질이 있을 거야.”
“만약에 진짜 엔딩이 나면, 언니는 떠날 거야?”
티아는 사실 샤를로즈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제 마음과는 다르게 샤를로즈는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기야 자유를 원한다고 했으니 자유를 찾아 떠나겠지.
그런데 그 여행에.
‘내가 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티아는 샤를로즈를 완전히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옆에, 아니 자신의 시야 안에만 계속 머물러 살았으면 좋을 텐데.
티아는 아쉬움을 토해 내며 다시 방긋 웃었다.
일단은 언니와의 데이트가 더 중요하지.
미래는 나중에 생각하자.
티아는 애써 샤를로즈가 없는 미래를 부정하고, 샤를로즈의 팔에 팔짱을 꼈다.
“언니, 나 수도에 오면 가고 싶은 데가 꼭 있었어.”
“오늘은 네 응석을 다 받아 줄게. 가자.”
“와, 언니 정말로?”
“그래. 대신에 네 역할은 제대로 해야 해?”
“그럼.”
그렇게 샤를로즈는 티아의 성원에 못이기는 척 쇼핑에 나설 준비를 했다.
***
제국의 수도는 넓고 볼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도 관광 차원으로 많이들 들리는 곳이었다.
티아는 귀찮아하는 샤를로즈와 함께 레베크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가 박힌 고급스러운 마차를 탔다.
물론, 샤를로즈의 보좌관인 레나 역시 마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샤를로즈가 위험해지면 안 되니까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야 했다.
애초에 레베크 공작 가문의 비밀 호위가 이미 그들이 저택에서 나선 후부터,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닌다 하여, 레베크 공작 가문의 호위들은 분신이라고 불렸다.
샤를로즈는 이 호위가 있는지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티아는 이 그림자 호위가 붙을 걸 알고 있었다.
그야 유진 오라버니가 누누이 이야기했었고, 몇 번 그림자 호위 단장과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샤를로즈는 제 죽은 어미밖에 몰랐으니 알 턱이 없었다.
지금 샤를로즈 몸에 들어간 김 단 역시.
게임에서는 이런 비밀스러운 호위가 나온다는 정보는 없었다.
게임에서는 여자 주인공, 티아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마다 남자 주인공들이 용사처럼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샤를로즈는 마차에 탄 후에서야 호위 기사들을 데리고 가야 하지 않냐며 티아에게 물었다.
티아는 부채를 차르륵 펴며 제 얼굴 반을 가리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어머, 언니. 이미 우리 호위 기사들은 움직이고 있어. 설마 몰랐어?”
“응. 내 관심에 두지 않은 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아서.”
“하긴 언니 성격이 그렇지 뭐.”
“뭔가 비꼬는 것 같은데. 티아?”
“모르는 거 있으면 다 물어봐. 가는 동안 다 대답해 줄 테니까. 물론 내가 아는 선에서.”
“가문에 대해서? 그 정도는 나도 적당히 알고 있어.”
“그냥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있을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언니한테만 이렇게 헤실거리지, 평소에는 천재 소리 듣고 다녀.”
“미안한데, 진짜 궁금한 게 없는데.”
“나에 대해서라든가, 성녀에 대해서라든가. 음.”
티아는 샤를로즈가 내심 자신과 관련된 질문을 해 줬으면 해 어필했다.
그걸 눈치챈 샤를로즈가 한숨을 작게 내쉬며 질문 하나를 던졌다.
“네 생일.”
“설마 여태까지 내 생일도 모르고 있었어?”
“언제더라. 갑자기 기억이 안 나네.”
샤를로즈에게 빙의하고 그다음 날이었는데.
언제더라.
아, 추웠던 건 기억나네.
그리고?
날짜는?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12월 21일.”
“아, 그렇구나.”
“난 언니 생일 알고 있는데.”
“몇월 며칠인데?”
“8월 21일.”
“세 달밖에 차이 안 나네.”
“응, 설마 언니 본인 생일도 잊어버린 거야?”
“하나도 기억 안 나. 몰라.”
“그럼 황제의 탄생일은?”
“그것까지 알아야 해?”
샤를로즈는 해리슨의 생일을 굳이 알아야 하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제국민으로서 당연한 상식인데?”
“난 평생 제국민으로 살기 싫으니 안 들을래.”
“안 돼, 언니. 아무리 폐하가 싫어도 그렇지. 황제의 탄생일 정도는 알아야지.”
“하아, 그래서 언젠데?”
“1월 21일.”
“21일? 우리 셋 다 뒤가 같은 날짜네.”
“더 신기한 거 알려 줄까?”
“…뭔데?”
티아는 기대하라며 큼, 헛기침을 내뱉고 말을 꺼냈다.
“요한도 생일이 21일이고, 주드엔이랑 루야도 생일 끝이 21일에 태어났어. 우리 다 똑같아.”
“…오라버니들은?”
“오라버니들은 21일 아니야. 유진 오라버니가 5월 22일, 제레미 오라버니가 9월 14일.”
“오라버니들은 뒤가 다르네.”
“응. 나 정말 신기했잖아. 내 주변 사람들이 나랑 언니랑 똑같이 뒤가 21일인 게.”
레나는 티아가 신기해할 동안 몰래 샤를로즈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레이스가 21이라는 숫자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생일이 겹친 모양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
한두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인원이 뒤에 날짜가 다 겹친다고?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든 날짜라는 게 너무 티가 나네.
그걸 모르고 그저 운명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티아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티아, 그거 다 조작이야.’
샤를로즈는 티아의 순수함을 깨부수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아, 언니. 예전 일인데 기억이 나려나?”
“뭔데, 말해 봐.”
샤를로즈는 그냥 티아와 마차에서 수다를 떨기로 작정했다.
자신이 말을 하지 않으면 징징거리면서 대화해 달라고 할 것 같은 예감이 바싹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언니와 같은 입양아라는 거 알지?”
“알고 있어.”
“그렇구나. 언니는 알고 있었구나. 오라버니들은 잘 모르는 것 같던데. 그래서 언니한테 많이 미안했어. 죄책감도 들었고. 언니만 입양아가 아닌데. 나도 입양안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길래 이렇게 돌려서 말하는 거야.”
“언니, 그거 알아? 우리 같은 보육원 출신인 거.”
“……뭐?”
샤를로즈는 티아의 발언에 놀랐다.
대충 입양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같은 보육원 출신?
이건 또 무슨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지?
샤를로즈는 더 이야기해 보라며 턱을 까딱 움직였다.
티아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언니와는 다르게 비밀리에 레베크 공작 가문에 입양 당했어. 성녀 표식이 떴거든. 그걸 죽은 어머니가 금방 눈치채고 날 데려온 거야. 예지몽을 꿨대. 내가 다음 성녀가 되는 아주 큰 꿈을.”
“설마, 너 다음 내가 입양된 걸로 아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런 전개 아니지?”
“맞아. 보육원에 들르면서 어머니가 언니에게 반해 버린 거야. 내 인형이 여기 있었다며.”
“……내가 어머니의 인형?”
“응. 게다가 더 웃긴 건 나도 가짜야. 나는 레베크 공작 가문의 갑자기 죽어 버린 막내 대용품으로 입양된 거야. 사실 내 이름은 티아 레베크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가짜라니.”
“언니는 가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없네.”
티아는 제 얼굴의 반을 가린 부채를 스르륵 내려놓으며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티아 레베크는 나와 정말 닮은 레베크 공작가의 예쁨 받는 막내였어. 그런데 병으로 죽었대. 별장에서 홀로. 아버지는 막내를 굉장히 아꼈다고 들었어. 오라버니들이 내가 입양아인 걸 모르는 건 아마 그 애가 별장에서 죽어서일 거야.”
“티아, 그러니깐 너도 나와 같은 가짜라는 소리지?”
“응. 나도 가짜야. 그것도 언니와 같은 보육원에서 입양된 가짜. 티아로서 살기가 나도 힘들었어. 대용품 역할은 참 고달팠어. 다들 날 티아 레베크로만 알고 있어서, 진짜 내 이름은 사라졌거든. 불러 주는 이도 없었고. 그렇게 나는 티아 레베크가 됐어.”
티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샤를로즈가 무심하게 물었다.
“네 진짜 이름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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